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만 기습공격이 결정되기 전부터 일본 해군 항공부대는 긴박한 정세하에 맹훈련을
실시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위 그림은 1941년 전함 나가토(長門)가
가상의 적 전함역할을맡아 고각포로 대공사격을 하는 가운데 상공에서는 96식 23형
육상공격기가 나가토를 겨냥한 어뢰를 발사하고 있는 훈련 모습이다.
왼쪽에 보이는 함정은 제3수뢰전대 제20구축대 소속의 구축함이다.
진주만 공격에서는 나가토가 장비한 40cm 주포의 포탄을 개조한 800kg짜리 폭탄을
사용하여 미국 전함들을 공격하게된다.
도라!도라!도라!.... 제 13편
진주만은 완전 무방비 상태....
1941년 10월 실시되는 실전적 훈련에 합류하기 위해 가고시마로 들어오는 항모 히류
야마모토 제독이 Z작전 계획의 마지막 손질을 하고 있을 무렵,
함재기 조종사의 훈련은 더욱 엄격해지고 있었다. 야마모토가 가장 긴급하게 필요로한
문제는 바로 이 훈련이었으며 더구나 엄중하게 비밀이 지켜져야 했으므로 사정은
복잡했다. 조종사들에게 훈련 목적을 알려줄 수도 없었다.
그리고 수평 폭격기, 뇌격기, 급강하 폭격기, 전투기와같이 각기 다른 종류의 항공기를
정해진 시간까지, 하나의 뭉쳐진 공격력으로 편성해야 했다. 만일 Z작전이 11월
말경에라도 실시하게끔 된다면, 시간은 아주 부족했다.
다만 다행한 것은 훈련장소로 선택된 가고시마 만은 이 목적에 이상적인 곳이었다.
해발 1200m의 화산 사꾸라지마는 진주만의 포드 섬으로 가상되었고,
가고시마 시를 안고 있는 가고시마 만 일대는 진주만 군항과 그 주변의 미 해군 공창으로
가상되었으며 그야말로 이 목적을 위해서 형성된 것이나 다름없는 지형이었다.
농촌 사람들은 쉴새없는 폭음 때문에 닭이 알을 낳지 않는다고 불만을 털어 놓았다.
그러나 9월 말이 되자 주민들은 해군항공대의 서커스 라고 부르며 평범한 일상으로 받아들였다.
하루에 네 번, 조종사들은 항모에서의 이함과 착함 훈련을 되풀이했다.
이어서 뇌격기가 시로야마 산 상공을 요란하게 날아가고 이와자끼 골짜기에서 다시
고도를 낮추면서 오른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해안으로 향한다. 거기서 수면에 스칠 듯이
저공으로 날며 어뢰를 발사하는 훈련이 실시되었다. 한편 규슈의 다른 장소에서는
급강하 폭격 훈련이 실시되고 있었다. 고도 1500m부터 수직으로 아슬아슬한 고도까지
급하강한 후 기수를 들어올리는 훈련이 거듭 되었다. 그때까지의 방식은 고도 600m가
폭탄 투하의 최저 고도였다. 그러나 100%의 정확한 폭격을 가하기 위해 폭격기 대원들은
고도 450m에서 폭탄을 투하하도록 명령받았다.
고공에서의 수평 폭격은 더욱 까다로운 문제였다.
일찍이 중국에서 해군 항공대는 실로 보잘 것 없는 빈약한 대공포화에 대해서 조차도
수평 폭격으로 만족스런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이 때문에 야마모토 제독은 수평 폭격엔
비판적이었고 함선같이 움직이는 목표물에 대해서는 부적당 한 것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 목표물에 공격이 한정되는 것이라면,
폭격 성공 확률은 개선될 것으로 믿고 있었다.
기본적인 문제는 폭격기에 장비된 폭격 조준기는 미국이나 영국에 비해 정확도가
떨어진다는 점이었다. 이 때문에 조준은 폭격수의 눈과 육감에 의지할 수밖에 었었으며
이 점은 훈련에 의해 개선되었다. 가장 우수한 폭격수를 태운 항공기가 각 편대를
유도하는 방법이 채택되었다.
10월에 실시된 폭격 시합에서 5대의 폭격기가 지그재그로 고속항해하는 표적함에 대해
초고도 수평폭격을 실시하여 50%의 명중률을 기록했고 정박중인 함선에 대해서는
80%의 명중률이 예상되었다.
진주만에 정박중인 미해군 중순양함 뉴올린즈
가고시마 만에서 맹훈련중인 97식 함상공격기
직면하고 있던 난문제는 탑승원 훈련뿐만이 아니었다.
3월에 겐다 항공참모는 닥쳐올 공격시에 예상되는 기술상의 주요한 문제를 지적했다.
이를테면 미 태평양함대가 이제까지의 방식을 바꾸지 않는다고 한다면, 미 함대는
항내에서 두 줄로 정박하고 있을 것이며 그 경우 양쪽의 군함을 어뢰로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 게다가 함내는 좁고 두 줄로 선 바깥 쪽의 군함이라도 만의
대안(對岸)에서 48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며 그것도 뇌격 침로가 되는 그 대안 주변에는 고층건물이나 크레인 등
여러 가지 장애물이 있다는 점 등이었다.
그밖에도 진주만의 수심은 겨우 12m밖에 안 된다는 문제가 지적 되었다.
일본의 항공 어뢰는 침하 심도가 20m 이상이 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뇌격기에서 발사된 어뢰가 바다 밑의 진흙 속에 박히지 않도록 신형 어뢰를
개발해야 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공격의 주목표는 주력함이므로 그 두터운 장갑을
관통할 수 있는 폭탄이 새로 개발되고 동시에 그 것을 투하하는 적정고도가
테스트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일본의 기술자는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몰두했다.
전함의 장갑을 관통하는 폭탄 개발 쪽은 그다지 곤란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천해용(淺海用), 즉 낮은 수심에서 사용될 어뢰의 완성은 간단치가 않았다.
기술자들은 거의 쉴새없는 연구와 실험을 거쳐 가까스로 설계를 완성할 수 있었다.
설계대로라면 깊게 가라앉지 않도록 특수한 안정판을 장치한 것이며, 시속 250km
이하의 속도로 7.5에서 15m 의 고도로부터 발사되었을 때 80%의 효율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설계를 채용한다는 결정이 내려진 것은 시간적으로 절박한
단계에서였다. 생산은 9월 중순부터 시작되었으며 이 때문에 최초의 기동부대가 일본을
출발할 때까지는 신식 어뢰를 일부의 뇌격기밖에 장비 못하고 항공모함 아카기는
나머지를 장비하기 위해 11월 18일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 신형 어뢰를 싣고 아카기가
히토카프만으로 고속항진하여 겨우 다른 항모에 배분해 줄 수가 있었다.
진주만 공격부대의 맹훈련..... 진주만 공격부대의 착함 훈련.일본 해군의 뇌격, 수평폭격대의 상징인 나카지마 97식 3호 함상공격기(B5N2)가 항모 즈이가쿠와 착함 훈련중이다. 항모 측면으로 설치된 외현연돌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있다.
제1 항공함대 소속 97식 함상공격기가 전함 나가토에 훈련용 모의 어뢰를 투하하고있다.
한편 뇌격기 대원들의 훈련은 계속되고 있었다.
10월 중엔 해상에서의 이동목표 공격의 기본 훈련을 끝내고, 다음 단계는 정박중인 함정에
대한 천해용 어뢰공격의 응용훈련이었다. 대부분의 뇌격대원들은 이 새로운 훈련이
어떠한 의미로 실시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으며 심지어 바보스런 짓이라고도
생각했다. 왜냐 하면 정박함에 대한 공격은 실전에서도 별로 중요성이 없고 움직이는
목표에 대한 공격쪽이 명중시키기가 훨씬 어렵다는 명백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훈련 명령이 내려지고 나자 조종사들은 단번에 긴장했다.
이제까지 교육 받아 왔던 안전수칙을 완전히 무시하는 훈련이었기 때문이다.
가고시마 시내의 가옥 지붕들 위를 쏜쌀같이 저공으로 비행하여 야마가다 백화점을
지나면 비행 고도를 즉각 20m로 급강하시켜 시속 270km의 수평 비행으로 전환,
해안에서 겨우 480m 떨어진 목표에 모의 어뢰를 발사하라는 명령이었다.
시속 270km의 속도로 해면에 스치듯 저공비행한다는 것은, 극히 순간적인 실수라도
하게되면 바로 바다로 격돌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뢰를 발사한 뒤 급상승함과 동시에
우측으로 급선회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훈련에는 대담성과 세심한 조종술이 요구되었다.
매일 뇌격기의 맹훈련이 실시되었으며 가고시마 시민도 그 소음에는 익숙해졌다.
전 대원은 50회 이상의 비행훈련을 쌓았으나 회수로쳐서 수천번이라고 할 정도로
맹훈련이었으니만치 훈련중에는 역시 다소의 사고가 발생했음은 당연했다.
진주만 기습공격을 지휘하자면 제1급의 조종기술을 갖추고 거기에 남다른 지도력을
아울러 갖춘 숙련된 조종사가 필요했다. 겐다 중좌의 추천으로 그의 친구이며 해군병학교
동기인 후치다 미츠오 소좌가 기습공격대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29세 때 벌써 3000시간 이상의 비행시간을 보유했으며 중,일 전쟁의 경험자이기도
했다. 하늘을 나는 일을 무엇보다도 좋아 했으며 격무를 감내하며 선천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겐다는 우수한 1급 항공참모였다.
남의 어리석은 짓을 묵과할 수가 없고 자기보다 능력이 없는 자에게는 좌시하고만
있을 수 없는 격정의 성격이었다. 이에 비해 후치다는 부하를 잘 통솔하는 원만한
덕망가로서 이 두사람은 Z작전의 다시없는 양 날개였다.
후치다는 훗날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겐다가 각본을 쓰고 조종사들과 내가 그것을 연출했던 것이다."
진주만 기습의 각본은 촌각을 다투는 타이밍과 정밀한 정확성이 요구되었다.
또한 각 조종사들이 언제 어디서라도 그에게 요구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만 했으며 각자가 저마다의 공격 목표를 인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이 목적을 위해 10월이 저물 무렵 항모 아카기의 함내에 진주만과 그 주변의 지형을
나타낸 모형이 조립되었다. 겐다는 조종사들을 아카기에 집합시켜 준비한 모형을
보여주면서 진주만 기습계획을 비로소 알려 주었다. 그제서야 움직이지 않는 목표에 대한
공격 훈련에서 품었던 조종사들의 의문도 자연히 풀어진 것이다.
엄격한 비밀을 지키는 것이 작전 성공의 열쇠라고 다짐하고 나서 겐다는 조종사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을 기습계획의 개요를 설명했다. 그는 독특한 무표정과 단조로운
어조로 기습시의 두가지 가능성을 말했다.
한가지는 만일 기습에 성공한다면, 우선 뇌격기가 어뢰공격을 가하고 곧 뒤따라서
수평폭격기가 폭탄을 투하하며 마지막으로 급강하 폭격기가 맹폭격을 퍼붓되
뇌격, 수평 폭격에 의한 폭연을 이용하여 공격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가지는 만일 기습이 실패했을 경우 최초에 급강하 폭격기와 수평 폭격기가
강습을 가하고 이어서 전투기의 엄호아래 뇌격기대가 어뢰공격을 가한다는 것이다.
이 두가지 방법은 진입순서와 공격방법이 다르므로, 어느 쪽의 공격 방법을 취할
것인가는 오아후 섬에 접근하기 까지의 고도 3000m에서 공격 전개 이전에 결정해야
한다고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겐다의 이같은 설명을 들은 조종사들은
등골이 오싹하는 공포를 느꼈다고 한다.
후치다는 일본패망과 동시에 군복을 벗었으며 그때의 계급은 대좌였다. 1950년 고향에서 미국인 선교사의 감화로 기독교에 귀의한 이래 오사카 사카이 교회에서 장로로 봉직했다. 1972년 5월 1일 한국선교회의 초청을 받고 서울을 방문했다. 이날 조선호텔에서 있은 정부여당조찬기도회에 참석하여 36년간 일본인이 한국민에게 저지른 범죄를 진심으로 사과했다.
모든 작전은 준비완료...
11월 5일, 야마모토 연합함대 사령장관에게 대해령(大海令)제1호가 하달되었다.
1. 제국은 자존자위를 위해 12월 상순, 미국, 영국 및 네덜란드에 대하여 개전을 예상하고
제반 작전준비를 완수하기로 결정했음.
2. 연합함대 사령장관은 작전준비를 실시하라.
이로써 진주만 기습작전은 현실로 다가왔다. 남은 문제는 단 한가지,
결행의 시기를 언제로 잡을 것인가 하는 것 뿐이었다.
이 시기를 결정하기 위해 야마모토는 오타 함대 기상관을 불렀다.
오타는 12월 10일을 권했으며 이날은 달이 가리어지는 날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12월 10일은 하와이의 12월 9일인 화요일에 해당된다.
야마모토는 하와이의 태평양 함대가 언제나 월요일에 진주만을 출항하여 금요일에
훈련에서 귀항하는 스케쥴을 파악하고 있었다. 화요일이라면 진주만에 많은 함정은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공격 결행은 그날에 가장 가까운 일요일로 선택하게 되었다.
11월 5일, 도쿄에서 어전회의가 개최되어 이 자리에서 간단히 일본의 최후통고를 포함한
두가지 제안이 승인되었다. 그 제안은 노무라 주미 대사와 구르스 특명 대사에 의해
미 국무성에 전달하도록 했다. 그러나 참석자의 그 누구도 그것이 미국측에 수락되리라
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날 어전회의의 주요 목적은 일본의 개전 준비가 12월 초의
행동개시에 늦지 않겠는가의 검토에 있었던 것이다.
97식 함공과 전함 나가토가 실전과같은 훈련을 실시하며 진주만 공격을 준비했다. 1941년 10월 가고시마.
수심이 얕은 진주만에서의 공격에 대비하여 최대한 낮은 고도에서 어뢰를 투하하는 훈련중인 97식 함공
멀리후지산 부근 상공을 비행하는 항모 가가의 에이치 99식 11형 함상폭격기(D3A1).
99식 함폭은 급강하폭격으로 진주만의 미군함선들을 맹공격했다.
천천히 1차 공격을 위한 일본군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과연 진주만은...................
14편 기대해주세요 ^^;;
자료제공 : H/채널 (히스토리/20세기전쟁사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