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전에서의 해병대 짜빈박 전투와 그 교훈

dugue29 작성일 09.02.28 00:47:41
댓글 1조회 2,587추천 2

123574963153962.jpg


해병대 청룡부대는 베트남전에서 정예부대로 명성을 날렸지만, 승패는 병가지상사인만큼 청룡부대도 항상 승리만을 거둔 것은 아닙니다.
아래 글은 베트남전 당시 청룡부대의 최대 패전 중에 하나인 짜빈박 전투를 설명한 것입니다.

* 비극의 시작

1967년 1월10일, 추라이지구 전투의 하나인 투망작전이 한창 진행되던 도중이었다. 우기(몇 달간 계속 비가 자주 내리는 계절)인 탓에 헬기가 제대로 이륙하기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었다. 청룡부대 제3대대장 조** 중령은 지상이동으로는 작전목표를 달성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공중기동으로 적의 퇴로를 차단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공격해봐야 적이 그냥 다른 곳으로 도망갈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대대장은 제3대대의 작전연기를 여단에 건의했고 청룡부대 여단장 김연상 준장은 연기를 승인했다. 당시 작전 중이었으므로 청룡부대 제3대대는 평소 주둔지가 아닌 예하 제9중대전술기지에 임시 대대전술지휘소를 설치한 상태였다. 작전이 연기되었으므로 대대전술지휘소에 나와 있는 대대장을 비롯한 대대본부 요원들은 원래의 대대본부 위치로 이동을 해야 했다. 대대의 계획은 제9중대전술기지에서부터 안디엠 마을까지는 도보행군하고, 안디엠 마을에서 대대본부까지는 525번 도로를 이용하여 차량으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제9중대전술기지에서 안디엠 마을까지는 3km 정도 밖에 되지 않았고, 낮은 야산과 마을, 논밭이 널려있는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제9중대전술기지의 가시거리 내였고 이미 평정이 끝난 지역이라 작전기간중 단 한번도 적이 출현하지 않았던 장소였다. 한마디로 대대전술지휘소 요원들의 도보이동 계획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대대 작전장교인 진우현 소령이 날씨가 좋아지면 헬기로 이동하자고 건의했으나 대대장은 도보이동을 강행했다.

행군대열을 보호하기 위해 행군대형을 전위소대, 본대, 경계분대로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제9중대 2소대가 전위소대(前衛小隊) 임무를 맡고, 대대전술지휘소 요원으로 본대(本隊)를 구성했으며, 그리고 제일 후미에는 경계를 맡은 1개 경계분대(警戒分隊)가 위치했다. 전위소대만 M-1 소총으로 무장한 정상적인 전투병력이었을뿐 행군 본대의 대대전술지휘소 요원의 절반은 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소총은 기껏해야 M-2 카빈 종류뿐이었다. 당시는 M-16 정식 보급되기 전이라 대대본부와 소대본부에 교육용 목적으로 M-16 소총이 각 1정식만 지급되었을 뿐이었다.

사실 어제(1967년 1월9일) 안디엠 마을에서 대민지원사업을 벌이던 제3대대 민사장교 양영구 중위는 마을 주민들로부터 이상한 제보를 받았다. “안디엠 마을 근처에 월맹 정규군 1개 중대가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양영구 중위는 이 제보를 당일 대대본부에서 상황장교로 근무하던 대대 화학장교 강용신 대위에서 전달했다. 강용신 대위는 다시 이를 대대전술지휘소에 근무 중인 대대 작전장교 진우현 소령에게 통보했다. 문제는 대대 작전장교였다. 하루에도 수십 건씩 확인할수 없는 첩보와 제보의 홍수 속에 살던 대대 작전장교는 이 제보도 “믿을 수 없는 잡소리”라고 생각했다. 이미 평정을 끝낸 후방에 베트콩이 아닌 월맹 정규군 중대급이 들어올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이 첩보는 담당 장교인 대대 정보장교나 상관인 대대장에게는 통보되지도 않았다. 이것이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


* 전위소대 전멸
1967년 1월10일, 전위소대의 첨병으로 앞서가던 제2분대 1조장 기세창 병장은 전방 40고지 숲속에서 낮은 포복으로 이동하는 적 2명을 발견했다. 기세창 병장은 아군을 보고 도망가는 소수 베트콩으로 짐작하고 서있는 자세 그대로 소총사격을 했다. 총소리가 나자 전체 행군대열이 멈춰 섰다. 전위소대는 즉각 경계태세를 취하여 자세를 낮추었으나, 행군본대의 대대전술지휘소 요원들은 흔히 있는 베트콩의 위협사격쯤으로 생각하고 우두커니 서있는 상태였다.

적이 도망가는 것으로 생각한 전위소대의 소대장 김진철 소위는 즉각 적을 추격하라고 명령했다. 전위소대가 명령을 받고 일어서려는 순간 인근 옆쪽의 197고지에서 적들이 기습사격을 가해왔다. 원래 197고지에는 몇 달 전인 1966년 10월까지 청룡부대 제3대대 10중대의 중대전술기지가 위치했었다. 한때 중대전술기지가 위치했었을 만큼 안전한 지역이었으므로 그곳에 적이 잠복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혼비백산한 전위소대는 즉시 다시 자세를 낮추었으나 지형이 너무 불리했다. 물이 질펀한 논바닥에 엄폐할수 있는 곳이라고는 나지막한 논둑뿐이었다. 제9중대에 상황을 보고하던 통신병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 소대장은 현 위치에서는 전투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아까 소수의 적이 도망간 정면의 40고지로 이동한 후 197고지의 적을 상대하려고 했다. 약진으로 40고지로 이동하려는 순간 40고지에서도 적이 사격해 왔다. 설상가상으로 적은 기관총을 쏘아대고 있었다. 소대장은 머리와 등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이대로 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 청룡부대원들은 수류탄을 던지며 결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수류탄을 던지기 위해 상체를 들었던 병사들은 어김없이 적의 명중탄을 맞고 전사했다. 전위소대의 1분대장 박광선 하사는 소대장이 휴대하고 있던 M-16 소총을 자신이 집어 들었다. 1분대장 자신과 BAR 사수 윤광렬 상병과 함께 엄호사격을 할 테니 나머지 소대원에게 서쪽의 논으로 탈출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아군 병사들이 움직일 때마다 적은 어김없이 사격을 가해왔다. 40고지와 197고지 양쪽에서 사격을 받으며 피할 곳도 없는 논바닥에서 1시간의 교전 끝에 전위소대 역할을 맡은 제9중대의 2소대는 결국 전멸했다. 소대 병력 중에 죽거나 부상을 입지 않은 병사는 단 1명뿐이었다. 어제의 제보대로 적은 베트콩이 아니라 월맹 정규군이었다. 상황은 고약해서 적은 산 밑으로 내려와 이미 죽은 아군 병사들을 하나하나 확인사살까지 하고 있었다.


* 제3대대 전술지휘소의 위기
전위소대가 적의 공격을 받는 동시에 본대에서 제일 앞서가던 대대 작전지휘반 요원들도 적의 사격을 받았다. 제일 앞서가던 대대 통신병이 적탄에 쓰러지고 대대 내 지휘를 위한 무전기뿐만 아니라 대대~여단망 무전기도 파괴되었다. 대대장은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사방에서 총격 소리가 들리자 위기라고 직감했으나 자체 병력으로는 마땅한 대응수단이 없었다. 대대장은 유일하게 이용가능한 통신망인 제9중대 전술망으로 제9중대장에게 즉각 출동을 명령하는 한편 포병 쪽에 지원사격을 요청하도록 지시했다.

본대 병력도 문제였지만 더 문제는 선두에서 전멸의 위험에 몰린 전위소대였다. 하지만 곧 전위소대 사이의 무전망도 끊겨 버렸다. 대대장은 후위분대를 전방으로 추진시켜 본대 선두의 작전지휘반 요원들이라도 엄호하도록 명령했지만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작전지휘반과 함께 있던 미 해병 항공연락장교(앵글리코) 오스월트 대위는 혼자 탈출을 시도하다가 논두렁에서 적의 사격을 받아 부상을 입고 논물 속에 쓰러졌다. 적은 서서히 본대 선두로 다가오면서 다른 병력으로는 후위분대가 위치했던 후방을 차단하려했다. 대대전술지휘소 요원들은 권총 사격까지 불사하면서 저항했으나 상황은 점점 불리해졌다. 대대 작전보좌관, 대대에 파견 나온 포병관측하사관과 4.2인치 박격포 관측하사관 등 노련한 장교와 하사관이 저항했으나 권총과 카빈 따위로는 AK-47과 기관총을 휴대한 월맹 정규군을 상대할수 없었다. 대대 선임하사(주임상사)였던 조병세 상사가 들고 있던 M-16 소총만이 위안이 될 뿐이었다. 이 M-16 소총은 당시 대대전술지휘소에서 가지고 있던 유일한 M-16 소총이었다.

대대 전술지휘소의 일부 장교들과 하사관들은 대대장마저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면 사태가 겉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대대장에게 탈출하여 제9중대전술기지로 되돌아갈 것을 요청했다. 대대장은 마지못해 이 제의에 응해 현장 지휘를 포기했다. 대대 선임하사(주임상사)마저 대대장 호위를 명목으로 M-16 소총을 들고 같이 탈출해 버렸다. 대대전술지휘소 요원들에게 남은 화기는 권총과 카빈뿐이었고 그 흔한 수류탄 하나 없었다. 현장을 통제할수 있는 지휘부마저 현장을 이탈해 버리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현장에 있던 대대 작전 장교 진우현 소령마저 대대장의 탈출 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므로 대대장의 행동은 단순한 탈출이 아니라 지휘 포기나 적전 탈주나 다를 바 없었다.


* 제3대대 9중대 지원병력 출동
청룡부대 제3대대 9중대장 김윤형 대위는 행군대형의 전위소대 역할을 맡은 예하 2소대와 대대 전술지휘소의 연락을 받고 이미 기지 밖에 나가있던 1소대에게 즉각 출동을 명령했다. 당시 기지 내부에는 병력이 거의 없었고 각종 환자와 필수 근무자뿐이었다. 즉각 출동이 가능한 여유 병력은 60밀리 박격포반 소속 3~4명뿐이었다. 다급해진 중대장은 중대에 파견 나와 있는 81밀리 박격포 반원까지 출동병력에 포함시켜 10여명을 이끌고 출동했다. 이들이 출동한 이후 중대전술기지는 텅비어버린 상태였다.

1소대와 중대장이 인솔하는 병력이 합류하여 교전 지역에 도착했을 때는 전위소대는 이미 전멸한 상태였고, 본대의 후미만 겨우 구출할수 있는 상황이었다. 마침 구출자 중에는 미 해병대 항공연락장교 오스월트 대위가 있었다. 오스월트 대위는 미 해병대에게 연락하여 즉각 UH-1E 무장헬기 8대가 출동하였다. 적의 치열한 대공사격 속에 헬기 1대는 현장에서 불시착했으나 무장헬기의 공격으로 적의 기세는 다소 누그러들었다.

병력 부족을 느낀 제9중대는 대대관측소에 파견 나가 있던 3소대 병력 중에 2개 분대도 출동시켰다. 전우창 소위가 지휘하는 3소대는 우회해서 40고지 방향에서 적을 기습하려고 했다. 상황이 위급했으므로 3소대는 조심스럽게 접근하기 보다는 거의 달려가는 속도로 이동했다. 그러나 40고지 부근에는 아군 증원 병력을 차단하기 위한 적의 매복부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3소대장은 적의 사격으로 쓰러졌고 많은 소대원들도 전사하여 공격은 실패했다. 3소대는 푸록전투 당시 승리의 주역이었으나 짜빈박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했던 것이다.

* 포병의 지원도 불가능
당시 행군 본대의 대대 전술지휘소 내에는 대대 포병연락장교가 1명 있었다. 포병연락장교와 포병대대 간의 직접 무전망은 연결되지 않았으나 대대 포병연락장교와 제9중대 포병 전방관측장교 사이에는 무전망이 연결되었다. 위기 상황이었으므로 제9중대 포병 전방관측장교가 직접 106밀리 무반동총분대와 81밀리 박격포반을 지휘하여 지원사격을 실시했다. 그러나 제9중대 지원 병력이 출동할 때 81밀리 박격포반 병력들도 소총수로 전환하여 출동병력에 포함되게 되었다. 81밀리 박격포 포반장과 포병연락장교는 81밀리 박격포는 현장에서 유일하게 지원 가능한 화기이므로 절대로 출동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제9중대장은 병력이 부족한 터라 그들의 주장을 무시해 버리고 말았다.

당시 적과 아군이 너무 근접한 상태라 교전지역에 대한 포병사격은 힘들었다. 아군의 피해를 무릅쓰고 사격하려고해도 197고지 때문에 사각(死角)이 발생하여 105밀리 곡사포를 동원한 직접적인 지원사격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81밀리 박격포 외에는 대대를 지원할 화기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81밀리 박격포반 병사들은 소총수로 출전했다. 유일한 희망이었던 81밀리 박격포도 단 10발만 사격한 후 침묵을 지키게 된 것이다. 197고지 너머의 적 예상접근로에만 무의미한 105밀리 곡사포탄이 떨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 짜빈박(Tra Binh Bac)의 비극
당시 여단에서는 정규적인 무전망 외에 예비무전기를 활용하여 추가로 감청망을 운용하고 있었다. 여단본부에서는 제3대대에 파견된 포병연락장교와 제9중대 포병관측 장교 사이의 무전망을 감청한 결과 제3대대가 위기에 빠진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해병 청룡부대 여단본부에서는 여단 예비대로 보유하고 있던 제3대대 10중대에게 즉각 교전지역으로 출동하라고 명령했다. 여단에서는 미 해병 제3MAF(제3해병상륙군:MAF는 현 MEF의 전신)에게 항공지원을 요청했으나 기상이 나빠 항공기가 출격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추가로 병력을 파병하고 싶었으나 당시 전투 배치되지 않은 유일한 병력인 제2대대 7중대마저 다른 지역에서 부비트랩에 당한 상태라, MEDVAC(의무후송:Medical Evacuation)을 요청하고 있는 판이었다.

10중대는 중대본부 요원과 1소대를 헬기에 탑승시켜 교전지역으로 급하게 출동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10중대가 바로 얼마 전까지 교전지역에 주둔한 부대였기 때문에 교전 지역의 지형을 잘 알고 있었던 점이었다. 그러나 현장은 안개가 너무 자욱하고 적의 대공사격도 치열하여 착륙을 할수가 없었다. 10중대는 착륙을 포기하고 헬기의 기수를 돌려 회항하였다. 청룡부대 여단장 김연상 준장은 헬기 회항보고를 받고 격분하여 10중대에게 강행착륙을 명령했다. 10중대는 여단장의 강한 질책을 받고 다시 현장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10중대가 다시 교전지역에 강행착륙을 했을 때는 적이 철수 준비를 하는 상태였으므로 헬기에 대한 사격이 없었다. 그러나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해가 졌고 현장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려버렸다. 10중대는 교전을 포기하고 다시 도보 철수를 준비했다. 그러나 철수하던 10중대는 어둠 속에서 철수하는 적의 병력과 뒤엉켜 버렸다. 한국군은 총검술과 태권도로, 적은 죽창으로 치열한 백병전을 벌였다. 백병전에서 10중대의 위생병 권혁도 병장은 구급낭으로 백병전을 벌여 적 소총을 노획하기도 했다. 월맹군 병사는 총으로 권혁도 병장을 후려치려고 했으나 권혁도 병장이 휘두른 구급낭의 끈에 총이 걸려버려 총을 놓쳐버렸다. 권혁도 병장은 총을 놓친 월맹군 병사를 후려쳐 언덕 밑으로 굴려버렸다. 격전 끝에 적은 철수방향을 바꾸어 반대편 197고지의 산속으로 사라졌다.

여단장은 즉각 현장의 병력에게 철수를 명령했으나 전사상자가 너무 많이 흩어져 있어서 밤중에 부상자를 버려두고 철수할 수는 없었다. 결국 대대전술지휘소 요원들은 현 위치에서 야간급편방어 편성을 한 상태로 밤을 넘겨야 했다. 다음날 아침 9중대와 10중대 병력이 다시 투입되어 전사자의 유해와 부상자들을 모두 구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한국군은 전사 32명, 중상 30명의 손실을 입었고 나머지 병사들도 온전한 병사들이 거의 없었다. BAR 자동소총 6정, M-1 소총 8정, M-16 소총 1정, M-1/2 카빈 8정, 권총 7정, AN/PRC-10 무전기 3대, AN-PRC/6 무전기 1대 등도 분실 혹은 파괴되었다. 이에 반해 한국군의 전과는 사살 18명, 소총 2정 노획뿐이었다. 치명적인 피해를 당한 청룡부대 제3대대는 당분간 작전을 수행할수 없을 정도의 타격을 입었다. 이 비극적 전투를 짜빈박 전투라고 부른다.

전투후 대대 작전보좌관 조경식 대위는 품속 깊이 상황도와 기밀서류를 숨긴 체 권총을 쥐고 전사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대대 작전하사관 김길우 하사의 시신 주위에는 통신음어표가 갈기갈기 찢겨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죽음의 순간까지 일부 대대 지휘부 요원들은 그들의 책임을 다한 것이다

[전투 교훈]

정보의 중요성

제3대대전술지휘소가 복귀하기 위하여 도보이동을 실시하기 전날, 안디엠(2) 마을에서 대민지원활동중이던 대대민사장교가 그 마을 주민으로부터 입수한 "1개중대 규모의 월맹군이 안디엠(8) 마을일대에 들어와 있다."는 첩보가 대대전술 지휘소의 작전장교에게 전달 되었다. 이 첩보는 주무참모인 첩보장교에게 통보되거나 대대장에게 보고되지도 않은체, 신뢰성이 희박하다는 작전장교의 독단적인 판단에 의해 무용화 되었다.
이 첩보를 활용하지 못함으로써 대대는 작전을 유리하게 이끌 수도 있었던 결정적인 기회를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도보이동중 적의 기습공격을 받아 큰 손실을 입었다. 이 사례는 불확실해 보리는 첩보일지라도 이를 소홀히 다룸으로써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동시에, 첩보의 중요성을 대변해주는 좋은 사례의 하나이다.

지휘관의 책임

전투간 대대장의 기본임무는 전투지휘이다. 대대장의 적절하지 못한 상황판단과 부적절한 결심으로 말미암아 '지휘부재'현상을 자초했다. 지휘착오나 지휘부재가 가뜩이나 열세한 전투력을 더욱 약화시켰고, 이로 인하여지휘부재중 실시된 반격작전 및 부대증원도 사실상 무위한 것이 되고 말았다.여하한 상황하에서도 부대의 성패에 대한 모든 책임은 지휘관만이 진다. 보병대대교범은 이를 보다 구체화하여 [대대의 성공 또는 실패에 대한 책임은 대대장만이 진다]고 명시하고 있다. 제3대대장 역시 이러한 지휘상의 기본적 원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전투의 결과가 확연해진 뒤, 비통에 잠겨있던 대대장은, "대대장병들과 함께 끝까지 싸우다가 그들과 함께 목숨을 바쳤어야만 했다"고 스스로를 후회하였으나, 이미 때늦은 자책이었다. 지휘결함 및 지휘부재가 '짜빈박 전투'의 실패를 자초한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지휘상의 결함만이 '짜빈박 전투'의 승패를 좌우한 유일한 요인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될 것이며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이 전투를 주의깊게 고찰함으로써 전투의 제반국면에 따라 각급제대에 상응하는 실질적인 교훈을 찾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공중기동수단문제

헬리콥터는 월남전을 상징할만큼 작전상의 기여도가 눈부신 것이었지만, 짜빈박 전투에서 본 바와같이 때로는 작전이 헬리콥터 운용계획의 영향으로 크게 차질을 초래한 경우를 해병여단은 때때로 겪어야 했다. 미군지원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공중기동은 자체보유수단이 아니기 때문에 기상의 영향이 크긴 했지만 긴박한 상황에도 한정된 헬기지원으로 말미암아 원활한 작전을 할 수 없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무선장비 및 총기

당시 한국군은 밀림이 많은 월남전에서는 부적합한 성능도 미약한 AN/PRC-10을 장비하고 있었다. 신형무전기 AN/PRC-25 로 대체지급이 시급히 요청되고 있었으나 당시 주월한국군사령부에 의해 1차로 취득되었던 신형무전기가 해병여단에는 29대가 지급되어 투망작전 후반기에 사용할 수 있었는데, 그 지급이 며칠만 빨랐어도 아군작전에 크게 도움이 되었으리라는 아쉬움을 갖게한다. 당시 한국군이 절실하게 갈망하였던 M16 소총과 신혐 AN/PRC-25 무전기가 소요에 충족되까지에는 많은 시일을 요했다.

주목해야될 적의 전술

투망작전을 마친 여단은 작전결과를 분석평가하고 이후의 작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야 했으나, 작전경험에 대한 구체적인 진지한 검토가 미흡하였다. 짜빈박 전투시 적매복대의 유선사용사실이 주목할만한 적의 전술로써 거론되었으나 예하부대에 전파되지 못하는 브리핑 위주의 검토가 되고 말았다. 다음작전이었던 "푸롱(Phu Long)전투"에서 제6중대가 작전에 투입되어 월맹군이 깔아놓은 야전용 유선을 발견하고도 이전에 아군이 사용했던것으로 착각하여 그대로 지나쳤다가 후방으로부터 적매복대의 집중공격을 받는 위기를 맞게된다. 1967년 2월1일의 "강구전투"에서도 적의 매복대에 의한 기습공격으로 손실을 입었다.

짜빈박 전투이후의 개황

투망작전이 개시된 1967년 1월 5일을 전후하여 여단작전지역의 서부산악지대에는 월맹군 제2사단본부와 그 예하부대인 월맹군 제21연대(2,000명)가 이동해 옴으로써 여단과 대치한 적병력은 1개사단규모로 증강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후 1967년 2월 15일 짜빈동 전투에서 생포한 적포로의 진술에 의하여 확인되었으나 당시 정보보고에서도 1967년 1월 12일 이들 적의 이동에 관한 첩보가 최초로 알려졌었다.
여단은 이같은 적의 증강 사실과 관련, 적의 공격 가능성에 대비하여 전술기지 보강공사를 대대적으로 실시하는 한편, 전술기지를 중심으로한 소부대작전을 강화하였다. 적의 공격에 대비한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여단은 1967년 2월 15일 짜빈동(Tra Binh Dong)의 제11중대 전술기지를 공격해 온 적의 대규모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하고 혁혁한 전과를 거둘 수가 있었다.

 

 

 

작성자 : 유목

dugue29의 최근 게시물

밀리터리 인기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