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전쟁 sainte foy 전투

whcjfgh 작성일 09.05.19 07:46:23
댓글 6조회 2,553추천 6

퀘벡이 함락된지 어느덧 9 개월이지난 뉴프랑스

 

유능하고 젊은장군이엇던 영국장군 울프 와  프랑스군의 마지막 장군이라 할수잇엇던 몬캄둘의

싸움은 결국 서로의 죽음으로 끝이나고 퀘벡은 두호랑이의 싸움으로 황폐화 되어잇엇죠 .

 

 

뉴프랑스의 수도를 빼앗긴 남아잇던 프랑스군과 장군들은 퀘벡을 되찾을생각에 모든병력을

몬트리올 로 집결시킵니다. 하지만 그것조차 몬캄이 없던 프랑스군 장군들의 멍청한실수의 일부엿죠

 

그들은 프랑스에서 출발한 지원군부대의 도착만 믿고잇던터라

퀘벡이 제일중요하다 생각하게되고 영국군에게 밀리던 전선에 거의모든병력을빼내게되고

오히려 영국군에게 마음놓고 다녀라할정도의 수송로와 요새들을 넘겨주게되지요 .

 

124268402973554.jpg

빠른속도로 집결하는프랑스군

 

프랑스군이 버린요새들을 참쉽게 먹으며 영국군은 몬트리올쪽을 감싸게 되고

프랑스군 사령관 levis - 르비 장군은 그리하여 모인 7000명의 병력중 5000명정도의 병사를

이끌고 퀘벡으로 진군하게됩니다.

 

울프와 몬캄의 퀘벡전투후 초토화된 퀘벡을 관리하던 머레이 장군은

그가 가지고 잇던 3500명의 병력과 27문의 대포로는 퀘벡성을 지킬수없다판단

 

몬캄이 울프와의 전투에서 섯던 그장소로 자신의 병력을 이동시킵니다.

이때가 1760 년 4월 28일 오후

프랑스군이 도착하고 머레이는 자신의병력이 먼저 선제공격을하느냐 방어를 유지하느냐에대한

판단에 갈림길에서 도박을 하게됩니다. 그는

자신의 병력들에게 적에게 전진 명령을 내리고 프랑스군역시 사격대형으로 전진을시작합니다.

124268464917791.jpg

눈이 마르지도않은 늦은 봄인 4월에 폐허가된 퀘벡을 앞두고 작전구상을 하는 머레이 .

 

 

- 전진하던 프랑스군은 50m 정도를 전진하다 방어진형을 같추고

영국군은 200m 를 더전진해야했기에 전진을 하엿으나 머레이의실수는 전투에 도박을 한것이아니라

지형을 살피지 않앗던 것입니다.

 

영국군이 전진하던도중 그들은 눈이녹아서 진흙탕이된곳을 지나게되엇고 프랑스군은 마른지형에서

멈춘지라 영국군이 오기만기달리고잇엇죠,

 

그리고 또 다른머레이의 실수는 자신의 대포들에게 지속적인 사격명령을 내렷던것입니다.

지고로 대형전투도중에는 왠만해선 대포를쏘지않지만 그는 지속적인 사격을 명령하엿고

진흙탕속에서 명중률이 개판이던 당시대포로써는 팀킬도 서슴치않는 막강한포격을 하엿고

그결과 적보다 아군이 더많이죽는 현상이 나게되죠.

 

영국군이 진흙을 해치고 프랑스군이 잇는 마른지형에 기어오른순간

프랑스군이 먼저사격을 시작합니다. 4000명에 달하는 프랑스군의 사격이시작되고

수많은숫자의 영국군이 쓰러지게됩니다.

 

이어 영국군이 사격을시작하고 하이랜더 중심의 영국군은 사격을하엿으나 이미 사기는바닥에 떨어져잇엇지요.

124268500566794.jpg

하이랜더 \

 

이후 양측간의 밀리지않는 사격으로 8번정도의사격이 이어지고

르비 장군은 모든프랑스군에게 돌격을 명령합니다.

 

124268510554122.jpg

선두에앞장서는 르비장군.

 

 

르비장군의 생각에는 퀘벡을 포위한후 5월중만되면 곧 도착하는 지원군을 퀘벡에서 맡고

재정비한후 잃엇던 남쪽 지역을 다시 되찾는다엿지요 .

 

허나 그가 돌격을명령한후 프랑스군역시 진흙탕에 들어가는신세 가되엇고

양측은 진흙탕에서 싸움을 시작하게되죠 . 진흘강에서의 싸움후 2시간정도후

프랑스군은 잠시 뒤로 물러나게되죠 하지만 영국군 장군이엇던 머레이는

그것이 프랑스군의 후퇴인줄알고 하이랜더들에게 돌격을명령합니다. 진흙탕에 발이빠진상태후라

속도가 빠를리가없던 하이랜더들은 용감하게 돌격햇으나 프랑스군 머스켓에 모두쓰러지고

 

르비장군은 머레이가 스스로 자신이 패배하여 퀘벡으로 돌아가게끔 자신의부하에게 재돌격을

명령합니다. 하지만 재돌격도중 프랑스군역시 진흙탕에서 주춤거리는사이 27문에 대포와

영국군의 머스켓에 수없이쓰러지게되고 다시 양측은 뒤돌아가게됩니다.

 

르비의 예상대로  머레이는 후퇴를하게되지만 르비장군역시 엄청난 부상자를 낸상태라 몬트리올로

돌아가야하는 상황을 맞이합니다.

 

르비는 애초에 몬트리올로 돌아가 남아잇던 2000명을 합세하여 재공격하려햇으나

남쪽을 열어둔바람에 영국군이 몬트리올 아래로 진군하는걸 방치하엿고 2000명과 살아남은 2500명

총 4500명의 병력으로 몆만에달하는 영국군을 상대해야 하는상황에 놓이게됩니다.

 

지원군올때까지는 버티겟지 햇던 그의 예상과달리 지원군은 절대오지않앗습니다,

그가 열어둔 남쪽의 모든 항구가 영국에게 점령당하고 그나마 도착햇던 프랑스의 지원군을 실엇던 배마져

침몰당하엿으며 그나마 도착햇던 보급품마저 영국에게 모두 빼앗기게되자

 

그는 결국 몬트리올을 두고 남아잇던 모든 프랑스군과 민병대 인디언들과 함께

영국군에게 투항합니다.

 124268576144818.jpg

몬트리올의 항복.

 

프랑스는 7년전쟁 초반에는 모든전선에서 승승장구하며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듯하엿으나

영국이 유럽에서의 전투를 포기하고 식민지에서의 전투를 위해 엄청난숫자의 병력을

식민지로보낸상태에 믿고잇던 사령관 몬캄마저 전사하고 퀘벡을 빼앗기기 시작하며

승승장구하던 식민지에서도 점점 패배하기시작하엿으며 결국은 몬트리올마저 항복하게되자

프랑스는 지금 미대륙의 절반에 해당하던 뉴프랑스 - 루이지애나 부터 모든 캐나다땅 )

 

의 70% 를 영국에게 내주게되고 결국 프랑스는 식민지에서의 통제권을 몬트리올함락이후로

완전상실하게됩니다.

 

몬트리올의 항복이후 3번에달하는 전투가 식민지에서 벌어졋고 프랑스는 3번의전투 모두를 패함으로써

식민지에서의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끝이나게됩니다.

 

10만에달하는 사람들이 7년전쟁동안 식민지땅에서 죽어갓으며 이전쟁의 계기로 인해

영국은 어마어마한 빚을지게되고 영국은 그 어마어마한 빚을 전쟁에서 피흘리며 싸운 식민지인들에게

청구함으로써 결국 7년전쟁은 미국의탄생을 재촉하게되죠 .

 

영국군에서 싸운 조지워싱턴장군이 후에 미국의초대대통령이 됫듯이 말이죠.

124268641261424.jpg

세인트 포이 전투의 리인액트 입니다.

미국인들로구성된 민병대와 영국군 척탄병 들입니다.

 

 

7년전쟁에 잇던전투가 총 26번이지만 띠엄띠엄하다보니 연도별로 정리된게아니라 막정리되버렷네요

-ㅁ- 제가 별로꼼꼼하지못해서 그럽니다. 이해해주세요 ㅎㅎ




 

whcjfgh의 최근 게시물

밀리터리 인기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