군기 빡쎘던 엣날에는 과연 사고가 적었을까?

사격통제병 작성일 09.02.18 00: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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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참극' 68년 안동 수류탄 사건

1963년 10월 19일 강원도 인제에서 육군 모 부대장 일가족을 도끼로 몰살시킨 고재봉 사건은 지금도 노장년층의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고 상병은 박모 중령의 군화 등을 훔쳤다는 혐의로 6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한 것에 원한을 품고 박 중령의 집을 찾아갔다가 엉뚱하게도 다른 장교의 일가족 6명을 살해했다.

고 상병은 사건 발생 25일만에 서울에서 붙잡힌 뒤 총살에 처해졌지만 한동안 "고재봉 보다 나쁜 놈", "제2의 고재봉"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그는 엽기살인마의 대명사가 됐다.

1968년 안동 수류탄 사건은 서슬 퍼런 군부정권 하에서도 군대 내 무기관리체계에 허점이 뻥뻥 뚫렸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68년 5월 18일 밤 10시20분경 안동시 운흥동 문화극장에서 영화 <복수>를 보고 나오던 4백여명의 시민들은 난데없는 수류탄 공격에 혼비백산했다. 육군 신모 하사가 만취 상태에서 관객들을 향해 수류탄 2개를 던졌는데, 이로 인해 5명이 즉사하고 44명이 중경상을 입은 것이다.

신 하사는 사건 발생 4일전에 내무반에서 비상용 수류탄 3개를 훔친 뒤 휴가를 얻어 안동에 내려왔는데, 해당부대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수류탄이 없어진 사실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신 하사는 경찰과 1시간 가량 대치하다가 붙잡혔다. 신 하사는 "애인 박모씨의 변절에 분노한 나머지 잘 노는 사람들에게 분풀이를 하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지만, 박씨는 "변심한 일이 없는데 신 하사가 남의 말만 믿고 오해를 했다"고 반박해 주변사람들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이듬해 2월 육군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신 하사는 안구 기증으로 속죄의 뜻을 밝혔다.

사건 발생 1시간 전 "신 하사가 수류탄을 들고 행패를 부리고 있다"는 주민 임모씨의 신고를 외면했던 현지 경찰은 책임 추궁을 걱정한 나머지 임씨에게 "사건 전에 신고한 일이 없었던 것으로 하라"고 진술 번복을 종용한 사실이 드러나 더욱 큰 비난을 받았다.

안동 수류탄 사건이 일어난지 근 석달 만에 또 다른 휴가병이 일을 저질렀다. 미 2사단 소속 카투사 김모 상병은 휴가차 충남 서산의 집에 왔다가 "안집에 세든 김모씨가 3년전 꾸어간 쌀 7가마를 갚지 않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일가족 4명이 잠든 방에 수류탄 2발을 내던졌다. 이 사건으로 세입자 김모씨의 부인과 아들이 폭사하고 김씨 등 2명은 큰 부상을 입었다.

60년대에는 군경 또는 장교들 사이에 시비가 붙어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사병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장교들이 난동을 부린 일도 적지 않았다.

공군장교와 해병장교의 패싸움으로 1명 사망

66년 8월 8일 밤 경남 김해에서는 김해비행학교와 진해해병학교 소속 장병 150여명이 집단 패싸움을 벌여 1명이 죽고 39명이 부상당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있었다.

전날 공군 3명과 해병대 8명의 말다툼으로 시작된 양교의 패싸움은 "공군장교들이 매를 맞는다"는 연락을 받고 공군장교 14명이 현장에 몰려오는 바람에 전면전으로 비화됐다. 공군장교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해병대장교들은 일단 물러섰지만 공군의 '만행'을 전해들은 해병대장교들이 다음날 새벽 김해비행학교에 대거 난입하는 '원정보복전'을 감행했다.

해병대 장교들은 돌팔매로 T-28기 2대를 파손시키는 등 학교시설을 때려부순 뒤 달아났는데, 해병 기초반 소속 이모 소위가 도주 과정에서 개천에 빠져 익사했다. 장교들의 난투극이 큰 이슈로 부상할 조짐이 보이자 양교는 부랴부랴 자매결연식을 맺는 등 파문 수습에 나서지만 결국 공군 14명, 해병대 127명의 장교가 파면되는 등 후유증이 적지 않았다.

이듬해 10월 2일 저녁 강원도 삼척에서는 육군과 전투경찰대 사이에 시비가 벌어져 경관 1명이 죽고 군인 1명이 중상을 입었다. 육군 모부대 소속이었던 김모 중사는 동료 오모 중사가 경관들로부터 폭행당한 데 분격해 권총을 난사해 이모 순경을 죽이고 오 중사도 중상을 입었다.

유신독재와 보도지침 등으로 인해 국민들의 눈과 귀가 막힌 70∼80년대에도 영내외 총기 사건·사고는 거의 매년마다 몇 건씩 발생했다. 영내에서 사상자가 다수 발생하거나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해 언론보도를 피할 수 없었던 사건만 해도 30건이 훨씬 넘는다.

'바짝' 군기 들었던 70~80년대에도 사고 빈발

71년 1월 18일에는 경기도 김포의 해병대 소속 공모 하사가 막사 안의 사병들에게 수류탄을 투척하고 부대 밖까지 뛰쳐나가 인근마을 주민들에게 닥치는 대로 M16 소총을 난사하는 바람에 7명이 사망하고 5명이 다치는 참극이 발생했다.

공 하사가 "까불면 죽인다", "XX들아, 다 나와봐"라고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부리던 15분 동안 겁에 질린 마을주민들은 불을 끈 채 공포에 떨어야 했다. 공 하사는 인근 야산에 숨어 있다가 사건발생 12시간만에 자살했다.

당시 사고원인을 수사한 해병대는 "공 하사가 술을 마신 뒤 갑자기 정신착란을 일으켰다"고 발표했지만, 경찰 내사를 통해 공 하사가 당일 노름으로 돈을 잃고 상관으로부터 기합까지 받은 상태에서 소주 2병을 마시고 취한 상태에서 난동을 부린 것으로 밝혀졌다.

71년 5월에는 육군 하사관들이 이러저러한 앙심을 품고 주변 사람들을 무차별하게 죽이는 참극이 잇달아 발생했다.

그해 5월 9일 경기도 광주에서 셋방을 살던 육군종합행정학교 헌병학부소속 정모 하사는 집주인으로부터 간통 피소를 당하자 집주인의 어린 3남매를 카빈 소총으로 보복 사살했다. 정 하사는 현장에서 도주한 뒤 인근 야산에서 자살했다.

같은 달 22일에는 중대장이 휴가를 보내주지 않는 데 불만을 품은 육군 모 사단 소속 김모 하사가 중대장 하숙집에서 대인 지뢰를 터뜨려 5명이 사망하고 4명이 중상을 당하는 참사가 빚어졌다.

중대장 임모 대위는 "김 하사가 흥분 상태에서 부대를 뛰쳐나갔다"는 연락을 받고 자리를 피해 목숨을 구했지만, 이 사건으로 김 하사 자신과 중대장 부관·연락병, 집주인 등이 폭사했다.

이듬해 1월 28일 해병대 주모 중사가 다방에서 TNT를 터뜨려 2명이 숨지고 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주 중사는 8살 연하의 애인 백모씨와 그녀의 사촌오빠가 "나이 차가 많으니 그만 헤어지자"고 종용하자 홧김에 일을 저질렀다.

74년은 탈영병의 인질 살상극으로 막이 올랐다. 그해 1월 1일 저녁 동대구역 구내 다방에서 육군헌병 조모 하사가 카빈 소총을 난사해 열차를 기다리던 승객 2명을 죽이고 2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22시간30분간의 인질극 끝에 자수한 조 하사는 "부대 상관의 가죽 잠바와 돈을 훔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했다"고 어이없는 범행동기를 밝혔다. 육군군법회의는 "새해 첫날부터 적을 격퇴·분쇄하는데 써야할 총탄을 선량한 국민들에게 돌린 행위는 일벌백계가 마땅하다"며 조 하사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홧김에... 결백 입증하려고... 어이없는 범행동기

74년 4월 30일 육군 모부대 소속 김모 일병이 서울 영등포구 공항동에서 카빈 소총을 난사해 무려 9명의 군인·민간인이 사망했다. 무단외출 등의 이유로 상관에게 몇 차례 구타를 당한 데 앙심을 품고 일을 저지른 김 일병은 군경과 대치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84년 5월 경기도 동두천에서 군인집단난동사건이 일어나 국회에서 쟁점으로 부상하기도 했지만 이듬해 총선에 영향을 줄 것을 의식한 전두환 정권은 강력한 보도통제로 국민들의 알권리를 막았다. 같은 해 6월 26일 강원도 동해안의 육군 모 부대에서 있었던 총기사건도 사상자 규모(12명 사망, 11명 중상)에 비해 국민들에게 실체가 명확히 알려지지 않은 대형 참사였다.

과거의 군 당국은 이같은 군기 사건·사고들이 터질 때마다 ▲철저한 화기 관리 ▲억압적인 군대문화 개선 ▲군 기강 확립 등의 조치를 내놓았다. 사망 6명, 부상 4명 등 총 10명의 사상자를 낸 경기도 연천의 총기·수류탄 사건 이후에도 군 당국은 과거와 똑같은 약속을 되풀이하고 있다.

 

 

 

옛날에도 큰 사고들이 많았었네요. 출처는 오마이뉴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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