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8년 김신조 사건 후 이에 대한 대응으로, 기존의 상설 북파부대인 HID, UDU와는 별개의 보복 목적 북파부대 3개가 새로 창설되는데, 바로 공군의 실미도부대, 해병대의 마니산까치부대(MIU), 그리고 육군의 선갑도부대입니다.
이들 세 부대는 첩보수집 등이 목적이 아니라, 북의 핵심부에 대한 과감한 보복을 크게 한 뒤에 산화하는, 사실상 자살특공대 성격의 부대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대북관계 개선기류에 따라 실제 작전 투입이 계속 미뤄지고 훈련 및 대기상태에만 있다가, 결국 차례로 해체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북파부대들은 항간의 카더라소문과는 달리 대부분 죄수출신들이 아니었는데, 선갑도부대만은 전원이 실제 죄수출신들로 구성되었었다고 합니다. - -
선갑도 부대원 충격증언 “내 손으로 무기수 공작원 목을 졸랐다”
● 1968년 7월5일 안양교도소에서 사라진 무기수 12명
● 2차대전 당시 ‘사형수 부대’ 영화에서 착안
● “상부 지시 따라 공작원 3명 살해했다”
● 사망 3명, ‘북한 침투 후 미귀환’ 처리
● 가짜 사면장 주고 “35년째 복역중(?)”
● 생존자 15명, “부인도 아들도 모른다.”
“백곰 동지! 성공적으로 임무 마치고 돌아오갔습네다!”
인천에서 80km 거리. 일반인에게는 지도에만 존재하는 서해의 절해고도(絶海孤島) 선갑도(仙甲島) 해안의 파도 소리를 찢으면서 한 사내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백사장에서는 계급과 명찰이 없는 군복을 입은 20대 젊은이들이 우렁차게 부르는
‘대한 별동대가(歌)’가 파도소리와 뒤섞이고 있었다.
“우리는 대한 별동대, 조국의 부름 앞에 목숨을 바친다아.”
‘임무’를 위해 떠나는 전우를 환송하는 대원들의 눈빛에는 지옥훈련을 마치고 ‘실전’에 투입된다는 환희와 북한에 대한 적개심이 뒤엉켜 비장함마저 감돌았다. 한국전 휴전 이후 남북간의 군사적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던
1968년 여름이었다.
임성빈. 전우들의 전송을 받으며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선갑도를 떠난 그는 황해도 개성 출신의 월남자였다. 당시 나이 28세.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는 살인 혐의로 15년형을 선고받고 안양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몸이었다.
그는 1968년 1월 북한 김신조 일행의 청와대 기습사건에 대한 보복 공격을 위해 창설된 육군 첩보부대(AIU) 산하 902정보부대 803대, 이른바 ‘선갑도 부대’ 공작원 중 한 명이었다. 자체적으로 부르던 이 부대의 명칭은 ‘대한 별동대’. 임성빈은 창설 당시 12명으로 구성된 공작원 가운데 처음으로 북한 정찰 임무에 나서는 ‘영광’을 부여받은 것이다.
그렇게 임성빈이 ‘임무’를 위해 선갑도를 떠난 지 35년. 그 날 이후로 지금까지 그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북한에 침투해 정찰 임무를 마쳤으나 미처 돌아오지 못했다는 소문에서부터 적에게 투항했다거나 아무도 모르게 바닷속에 수장(水葬)시켰다는 이야기 등등 흉흉한 소문만이 선갑도 주변을 음습하게 떠돌 뿐이었다.
‘북한 간다’며 사라져
그 후로도 비슷한 일은 계속됐다.
선갑도 부대 창설 당시 공작원 12명 중 한 명, 두 명씩 자취를 감추는 일이 잇따랐던 것이다.
1969년 여름 무렵 사라져버린 공작원의 이름은 박두상이다. 당시 25세. 박두상은 군 복무 당시 상관 상해치사 혐의로 무기형을 선고받고 안양교도소에서 복역중이었다.
1970년 봄에는 강도 살인 혐의로 무기형을 선고받았던 최일남이 섬에서 사라졌다. 최일남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북파 임무가 부여되지 않자, 혹독한 훈련을 시킨 기간요원들에 대해 앙심을 품고 도끼를 든 채 교육팀장을 향해 달려들었다가 얼마 뒤 섬에서 자취를 감췄다.
이들 2명 역시 임성빈 등 다른 10명의 안양교도소 출신 무기수, 장기수들과 함께 선갑도에 투입된 ‘별동대원’들이었다. 안양교도소 전과신분증 보존 문서와 출소신분장 보존부에는 이들 12명이 ‘형집행정지’로 출소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선갑도 공작원으로 활동하다가 70년대 초 부대가 해체된 후사회로 되돌아온 사람들 중에도 이들의 소재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동료 대원들이나 이들을 훈련시킨 기간요원들이나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과연 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의문은 35년 만에 풀렸다.
‘신동아’는 이들이 선갑도에서 사라진 뒤 당시 육군 첩보부대가 운영하던 인천 시내의 한 안가(安家)에서 첩보부대원들에 의해 목졸려 숨진 사실을 확인했다.
당시 이들을 교살(絞殺)하는 데 참여한 첩보부대원은 모두 4명. 이들 중 한 명인 김창환씨(가명)는 최근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선갑도에 감금된 상태에서 장기간 훈련이 계속되자 공작원들 사이에 불안감이 고조되기 시작했고 하극상 사건이 발생하는 등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곧 부대장 지시가 떨어졌고 그에 따라 주모자급 한 명을 전화선으로 목졸라 질식사시켰다”고 증언했다. 1969년 여름의 일이었다.
전화선으로 목졸라 살해한 뒤 화장
애초 이 공작원들은 아무도 모르게 선갑도를 빠져나와 인천시 주안에 위치한 첩보부대 안가에 감금되었다.
이 안가는 당시 나포 간첩을 수용할 목적으로 내부에 쇠창살이 달린 영창을 운영하고 있던 곳. 영창에 감금된 공작원에게는 하루 한 덩이의 주먹밥만이 제공됐다.
그렇게 한 달쯤 지나자 감금된 공작원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기진맥진 상태가 돼버리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상부로부터 쥐도새도 모르게 그를 ‘처리’하라는 지시가 하달됐다. 비밀 임무를 맡게 된 4명의 부대원들은 ‘처리’ 방법을 논의한 끝에 우선 전신 마취 유도제인 펜토탈(Pentothal)을 사용하기로 했다. 펜토탈을 주사기로 혈관에 찔러넣자 이내 공작원은 무기력하게 널브러지고 말았다.
1시간쯤 지나 시신을 처리하러 영창으로 들어서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공작원이 쇠창살을 붙잡고 일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겁에 질린 부대원들 중 누군가가 순간적으로 권총을 꺼내 들었다.
“안 돼!”
그러나 이내 동료들이 그의 권총을 나꿔챘다. 아무리 안가라고는 하지만 주변에 총소리가 새어나갈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그 때 동료 중 한 명이 바깥으로 나가더니 가느다란 전화선을 구해왔다. 가장 손쉽고 빠른 방법을 선택한 것이었다. 김씨는 “이렇게 ‘처리된’ 공작원들의 유해를 당시 주안 신기촌(현 남구 주안8동)의 화장터에서 화장시켜 인근 야산에 뿌렸다”고 밝혔다. 김씨의 증언이다.
“목이 졸린 공작원이 질식사한 것을 확인한 후 곧바로 관에 넣어 사전에 만들어놓은 사망진단서를 들고 화장터로 직행했습니다. 그러나 화장터 관계자는 ‘사망 시각으로부터 24시간이 지나야 화장할 수 있다’는 자체 규정을 내세워 난색을 표했어요. 곧바로 권총을 빼들고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고 나서야 화장시킬 수 있었죠. 그 때만 해도 시신이 되살아날까봐 부들부들 떨고 있었으니까요…”
이 사건이 있은 지 한 달 후쯤, 이들은 또다른 선갑도 공작원 한 명을 같은 안가에서 교수형에 처했다. 유해는 마찬가지 방식으로 화장했다. 김씨는 “당시 이 같은 방식으로 모두 3명의 선갑도 공작원을 ‘처리’했다”고 밝혔다.
남은 문제는 ‘단순 실종’ 또는 ‘북한 침투’ 등으로만 알려진 이들 공작원의 신원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것이었다. 교도소에서 장기수로 복역중이던 수인(囚人)들이었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가족이 나타나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렸다.
선갑도 부대가 본래 북한 지역 침투를 목적으로 창설된 부대인 만큼 그냥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만 처리하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앞서 임성빈에게 ‘임무 수행을 위해 떠난다’고만 알려준 뒤 본인은 물론 동료 공작원들도 모르게 ‘처리’해버린 것에 미루어 보더라도 당시 부대 고위층이 사전 시나리오 아래 이들의 살해 계획에 가담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아직까지 주안의 첩보부대 안가에서 살해된 3명이 1968~70년에 섬에서 사라진 임성빈, 박두상, 최일남씨라고 공식 확인된 것은 아니다. 증언자 김씨가, 살해당한 선갑도 공작원 3명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일을 처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섬에서 사라진 이들 3명과 시차를 두고 인천에서 살해된 3명은 동일 인물일 개연성이 크다는 게 당시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사라진 3명과 살해된 3명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임무를 수행해보지도 못하고 비참한 죽임을 당한
이들 모두가 일단 ‘임무 수행 후 미귀환’ 형식으로 처리되었다는 사실이다.
선갑도 부대에 참여했던 또다른 관계자 역시 “당시 ‘사상 불순’이나 ‘훈련 불참’ 등의 사유로 처형된 공작원들은 지금도 군 공식기록에는 북한에 파견됐다가 미귀환한 것으로 되어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35년 전 선갑도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일부 공작원 출신들 사이에서만 은밀한 암호처럼 입에서 입으로 오가던 선갑도 부대의 실체에 접근해 보자.
선갑도 부대는 영화 ‘실미도’를 통해 널리 알려진 공군 2325부대 209파견대(일명 실미도 부대)와 동일한 목적 아래 창설됐다. 북한 지역의 후방 침투 및 보복 테러, 그리고 주요 시설물 폭파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특수부대로 정식 명칭은 육군 첩보부대(AIU) 산하 902 정보부대 803대이다. ‘또 하나의’ 실미도 부대, 아니 실미도 부대를 능가하는 ‘원조’ 북파 공작부대가 서해 외딴섬에 아무도 모르게 존재했던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공작과를 모태로 하는 육군 첩보부대(HID : 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는 1961년 AIU(Army Intelligence Unit)로 명칭을 바꾼다. 당시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중앙정보부는 김신조 일행이 일으킨 1·21사태 이후 보복공격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이미 알려진 공군의 실미도 부대 이외에도 AIU가 관리하는 선갑도 부대, 해군 첩보부대 산하의 폭파부대인 UDU (Underwater Demolition Unit) 등을 운영해 왔다. 비슷한 시기에 육해공 3군(軍)에 각각 북파공작 부대를 창설해 상호 경쟁을 유도했다는 것이다.
이 중 선갑도 부대는 당시 안양교도소에서 복역중이던 무기수와 장기수 등 기결수들로 창설된, 이른바 수인(囚人) 부대였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올 경우 사면한다는 조건이었다. 영화 ‘실미도’의 영향으로 공군 실미도 부대가 사형수나 기결수를 대상으로 공작원을 모집한 것처럼 잘못 알려졌지만 현재까지 밝혀진 실미도 공작원 명단 중 교도소 출신은 한 명도 없다(‘신동아’ 2004년 4월호 ‘군 수사기록 통해 확인한 실미도 공작원 31명 명단’ 참조). 선갑도 803대만이 첩보부대 사상 유일하게 복역중 기결수들로 구성된 부대인 것이다 .
공군은 실미도, 육군은 선갑도
당초 공군 첩보부대의 북파공작대가 실미도에 자리잡은 것과 비교해 볼때, AIU 산하의 북파공작대가 선갑도에 자리잡은 것은 육지로부터의 거리, 백령도 등 북파 전진기지와의 거리 등을 두루 감안한 조치로 보인다. 선갑도는 인천으로부터 배로 약 3시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인천공항과 맞붙어 있는 무의도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실미도에 비해 보안 유지가 훨씬 쉬운 절해고도(絶海孤島)에 만들어진 부대인 셈이다.
이 섬에는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미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처 8240부대가 주둔한 적이 있다. 따라서 1968년 1·21 사태 이후 급조한 부대를 들여보내기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게다가 서해 도서지역에서는 보기 드물게 험한 지형이 사방을 감싸고 있어 첩보부대 자리로 더할 나위없이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선갑도 부대 창설 당시 섬에 상륙했던 초기 요원들은 짐을 풀어놓자마자 ‘담배 꽁초를 모두 주워 모으라’는 지시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담배 꽁초를 뿌려두면 뱀이 접근하지 못한다는 속설에 따라 막사 주변에 뿌려두기 위해서였다. 그만큼 선갑도 주변에는 뱀이 많았다.
미군 첩보부대가 선갑도에 주둔할 당시에도 미군 한 명이 막사 주변을 기어다니던 구렁이를 권총으로 쏘아 죽인 다음날 지휘관이 다른 뱀에 물려 죽은 사건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미군 첩보부대가 선갑도를 떠난 것도 이 때문이라는 이야기까지 곁들여져 선갑도는 어느새 ‘저주받은 섬’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68년 여름, 이 ‘저주의 섬’에 상륙한 기결수는
모두 12명. 안양교도소에서 1968년 7월5일 동시에 사라진 무기수들이었다. 평균 나이는 26~ 27세. 실미도 부대원들이 대부분 20대 초반이던 것에 비하면 꽤 많은 나이였다. 또 실미도 부대원들이 전국 각지에서 첩보부대 물색조에 의해 포섭된 데 비해 선갑도 부대원들은 안양교도소에서 한꺼번에 자원(自願) 형식으로 모집했다는 것이 당시 부대 창설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던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물론 말썽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가족이나 연고자가 없는 사람 위주로 선발했다.
당시 이들과 함께 훈련을 받았던 예비역 장교 및 하사관들은 12명 중 가장 먼저 임무 수행을 나갔다가 실종된 임성빈만이 15년형을 받았을 뿐 나머지 11명의 대원은 무기수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12명 전원이 군 복무중 살인, 상관 상해치사 등의 범죄를 저질러 군사재판을 통해 형이 확정된 뒤 안양교도소에 복역중인 기결수들이었다. 그 중에는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현지에서 각종 사건을 저질러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도 있었다.
선갑도 부대원들이 교도소에서 한꺼번에 모집된 데 비해 이들에 대한 교육훈련을 담당할 기간요원, 즉 장교와 하사관들은 철저히 차출된 요원으로 구성됐다. 현지 교육대장은 소령급으로, 대원들과 함께 북파될 팀장급 요원들은 신임 소위들로 진용이 짜여졌다. 다음은 선갑도 부대 창설 요원으로 섬에 투입된 한 관계자의 증언이다.
“보병학교 교육이 끝난 뒤 기초 공작교육을 이수하고 청계산 근처의 모 부대에서 대기하던 중이었습니다. 부대에서 북한의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 뒷산까지 밀고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리고 얼마 후, 나를 포함한 2명은 ‘남산’으로 옮겨졌습니다.”
여기서 ‘남산’이란 정보사령부 901정보부대를 말하고 ‘청계산 근처의 모 부대’란 경기도 판교 톨게이트 근처에 있는 정보사령부 교육단을 지칭하는 것이다. 교육단은 809 정보부대라고도 불렸지만 흔히 ‘목장’이라는 은어로 알려져 있다. 이 교육단은 공작원들이 당시 육군 첩보부대 산하 전국 각 예하 부대로 파견되기 직전 교육훈련을 받던 곳이다.
당시 공작원들은 선발되면 ‘목장’에 앞서 먼저 영등포구 양평동 해태제과 자리에 있던 첩보부대에 입소했다. 이 부대는 입구에 ‘동북산업사’라는 간판을 달고 있었는데, 1968년 당시 실미도 부대원들을 모집해간 물색조가 ‘동북산업사’소속이었다는 증언이 최근 나온 바 있다. 중앙정보부에서 운영하던 분실 정도로 추정되는 이 곳에서 일부 공작원들은 기초 군사교육에 해당하는 4주 정도의 훈련을 받고 ‘목장’ 또는 기타 교육부대로 이관됐다고 당시 관계자들은 밝히고 있다.
스카라극장의 ‘특공대작전’
물
론 북파 임무 수행을 위한 작전을 코앞에 두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임무 수행 장소나 목표는 본인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남산’에 대기하면서 국내 주요 기간시설물 등을 대상으로 하는 가상 침투훈련만 계속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죠. 느닷없이 나를 데리고 있던 또 한 명의 팀장이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하더군요. 그는 나를 남산 근처의 스카라극장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당시 상영하고 있던 영화는 리 마빈이 주연하고 찰스 브론슨이 함께 출연한 ‘특공대작전’이었습니다.”
영화를 보고 돌아온 다음날 아침 그는 ‘인천’으로 발령났다는 통보를 받게 된다. 스카라극장에서 본 영화 한 편은 ‘인천’발령을 위한 마지막 시청각 교육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특공대작전’이라는 영화는 도대체 어떤 내용이고 ‘인천’은 또 뭐길래 현지 발령을 코앞에 둔 첩보부대원에게 이 영화를 보여준 것일까.
영화의 배경은 연합군과 독일 나치가 치열한 접전을 벌이던 2차대전 당시. 미 육군 당국은 군형무소에서 사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는 12명의 흉악범을 석방하고, 이들에게 나치에 대항하는 위험한 임무를 맡도록 고도의 살인 훈련을 시킨다. 살인특공대의 대장이 바로 리 마빈이다. 임무를 완수하면 석방될 수도 있다는 정부의 약속을 믿고 12명의 성난 사형수는 목숨을 걸고 나치와 처절한 전투를 벌인다. 영화 ‘특공대작전’의 영어 원제목은 12명의 사형수를 뜻하는 ‘The Dirty Dozen’이다.
말하자면 선갑도 부대원으로 발령낼 현역 기간요원에게 무기수 위주로 구성된 선갑도 부대의 모델이 된 영화를 미리 보여줌으로써 앞으로 맡게 될 임무를 암시한 것이다. 이 관계자가 ‘인천’ 발령 다음날 새벽 선갑도로 들어가 마주한 대원의 수는 영화속 사형수 수와 같은 12명(Dozen)이었다.
이들 대원 중 일부는 교도소로 되돌아갔다.
“12명 모두 몸이 불편해 보였어요. 하지만 눈빛부터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처음 섬에 들어오면서 동료들과 ‘이제 우리는 죽는 것 아니냐’고 은밀한 대화를 나눴던 것이 떠오르더군요. ‘올 것이 왔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이들 12명의 대원은 어떤 경로를 통해 선갑도에 들어오게 되었을까.
의문을 푸는 열쇠는 당사자들의 증언을 듣는 일이다.
창설 당시 12명의 대원 중 현재 5명이 생존해 있다. 훈련중 살해된 사람이 3명, 그리고 부대 해체 후 실종되거나 연락이 끊긴 사람이 2명이다. 또 다른 2명은 교통사고와 질병 등으로 인해 최근 사망했다. 1969년 이후 섬에 들어온 ‘2기생’들까지 합치면 생존자 수는 더욱 늘어난다. 지금도 선갑도 대원 출신 15명이 정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선갑도 생존자들의 경우 죽은 자 못지않은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실정이다. 우선 자녀들은 물론 부인에게조차 ‘섬 생활’을 제대로 알리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다.
‘무기수’라는 원죄
몇 해 전 북파공작원들이 광화문 네거리에서 ‘가스통 시위’를 벌이면서 자신들의 ‘과거’에 대해 피를 토할 때 선갑도 대원들도 현장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찌보면 ‘가스통 시위’를 주도한 설악단 대원들에 비해 고생한 것으로 따지자면 할 말이 더욱 많은 사람들이 선갑도 대원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신문이나 방송에 나와 큰소리를 낼 수도 불만을 토할 수도 없었다. 단순히 보안을 지켜야 한다는 철칙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기수 출신’이라는 ‘원죄’가 늘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대부분 환갑을 넘긴 노인들인데 과거를 드러내서 뭘 하겠다는 겁니까? 자식들도 내 과거를 모르고 동네에서도 내 과거를 몰라요. 아이들을 결혼시킨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돈댁에서 내 과거를 알아보세요. 그걸 누가 책임질 겁니까?”
선갑도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김광태(가명)씨는 기자가 취재를 요청하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했다. 선갑도 출신들은 이처럼 장교나 하사관, 또는 교도소에서 느닷없이 붙들려온 대원을 막론하고 하나같이 자신들의 존재가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꺼렸다. 최근 국회에서 북파공작원 보상법이 마련돼 당시 북한 지역 침투공작에 투입됐던 자신들에 대한 보상의 길이 열렸음에도 ‘보상금에는 관심 없다’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어차피 교도소에서 평생 그러고 있다 죽을 거라면 이북에라도 갔다가 죽으면 죽고, 살면 제대로 살아보자고 생각했죠.”
강귀남(가명)씨 역시 예순이 넘은 지금까지도 자신이 무기수 출신으로 교도소에 복역중 선갑도 부대에 근무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있다. 기자는 그를 통해 어렴풋하게나마 부대원 모집 과정을 들을 수 있었다. 이들이 안양교도소에서 당시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추정되는 한 남자를 따라 인천행 차에 오른 것은 1968년 7월5일이다.
“한 날 한 시에 교도소에서 나왔다고는 하지만 누가 누군지 서로 알지 못했어요. 철저하게 개인 면담을 통해서 대원들을 선발했으니까요. 그날 밤 9시쯤 안양교도소에서 눈을 가리다시피 한 채 차에 올랐죠. 한 1~2시간 가량 달린 것으로 생각돼요. 내려보니 인천부두였습니다. 시간은 자정을 조금 지났던 것 같고…. 곧바로 배로 갈아타고 몇 시간을 더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출렁거리는 배 안에서 불안한 잠을 청한 뒤 동틀 무렵 깨어보니 어느 섬이었습니다.”
그러나 부대 자체가 완벽한 보안 속에 창설되었기에 부대 내 누구도 이 곳에서 만난 ‘섬 사람들’에 대해 자세히 알려고 하지 않았다. 부대장부터 말단 공작원까지 ‘섬 사람들’은 일절 이름을 부르지 못하도록 교육받았다. 대신 이들은 계급과 신분별로 부여된 암호로 서로를 부를 수 있을 뿐이었다. 대장은 독수리, 팀장은 백곰과 흑곰, 그리고 ‘키퍼(keeper)’라고 불린 조교, 즉 공작 하사관들은 부엉이나 사자, 호랑이 등으로 부르는 식이었다. 교도소에서 모집된 무기수들에게도 암호명이 주어졌다. 공작원들에게는 ‘길주’ ‘박천’ ‘남포’ ‘철원’ 같은, 북한의 지명을 딴 암호명이 부여됐다.
‘독수리’ 대장과 ‘부엉이’ 조교
외딴 섬에서 5년간이나 함께 생활했지만 이들은 지금도 자신과 같은 팀에 소속됐던 대원이 아니면 동료의 이름이나 얼굴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상호 차단의 원칙’에 따라 훈련도 따로 받고 식사도 따로 하는 것이 일상화되었기 때문이다. 백곰팀 6명의 대원과 흑곰팀 6명의 대원도 각각 섬의 남쪽과 북쪽 끝에 분리 수용되어 있었다.
적진에 침투한 뒤 언제든지 생포될 가능성을 안고 있는 침투공작 부대원들에게는 소속부대와 관련한 정보를 최소한만 알려주는 것은 상식이다. 공작원이 생포될 경우 노출될 수 있는 아군측 정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공작원 수칙이 부대원들에게 체질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부대 편성 초기에는 공작원들에게 현역 신분에 해당하는 계급을 부여했었다. 주로 상사에서 하사에 해당하는 하사관 계급을 부여했다. 그러나 이내 문제가 발생했다. 훈련 성적이나 태도 등을 기준으로 부여한 계급이 교도소 시절의 복역 경력과 ‘충돌’을 일으키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교도소 신참이 상사가 되고 재소자 시절 고참이 중사가 되는 ‘역전 현상’이 일어난 것. 군인 신분이 아닌 무기수 출신 공작원들이 이런 식으로 통제될 리 없었다. 이 시도는 이내 실패하고 말았다.
정예 침투공작 요원을 양성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선갑도 부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계급이 아니었다. 북한 지역의 심장부에 혼자 떨어졌을 때도 주요 시설 폭파 등의 임무를 수행하고 무사히 귀환할 수 있는 강철 같은 체력과 인내심, 그리고 담력이었다. 따라서 부대의 모토는 첫째도 훈련, 둘째도 훈련이었다.
훈련은 낮과 밤을 바꿔가며 진행됐다. 밤새 훈련을 하고 동이 트기 시작하면 개인 비트(은신처)에서 잠을 자는 식이었다. 본격적인 침투 훈련은 칠흑같은 어둠이 섬 전체를 감싸는 밤 9시경에 시작됐다. 새벽 2시까지 진행되는 침투 훈련이 끝나면 쉬지 않고 2~3시간 동안 개인 비트를 파야 한다. 그러다가 해안선을 따라 동이 터올 무렵이면 비트 안에서 잠을 청하는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북한 지역에서 혼자 고립되었을 경우 비트를 파고 거기서 생존해야 하기 때문에, 예상되는 극한 상황에 대비한 체력훈련은 필수였다. 30kg짜리 모래배낭을 메고 양쪽 발목에는 5kg의 모래주머니를 매단 채 섬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산악구보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기초훈련에 해당했다. 선갑도 부대의 주임무는 북한 지역의 댐이나 발전소 등 기간시설 폭파였다. 때문에 주요 시설물 폭파에 필요한 폭약을 얼마나 많이 둘러멜 수 있는가도 공작원의 능력을 재는 중요한 척도였다.
밤에는 훈련, 낮에는 취침
“대형 자석을 붙인 배낭에 컴포지션 폭약을 잔뜩 넣고 은밀하게 대형 발전소에 침투해 주요 수로관에 배낭을 부착한 뒤 빠져나오는 거예요. 원격조종을 통해 배낭을 폭파시켜 발전소를 파괴하는 것이 당시 임무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물론 이들에게는 한 번도 실제 임무가 하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목표물이 무엇인지 확인할 길은 없다. 그러나 이들은 지휘관과의 대화 속에서 수풍댐이나 함흥발전소 같은 주요 시설물을 폭파해야 한다는 암시를 받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실제 여러 차례 강원도 지역에 있는 수력발전소를 답사한 적도 있었다.
“실미도 부대처럼 구타가 많았었냐구요? 구타가 무슨 필요가 있어요? 말 안 들으면 바로 코앞에서 총부리가 춤을 추는데요.”
영화 ‘실미도’를 봤다는 한 대원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기간요원으로 참여했던 다른 관계자 역시 “그들은 맞는 데는 이골이 난 사람들”이라는 말로 당시 훈련 분위기를 넌지시 비쳤다.
이들이 이렇게 다른 북파부대에 비해 훨씬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대북 침투요원으로 양성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50~60년대 내내 계속된 대북 침투 형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비무장지대를 통과해 휴전선 인접 지역의 목표물을 폭파하거나 사진 촬영한 후 돌아오는 형태, 즉 전선침투와, 비행기나 기구 등을 이용해 공중으로 북한지역에 침투한 뒤 대형 발전소 같은 목표물을 폭파하는 형태, 즉 고공침투 방식이 그것이다.
따라서 전선침투에 투입될 공작원들은 비무장 지대에 설치돼 있는 다양한 장애물을 통과하는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는다. 비무장 지대 안에는 사람이 지나간 조그만 흔적이라도 언제든지 발견할 수 있도록 철조망 뿐만 아니라 모래 장애물, 실 장애물 같은 다양한 형태의 장애물이 설치돼 있다. 이렇게 다양한 장애물을 흔적도 없이 통과하는 것이 전선침투 공작원들의 중요 임무 중 하나다.
그러나 실미도나 선갑도 부대처럼 공중침투를 목표로 하는 공작원들은 팀 단위로 움직이는 전선침투 공작원들에 비해 숫자가 적은 3~4명이 조를 짜서 움직이거나 개인별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들은 장애물 통과 요령과 함께 공중 낙하와 같은 공수훈련도 집중적으로 받아야 한다. 선갑도 부대원들도 부대 창설 후 1년쯤 지난 1969년 여름 경기도 김포의 한 공수부대에서 공수훈련을 받았다. 당시 훈련에 참여했던 한 대원은 “공수부대 출신이 아니었지만 12명이 낙하산을 메고 일렬로 떨어지고 나면 점프 경력이 50회나 되는 공수부대원보다도 잘한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말했다.
반면 부대 임무나 침투 목표도 자세히 모르는 상태에서 훈련에만 열중하다가 공수 훈련이 시작되자 일부에서 동요하는 분위기가 생겨났다는 증언도 있다.
“어딘지도 모르고 실려간 곳이 바로 김포 공수여단이었습니다. 순간적으로 ‘아차!’하는 생각이 뒤통수를 때렸죠. 내 임무가 고공침투를 통해 후방에 ‘뿌려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살아 돌아올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 후 이들 주변에는 늘 죽음의 그림자가 쫓아다녔다. 당시 훈련에 참여했던 관계자들 중에는 지금까지도 ‘누가 날 죽이러 오지 않을까’ 하는 공포를 떨치지 못해 호소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한다.
공수 훈련이 끝난 뒤 대원들은 팀을 나눠 덕유산 지역으로 투입됐다. 덕유산을 선택한 것은 산세나 지형이 북한 지역과 유사해 실제와 같은 침투 및 폭파 훈련을 하기에 적당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백곰팀’과 ‘흑곰팀’으로 명명된 침투조는 각각 장교 1명, 하사관 2명, 대원 6명으로 구성됐다. 실미도 부대와 달리 선갑도에서는 장교와 하사관, 대원으로 구성된 팀 전체가 함께 침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기간요원과 무기수 출신의 대원들 모두가 똑같은 공작원이었던 셈이다.
김포비행장에서 출발한 대원들은 덕유산 곳곳에 공중 낙하해 가상 목표물을 찾아낸 뒤 폭약을 설치하는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훈련이 끝나면 비트를 파고 은신하면서 오직 디데이(D-day)만을 기다리는 ‘비상대기’ 상황이 계속된 것이다.
“침투 명령을 내려달라”
그러나 금방이라도 실전에 투입될 것 처럼 급박하던 분위기는 하루이틀 비슷한 훈련이 반복되면서 묘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작전 지시가 내려지지 않은 상태로 계속 시간이 흐르면서 일부 대원들에게 철수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두 팀 중 한 팀만 우선 침투한다는 지시가 하달됐다. 12명의 대원은 6명으로 줄었다. 지휘는 백곰이 맡기로 했다. 저주의 섬 선갑도로 되돌아가게 된 6명은 반발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역시 오래가지는 않았다. 작전 지시만을 애타게 기다리던 나머지 6명의 대원도 결국 인천으로 되돌아가라는 지시를 받게 된다. 1969년 가을 무렵의 일이었다.
당시 훈련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는 “덕유산 훈련을 전후해서 1968년 김신조 사건과 유사한 사건이 한 건이라도 발생했더라면 우리는 보복 공격을 위해 즉각 투입됐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문제는 덕유산에서 철수한 이후에 발생했다. 실미도가 그랬던 것처럼 ‘침투’를 위해 모인 대원들에게 ‘침투’가 불가능해지자 부대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당시 지휘계통에 있던 한 관계자는 섬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야산에 올라가 대원들끼리 쑥덕대는 일이 늘어났죠. 하사관이 장교에게 흉기를 들고 대드는 일도 발생했고…. 일부 대원들은 ‘6개월만 고생하면 집에 보내준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나 몰라라 하느냐’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습니다.”
어떤 대원은 죽음을 각오하고 무작정 바다로 뛰어들었다가 기간요원들에게 붙잡혀 들어오기도 했다. 섬 생활을 못 견딘 대원 한 명이 스스로 목을 매 자살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불길한 기운이 섬 전체를 감싸기 시작한 것이다.
일부 대원들이 섬으로 돌아가고 일부가 인천 시내 야산 지역에 있는 한 안가(安家)에 대기하고 있던 1969년 가을에는 유독 대민(對民)사고도 잦았다.
한번은 인천에 주둔하던 해병대 헌병대와 선갑도 요원간 집단 난투극이 벌어진 일도 있었다. 기간요원 두 사람이 다방에서 차를 마시다가 우연히 옆 좌석 손님들과 시비가 붙었다고 한다. 말다툼 끝에 주먹질이 오갔고 상대방은 인천에 주둔하던 해병대 안으로 도망갔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선갑도 요원들은 해병대측에 이들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고, 이를 거절하는 해병대측과 실랑이가 붙게 된 것이다.
잇따른 자살 시도
결국 이들은 자고 있던 대원들을 모두 깨워 군용트럭에 싣고 해병대 헌병대를 습격하는 ‘사건’을 저지르게 된다. 한 관계자는 “동원할 수 있는 공구란 공구는 모두 동원해서 해병대 헌병대를 박살내버렸다”고 회고했다.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대원 중 한 사람도 “우리는 당시 누구와 시비가 붙더라도 지고 들어오면 무조건 작살나는 걸로만 알았다”고 말했다. 이유를 불문하고 민간인 또는 다른 부대와 시비가 붙으면 대원들을 모두 끌고 나가서라도 ‘보복’을 하고 마는 것은 선갑도 대원의 자존심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육군 소속의 선갑도 부대가 해병대 소속의 헌병대와 난투극을 벌였으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부대원들이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당시 부대장이 해병대 고위 관계자를 찾아가 백배사죄한 끝에 겨우 사태가 수습되었다는 것이다. 선갑도 부대원들로서는 중징계 사유에 해당하는 ‘대형사고’를 저지른 셈이었다.
이 사건 이후 분위기가 크게 가라앉을 줄로만 알았던 섬에는 뜻밖에도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임무 수행이 지연되면서 대원들이 제대로 통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술렁이던 섬의 분위기가 갑자기 차분해지고 활력에 넘쳤던 것이다. 한 기간요원은 이 사건을 두고 “매일같이 맞고만 살아온 대원들이 누군가를 원없이 패고난 뒤에 느끼는 쾌감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부대 존속이냐, 해체냐, 아니면 임무 변경이냐. 부대 운명과 관련해 어떠한 결정도 내려지지 않은 채 시간만 흘러갔다.
외딴 섬에서 대원들의 생활은 교도소 생활과는 사뭇 달랐다. 게다가 각종 훈련에 나서면서 사회와 접촉하는 일도 잦아졌다. 장기 복역중이던 기결수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대원들에게 마냥 폐쇄적인 생활을 강요할 수만은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됐다.
무엇보다도 대원들의 성적(性的) 욕구를 해결해주는 것이 급선무였다. 따라서 대원들은 기간요원들의 입회하에 인천에서 가장 유명한 유흥가인 ‘Y하우스’를 찾는 형식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이런 욕구를 해결하곤 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상부로부터 한 업소에 미리 얘기를 해놓았으니 대원들의 회포를 풀어주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늘 함께 훈련받고 뒹굴던 탓에 대원들과 가장 친숙했던 교관요원 중 한 명이 직속상관에게 ‘2시간 이상을 달라’고 요청해 약속까지 받았다. 어찌 보면 당시 불만이 최고조에 달했던 대원들에 대한 일종의 배려였다.
그러나 상부의 약속이 거짓말이었음이 드러나는 데는 불과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 방 저 방에서 욕지거리를 해대는 여자들의 비명소리와 이에 맞서는 대원들의 거친 고함소리가 터져나온 것이다.
“야, ××놈아. 돈 500원 내고 도대체 얼마나 귀찮게 구는 거야?”
“뭐? 어디다 대고 욕지거리야? 너 오늘 맛 좀 봐라. 이 ××년.”
그러자 다른 방에서는 핏발선 대원들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뭐야, 이거? 2시간이라더니?”
“다 나와! 어떤 놈이야. 우릴 우롱한 게?”
공작원 신세와 ‘몸 파는’ 신세
사태는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보안을 생명으로 하는 북파공작 부대가 엉뚱한 일로 인해 존재를 노출하게 될 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장교 한 명이 권총을 발사한 뒤에야 겨우 욕설과 함성은 잦아들었다.
그러나 대략 자초지종을 듣고 난 여성들은 그 기막힌 사연에 훌쩍훌쩍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밤. 여기저기서 몰려든 남정네들의 욕정이 할퀴고 간 그 자리에는 난데없는 술판이 벌어졌다.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공작원들의 신세를 들은 여자들이 오히려 술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여자들의 눈에는 한치앞을 내다볼 수 없는 공작원들의 불안한 하루하루가 매일같이 몸을 팔아 연명하는 자신들의 신세보다 하나도 나아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날 술자리는 새벽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지루한 시간이 흐르면서 이렇게 선갑도 사람들 사이에서는 묘한 우정과 동료애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당시 현
역 장교 신분으로 섬에 근무했던 한 예비역 중령은 선갑도 부대가 실미도 부대와 달랐던 점은 장교 또는 하사관과 대원들 사이가 ‘교육자-피교육자’처럼 관리하고 감시하는 관계가 아니라 북한 침투라는 동일한 목적 아래 훈련받는 동료이자 공동운명체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1970년을 지나 후반으로 가면서부터는 보급 지원 등이 형편없었어요. 그런데 제가 중간에 섬을 나오게 됐죠. 그때 함께 생활했던 대원들이 ‘줄 것은 이것밖에 없다’면서 ‘건강하라’는 말과 함께 사제 팬티 12장을 종이에 싸서 주는 거예요. 먼저 떠나는 사람을 위해 대원들이 자기가 받았던 팬티 한 장씩을 내놓은 거죠. 그 마음이 지금도 제 가슴속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그러나 임무를 상실한 부대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이었다. 육지에서 새로 부임해 들어온 부대장의 재임기간도 점점 짧아지기 시작했다. 이미 정치적 상황 변화로 인해 용도 폐기 상태에 놓인 부대를 계속 운영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던 것이다.
애물단지로 전락한 부대를 해체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전 대원이 교도소 출신의 기결수들로 구성된 부대를 어떤 방식으로 해체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정해진 바가 없었다.
실미도 사태 직후 해체
당시 선갑도 부대의 본대격인 인천 902정보부대에 근무했던 한 관계자는 “부대 내에서도 선갑도 부대를 해체하는 데 따른 불만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오기 시작했다. 이들을 모두 내보내면 보안 누설 등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할지 모른다는 우려도 제기됐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당시 상부에서는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도 성공적으로 끝났고 국가 성장도 안정궤도에 접어든 만큼 북한 침투부대를 더 존속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논리를 내세워 내부의 반발 기류를 잠재웠다고 한다.
그러나 직접 선갑도에 근무했던 관계자들의 증언은 조금 다르다. 당시 지휘계통에 있던 한 관계자는 ‘나중에 당시 부대장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대 창설 초기만 해도 북한 지역 후방 침투는 미군측의 항공 지원 아래 이뤄질 것이라는 게 정설이었습니다. 그런데 곧 침투 임무가 부여될 것 같은 상황이 몇 달째 계속되는 데도 실제 명령이 하달되지 않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부대장도 ‘이상하다, 오더가 떨어지지 않는다’고 걱정했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까 부대 고위층에서는 이미 미군측과 협의를 해왔다더군요. 한때 헬리콥터를 이용해 침투한다는 구체적인 시나리오까지 나돌았지만 결국 마지막 순간에 미군측에서 침투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결정적으로 선갑도 부대의 운명을 재촉한 것은 다름아닌 ‘실미도 사태’였다.
1971년 8월23일 실미도 북파공작원들이 기간요원들을 사살하고 버스를 탈취해 서울시내로 진입하다 자폭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군 수뇌부에서는 비슷한 북파공작 부대에 대한 긴급 점검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실미도 사태가 터진 뒤 한 달쯤 지나 선갑도에도 장성급을 단장으로 하는 조사단이 들이닥쳤다.
이들이 섬에 다녀간 직후인 10월1일, 전격적으로 공작원 4명이 선갑도를 떠나 육지로 되돌아간다. 비로소 본격적인 부대 해체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고조되던 선갑도 대원들의 불만과 험악한 분위기도 이 날 이후로 눈녹듯이 풀어졌다.
이듬해에는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다.
남북간 무력도발을 중지하기로 한 공동성명의 정신에 따라 부대 해체 작업은 속도를 더했다.
그렇다면 선갑도를 떠난 무기수 출신의 공작원들은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국가의 약속을 믿고 5년 동안 선갑도에 모든 것을 바친 대원들을 교도소로 돌려보낼 경우 이들이 어떤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또 사회로 내보낼 경우 합법적인 사면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당초부터 초법적(超法的)인 모집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부대를 상대로 이런 조치를 취한다는 것은 난센스였다.
그러나 국가는 당초 이들과 한 약속을 지키는 쪽을 택했다. 영화 ‘실미도’에 나오는 사살 명령 같은 것은 더더욱 없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실미도 사태 이후 당황한 중앙정보부와 군 당국이 부랴부랴 이들을 되돌려보내다 보니 명목상으로만 사면장을 만들어주었을 뿐 제대로 사면 절차를 밟지 않은 것이다. 선갑도 부대에 근무했던 또다른 대원의 설명이다.
일부 대원은 다시 교도소로
“선갑도 역시 당시 신속하게 해체하지 않고 시간이 좀더 흘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절망감 끝에 자살하는 사람이 속출했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실미도 사태 이후 속전속결로 처리한 것이 잘한 일이라고도 볼 수 있죠. 그러나 우리에게 준 사면장은 가짜였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선갑도 대원들은 하나같이 ‘임무에 성공하면 3000만원을 주겠다’는 약속을 믿고 섬에 들어갔어요. 150만원이면 서울에서 집 한 채를 살 수 있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무기수도 공작원도 아닌 사회인 신분으로 가족에게 되돌아가는 마당에 왜 약속을 지키지 않냐고 따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부대 해체와 대원들의 사회 복귀가 결정된 뒤에는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다음은 1973~74년 선갑도 부대를 최종적으로 해체할 당시 부대장을 맡았던 예비역 대령 A씨와의 일문일답이다. A씨는 7·4 공동성명이 발표된 이후 선갑도에 들어가 1년 가까이 근무하면서 대원들에 대한 사회적응 교육을 담당했다고 밝혔다.
- 부대 해체 직전 1년 동안은 어떤 훈련을 시켰습니까?
“훈련은 별로 없었어요. 주로 한 건 ‘새마을 교육’입니다. 돼지도 키우고, 소도 키우면서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죠.”
- 임무가 없어진 선갑도 대원들을 통제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당시는 이미 대원들을 사회로 복귀시킨다는 것이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 순해졌어요. 별 문제는 없었습니다.”
- 섬에서 내보낼 때는 어떤 절차를 밟았습니까?
“각 대원들의 형량과 행형 성적 등을 평가해서 단계적으로 감형시킨 뒤 내보냈습니다. 삼일절이나 광복절처럼 감형을 시킬 만한 계기가 있을 때마다 감형 조치를 밟은 뒤 8~10명씩 내보냈어요. 5~7년 형량을 받았던 재소자 출신들이 먼저 나가고 15년형이나 무기징역을 받은 재소자들은 나중에 나갔다고 보면 되죠.”
- 전원이 다 나갔습니까?
“감형 조치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2명이 남아서 이들은 안양교도소로 다시 보내 형기를 마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더 감형시킬 수도 없고 그렇다고 2명만으로 부대를 유지할 수도 없어 이런 조치를 취했던 것으로 압니다.”
당시 정보사 고위직에 몸담았던 한 예비역 대령도 “1976년 4월경 선갑도 대원들 중 2명이 마지막으로 만기출소함으로써 이 부대의 흔적이 완전히 지워졌다”고 말해 A씨의 증언을 뒷받침했다.
‘신동아’는 1968년 당시 안양교도소의 전과신분장 보존부와 출소신분장 보존부를 통해 선갑도 창설 대원 12명이 그 해 7월5일 동시에 형집행 정지 형식으로 출소한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안양교도소측 역시 “이들이 사면조치를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선갑도 대원들은 섬에서 나올 때 ‘대통령의 명에 의해 사면한다’는 국방부 장관 명의의 사면장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정부는 이들에게 합법적인 사면 절차를 적용하지 않았다.
선갑도 대원으로 활동했던 한 관계자는 “경찰에서 지문을 조회하면 지금도 ‘군형법에 의거 00년형을 선고받았다’는 내용만 있을 뿐 사면 기록은 물론 형집행정지 기록조차 나와 있지 않다”고 말했다. 형집행정지나 사면과 같은 법률적 절차가 당시 중앙정보부에 의해 초법적으로 행사되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국방부에 이 문제와 관련해 질의서를 보냈지만 “사안의 성격상 밝히기 곤란하다”는 답변 뿐이었다.
육군 첩보부대(AIU) 산하 902정보부대 803대. 이른바 선갑도 부대는 결국 이렇게 역사에서 스스로의 흔적을 말끔히 지워버렸다. 인천광역시 옹진군 자월면에 위치한 선갑도는 현재 민간인 한 명이 양식장을 운영하고 있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섬으로 되돌아갔다.
뇌관을 제거하다
실미도 부대와 같은 ‘사고’도 나지 않았다. 부대 해체 결정이 난 뒤로도 실미도는 폭발 직전의 뇌관을 건드리는 실수를 저질렀지만 선갑도는 신속하고 안전하게 뇌관을 제거해버렸다.
무기수 출신의 대원들도 35년동안 자신들의 과거에 대해 완벽하게 입을 다물었다. ‘실패’한 부대가 아니라 ‘성공’한 부대였다는 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20대 후반의 젊디젊은 나이에 선갑도에 들어가 청춘을 묻었다는 60대 초반의 한 대원은 이렇게 말했다.
“농사 잘 짓고 나서 벼가 익을만 하면 쭉정이를 뽑아내야죠. 선갑도를 떠나올 때 우리는 쭉정이였어요, 쭉정이!” (끝)
글: 성기영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ky320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