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곳곳에 투하시킨 이시이식 세균 도기폭탄
2차대전당시 중국인과 조선인에 대한 생체실험을 자행했던 하얼빈 731 부대의 건물
시로 이시이 (石井三郞) 1892 ~1959
731부대 의 생체실험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본격적인 중국 내륙침략의 야심에 따라 적은비용으로 수많은 중국인구를 대량살상시킬수있는 효과적인 병기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그러한 대량학살의 필요성에 따라 탄생된 부대의 이름은 여타 일본군조차 모르는 731부대였다.
그리고 1년후 1932년에 731 부대의 기지는 만주 하얼빈에 극비리에 건설된다.
일본 의사출신인 이시이 시로가 주관이 되어 만주 하얼빈근교 핑팡에 근거지를 마련하고서 본격전으로 대량의 생체실험을 일삼게 되는것이다.
그와같은 극히 비인간적이고도 잔인했던 생체실험에는 주로 강제로 잡혀온 수많았던 중국인과 조선인이 마루타라는 미명하에 잔인한 생체실험의 대상으로 이용되었다.
한편 당시 적국인 다수의 러시아인 포로까지 생체실험에 이용되기도했다.
실험된 인구의 수는 확인된 수치만도 58만명 정도이며 전체적인 규모는 대략 100만명에 이를것으로 본다.
인간의 신체를 해부시켜서 각 부위를 골라가며 콜레라.탄저균,매독균을 주입하여 그 반응도를 관찰하는 실험및 겨울철 한대에 벌거벗긴채로 놔둔채 얼어죽는 동사체의 시간경과 반응실험과 인체 각부분을 골절시킨후 견디는 생존반응실험등 그야말로 인간을 모르모트와도 같이 생체실험용 대상으로 이용했다.
그리고 실험대상으로 이용된 그들의 변사체는 실험이후 전량 화장되거나 유기되었다.
이와같은 형태는 규모면에서는 작지만 나치스가 청산가스(치클론)를 사용하여 개스실에서 유태인을 대량 살상시킨후 화장하여 폐기시켜 버리는 상황과 별로 다를바가 없는 잔혹한 인종범죄였던 것이다.
또한 일본군은 중국인 복장으로 위장하여 731부대가 배양한 콜레라균을 이용하여 중국인 마을 곳곳의 우물에 살포하기도하고 음식물에 섞어 전염시켜 수십만명을 사망시키기도 했다.
2차대전 말기에는 그와같은 세균전을 대폭강화시켜 추운겨울에도 호흡기를 통하여 전염되는 전염성이 매우 강한 페스트균을 도자기용기에 밀봉시켜 폭격기를 이용하여 중국 인구밀집도시에 대량으로 투하시킨다.
이시이 시로는 그러했던 온갖 생체실험을 자행한후에 그에따른 실험 데이타를 치밀히 작성한다.
이같이 인간을 실험용으로 이용한 일본 731부대의 생체실험 자료는 종전후 미국으로 전량 전해진다.
혹자는 일본의731 부대와 나치스의 생체실험자로 악명높은 멩겔레같은자 때문에 현대의학의 진보를 가져왔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인류역사상 일본은 나치스 독일과 같이 사악한 생체실험의 인종범죄 만행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2차대전 종전후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731관계자들은 미국에 자료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전쟁범죄의 처벌을 받지 않게된다.
그러한 관계로 731부대가 저지른 인종범죄에 대한 부분의 철처한 진상규명과 전쟁범죄자들의 처벌은 지나간 역사속으로 묻혀버리게된다.
731부대에 종사했던 인원은 약 2만명 정도로 추산되며 전쟁말기 일본은 패전직전에 하얼빈의 731부대 중요시설물들은 거의 파괴시켜 버렸다.
그들중 일부 다른부대로 파견된 731부대 핵심 간부와 종사자들은 패전후 소련군에 잡혀 포로가 되었으나 소련군 역시 이들의 생체실험 자료를 넘겨받는 조건으로 비교적 가벼운 형을 내렸다.
즉 1949년의 하바로프스크에서의 일본군 전범재판은 소련이 넘겨받을 일제의 731부대 생체실험자료와 소련간의 사법거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시이 시로가 제작한 생물학병기중 제일 대표적인것중 하나는 위의 사진에 소개된 배양시킨 세균을 대량으로 밀봉시켜 중국에 투하하여 수많은 인명에게 전염병을 창궐시킨 세균 도기폭탄이었다.
자료제공 : 야 후
알 림 : 위 자료는 중복이 될 수 있음을 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