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년 10월 10일에 해체를 당했던 해병대 사령부가 6.29 민주화 선언이 있었던 그 해11월 1일 부로 재창설이 된 것은 5공화국 말기에 단행한 그 민주화선언이 가져다 준 우연의 선물은 결코 아니었다.
10.26사태로 무너진 유신독재정권을 거쳐 신군부의 집권의 긴 터널을 지나오는 동안 역대 제2참모차장과 해병참모부에서는 사령부의 재창설을 위해 남모르는 궁리와 연구를 해왔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해병대 사령부의 재창설을 위해 군복을 벗을 각오를 하고 문제를 제기했던 사람은 제7대 해군본부 제2참모차장 성병문 중장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휘권을 행사할 수가 없어 전력관리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던 그는 전력 관리상 반드시 개선되어야 할 다음과 같은 7가지 불합리한 요소를 척출하여 그것을 지면에 정리했다.
전문성의 현격한 차이로 인해 제기될수 밖에 없는 제반 문제점을 조목 조목 지적한 것 외에 전시 군수지원 체계상의 중대한 문제점. 통합이 초래한 혼성편성으로 인한 비능률. 고위계급의 축소로 인해 필연적으로 초래되는 진급 확률의 극소화로 인한 자질의 저하와 저능력의 심화.기술군과 체력군의 불구분으로 인한 교육 훈련의 약화 현상. 전통과 사명감의 상실과 사기의 저하. 근무 장소가 다름으로 해서 초래되는 진급심사 등 인사관리상의 문제점 등을 지적한 것이었는데, 이러한 내용의 부리핑 자료가 정리되자 성병문 제2참모차장은 그것을 해병참모부 기획처장 김기홍 대령에게 건네주며 극비리에 10부를 인쇄해 오라고 했고, 지시를 받은 김처장은 마치 역적이 된 것 같은 두려운 마음으로 해군본부 인쇄소에서 종사하고 있는 5명의 해병대 출신 인쇄공들에게 퇴근시간 후 은밀히 부탁하여 인쇄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인쇄된 유인물을 건네 받을 때 성병문 중장은 만약에 무슨 일이 있을 경우 인쇄물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이 지겠다고 말한 다음 10부 중 1부를 김처장에게 주며 굳은 표정으로 "세월이 흐른 후 역사의 증인이 돼 달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한편 그렇게 하여 브리핑 자료를 마련했던 성병문 장군은 불편한 관계에 있는 해군본부의 동의 없이 여러 단계를 거치지 않고서는 결코 접근하기가 어려운 군부의 실세들, 이를 테면 보안사령관과 함창의장 국방부장관 등의 군부요인을 보안 유지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가운데 끈덕진 노력 끝에 차례로 배방하여 인쇄물 에 적힌 그 문제점들을 브리핑을 통해 조목 조목 설득력있게 설명함으로써 해병대 사령부가 없어선 안 되겠다는 필요성을 공감하게 했고,지성이면 감천한다는 말이 있듯이 그러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경주한 끝에 성병문 중장은 자신의 제2참모차장 임기를 1개월 앞둔 86년 8월 전두환 대통령과 육사 11기 동기인 이기백 국방장관이 전 대통령으로부터 해병대 사령부를 재창설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합참의장으로 있을 때부터 여러 차례 성병문 장군의 공식적인 방문을 받았고, 또 성 장군의 브리핑에 공감을 했다고 말하는 전 국방장관 이기백 장군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이 대통령에게 진언을 할 때 해병대 사령부를 재창설 하게 되면 대선 때 해병대의 현역과 예비역을 합쳐서 100만표는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농담을 곁들이긴 했지만 본시 기질에 포용력과 결단력이 있는 전두환 대통령이 그 시기에 그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자신의 임기 중 전투역량을 최대한 강화하여 전쟁공포로부터 국민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편 그렇게 하여 국방부와 합참의 관련부서에서는 해병대 사령부의 재창설을 위한 작업에 착수했으나 다음과 같은 일로 인해 상당기간 지체되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이유를 설명하면 박구일 중장이 제2참모차장으로 취임 한 후 해군본부에서는 합참의 지시에 따라 신편될 사령부 지휘체제 안을 복수로 작성하여 해병참모부에서 만든 1개 안과 함께 합참을 제출햇고, 합참 작전국에서는 합참에서 작성한 1개 안과 해군본부의 1개 안 및 해병참모부에서만든 1개 안을 합참전략회의에 회부한 결과 해병참모부 안이 만장일치로 가결됨에 따라 그 안을 국방부 군무회의에 회부하게 되었는데, 그때 각 군의 작전 책임부서장이 전원 참석했던 그 전략회의에 참석하여 해병참모부 안을 직접 설명했던 당시의 해병참모부차장 박태복 예비역 준장의 증언에 따르면 그러한 결과가 초래된 것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정만길 소장이 해병참모부안이 가장 합리적이고 예산도 안들고 해병들의 사기도 진작 할 수 있는 안이라고 말하면서 "딴 것 볼 것 없다"는 식으로 해병참모부 안을 적극지지하고 나섰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군무회의에 회부된 그 안건은 어떤 이유 때문이었는진 알 수가 없으나 최상화 해군총장의 임기 중에는 매듭이 지어지지 않고 있다가 10대 총장 김종호 대장이 추임한후 해결 됨으로써 13대 대통령 선거일을 45일 앞둔 87년 11월 1일, 그러니까 87년 7월 14일 이기백 국방장관의 뒤를 이은 정호용 장관이 취임한 지 109일만에 해병대 사령부의 역사적인 재창설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었다.
다음 이야기는 해병대 사령부 재창설 계획이 완성단계에 이르렀을 때 거론이 된 신사령부의 명칭과 관련된 비화이다. 당시 해군 본부에서는 신 사령부의 명칭을 (1)해군상륙군사령부 (2)해군해병사령부 (3)해군해병상륙군사령부 등 3가지로 정하여 그 중의 하나를 택하게 할 계획이었으나 그 안건이 합참 전략회의 석상에서 거론될 때 의견제시를 요구받은 박구일 중장이 해군본부에서 제시해 놓은 3가지 명칭이 다 좋은 명칭이지만 '해병'이라고 하면 개개인을 뜻하지 조직체가 아니므로 '해병대'로 표현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 공감을 불러 일으켜 합참에서는 '해군 해병대 사령부'로 단일화 하여 장관 결재에 회부하자 정호용 국방장관은 해병대의 전통과 해병대 장병들의 사기를 고려해서 옛날 명칭 대로 '해병대 사령부'로 고쳐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청와대에서 재가를 받던 날 마지막 브리핑을 했던 박구일 제2참모차장은 브리핑이 끝난 후 "좋았어!"하며 흔쾌히 결재서류에 서명을 한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세가지 특별 지시를 받고 두 눈에 눈물이 핑 돌만큼 감격했다고 한다.
첫째 공부를 많이 하여 상륙작전의 전략을 개발하라. 둘째 김포에 주둔하는 2사단을 2년마다 교체하여 상륙전훈련을 시켜라. 그렇게 하지 않는 다면 육군과 같은 지상군 부대가 되고 말 것이다. 셋째 해병대 대원들이 싸움박질을 너무 많이 하지 않도록 해라. 적과 싸울 때 용감하게 싸워야 되지 않겠는가.
이상이 그 세가지 지시사항이었고, 이 지시사항을 전장병에게 교육을 통해 철저히 주지시키라고 했다고 하니 잔인하게 머리와 팔 다리를 죄다 잘라 없애 버리고 몸통만 남겨 놓은 박정희 대통령의 처사에 비한다면 참으로 감읍할 일이 아닐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박구일 장군은 그로부터 1주일 후 국방부에서 개최된 전군 지휘관회의 석상에서 국방부의 브리핑이 끝난 후의 건의사항 시간에 정호용 장관이 할 말이 없느냐고 물었을때 얼마나 그 일을 고맙게 여기고 있었던지 "요새 170만의 현역과 예비역 해병가족들은 매일 청와대를 향해 큰 절을 올리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전두환 대통령을 위시한 전 군의 지휘관이 참석해 있는 그 자리를 폭소의 도가니로 화하게 했다고 하며, 2차장으로 취임한 후 약 1년 간 불철주야로 노심초사했던 박구일 장군은 그가 사령관으로 취임한 후 그 3가지 지시사항을 브리핑 차트에 정리하여 40일 간에 걸친 예하부대 초도순시 때 철저한 교육으로 주지시켰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덧붙여 둘 이야기가 있다. 언젠가 공정식 장군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즉 '해병대'라는 명칭을 되찾아 준 정호용 전 국방장관이 너무 고마워서 만약에 이번 국회의원 선거 때 정 장군이 대구에서 출마를 하게 되면 대구로 내려가서 인사도 하고 격려도 할 작정이라고 했는데, 만약에 그 때 정 장관이 '해병대'란 명칭을 되찾아 주지 않고 해군본부에서 정해 놓은 그 세가지 명칭 중의 하나를 택했다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듯 필시 기쁨도 반감되고 신명도 반감되는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다.
사령부가 재창설된 날짜는 87년 11월 1일 이었다. 해병대가 수난을 당한 73년 10월 1일 그 날로부터 14년 1개월 9일 만에 우리 해병가족들은 몽매지간에도 잊지 못하고 있던 '해병대'란 그 이름과 '해병대 사령부'란 그 명칭을 소리 내어 불러 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