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곧.... 진주만은...???
제 14편
이제 모든 것은 갖추어졌다.
11월 6일에는 작전의 마지막 무대연습이 규슈의 사헤게만에서 실시되었다.
6척의 항공모함과 항공기 350대가 모의 공격에 참가했으며 오아후 섬을 가정하여 320km
떨어진 목표를 겨냥했다. 이 훈련은 비교적 만족 스러웠으며 야마모토는 바빠서 참관하지
못했지만 공격은 훌륭했다고 하는 그의 축하 메시지가 함대에 전달되었다.
이틑날 나구모 중장은 야마모토 제독으로부터
"y날은 12월 8일인 일요일, 하와이 시간으로는 12월 7일로 결정한다.
기동부대는 엄중한 비밀 행동아래 11월 22일까지 히토카푸 만으로 집결하라"는
작전명령 제1호를 받았다.
나구모는 그때까지도 아직 이 작전에 회의적 이었으며 작전이 중지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기동부대의 각 함은 각각의 기지에서 행동 준비에 들어갔다.
작전에 꼭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 이외는 전부 하선시키고 온갖 공간은 예비 연료를
싣는 저장소가 되었다. 항공모함에도 비행갑판 이외의 빈 장소에는 드럼통이 산더미처럼
적재되었다. 요코스카 군항에 닻을 내리고 있었던 제1항공함대 기함 아카기에서
나구모 중장은 전투작전을 11월 20일까지 완료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11월 21일 후쿠도메 소장의 뒤를 이어 연합함대 참모장이 된 우가키 마도이는
기동함대의 신호사관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발신케 했다.
"거대한 함대가 진주만에 집결하고 있다.
우리 함대는 서전의 일격으로 이 함대를 괴멸시켜야 한다.
만일 z작전이 실패한다면 우리 해군은 두 번 다시 재기하지 못할 비참한 운명에 빠진다.
반대로 진주만 기습이 성공하면 워털루의 해전처럼 전국을 계속 유리하게 주도한다.
그러므로 제국해군은 성공을 기하기 위해 공격 목표를 군함과 항공기에 집중하고 있다.
미국의 거대한 중공업 사업은 즉시 군함, 항공기를 보강하기 위한 군수물자 생산으로
전환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인적자원이 동원되어 우리에게 대항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앞으로 몇 달이 걸릴 것이다. 만일 서전에서 적의 주요지점 전부를 일격에 격파함으로써
우리들이 우위에 선다면, 미국이 전력을 회복하기 이전에 다음 작전을 유리하게
전개할 수가 있을 것이다. 천우신조를 확신한다!"
관계자 전원은 이제 야마모토 장관이 예정한 시간대로 과업을 진행시켰다.
나구모가 지휘하는 제1항공함대가 출동하는 1주일 전인 11월 18일에서 20일에 걸쳐
세 그룹으로 나누어진 27척의 이호(伊號) 대형 잠수함이 구레 군항과 요코스카 군항의
기지에서 출항했다. 이 잠수함들은 진주만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오아후 섬 근처의
지정된 위치에 대기하도록 되어 있었다. 만일 나구모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고
미 해군 함정이 태평양상으로 도피한다면 잠수함은 이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만일 필요하다면 잠수함들은 하와이 수역에 남아 진주만을 봉쇄하고
미국 서해안에서 오는 보급 물자나 병력을 저지하는 임무도 수행해야 했다.
항모 아카기 비행 갑판에 주기된 156번기 a6m2 제로 센 21형 전투기 / 히토카프 만
기동부대의 출발을 은폐하기 위해 철저하게 기밀이 유지되었다.
11월 17일 나구모의 함대가 히토카프 만을 향하고 있을 무렵 워싱턴과 호놀룰루는
"일본의 항공모함은 대부분 구레 군항과 사세보 군항 지구에 있다"는 보고를 받고 있었다.
일본은 기동부대의 이동을 감추기 위하여 준비된 가짜 통신계획을 실행하여 일부러
무선 통신량을 증가시켰다. 또한 미군 무선첩보부를 혼란에 빠뜨릴 목적으로 함대의
호출부호도 변경시켰다. 이러한 교란 술책에 말려든 미군은 일본의 함대들이 일본 해역에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만 있을 뿐 사실상 일본 함대의 행방을 놓쳐 버린 실수를 저질렀다.
일본군은 되도록 이면 평상시 보다도 더 많은 장병들을 외출시켜 외국 스파이들로
하여금 대규모 병력의 이동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기만했다.
11월 17일의 늦은 오후 야마모토 장관은 아카기 함상에서 기동부대의 간부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행운을 빌었다. 그는 간단한 훈시를 통해 미국의 맹렬한 반격에 대비해야
한다고 경고한 다음 작전의 성공을 기대한다는 말로 간략한 고별사를 마쳤다.
그날밤 사헤끼 만에 집결하고 있었던 기동 함대는 등화관제를 실시한채 닻을 올리고
조용히 출항했다. 그 외의 함대는 각처의 항구에서 목적지로 합류하기 위해 출항했다.
모두 31척이 작전에 참가했으며 항공모함 6척, 전함 2척,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1척,
잠수함 3척, 구축함 9척 그리고 유조선 8척으로 다음과 같은 공격진용을 편성했다.
공습부대(나구모 주이치 중장)
항모 - 아카기, 가가(제1항공전대)
소류, 히류 -(제2항공전대)
즈이가쿠, 쇼가쿠 - (제5항공전대)
지원부대(미기와 군이치 중장)
전함 - 히에이, 기리시마(제3전대)
중순양함 - 도네, 씨쿠마(제8전대)
경계부대(오오모리 센타로 소장)
경순양함 - 아부쿠마(제1수뢰전대)
구축함 - 타니카제, 아라에, 카즈미, 카게로우, 시라누이, 아키구모, 하미카제,
우라카제, 이소카제(제17, 18구축대)
보급부대(오오후지 마사나오 대좌, 니이미 가즈다카 대좌)
유조선 8척.
3척의 잠수함은 한발 앞서 출항하고 나구모 함대의 경계역을 맡았으며
또 구축함 우시오와 아케보노는 진주만 기습과 때를 같이해서 미드웨이 섬의
미 공군기지를 파괴할 임무가 주어졌다.
전함 히에이
항모 소류
하와이 기습 공격부대는 11월 22일까지 츠시마 열도 에토로프섬의 히토카프 만에
집결했다. 츠시마 열도는 16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형성돼 있으며 안개 섬이라고도
불리우고 있었다. 언제나 안개가 끼어 있었기 때문이며 여행 안내지도에도 올라있지
않았다. 도쿄 북쪽 1600km에 위치하고 사나운 바다에 둘러 싸여 있었다. 사람이라고는
소수의 어부들이 살고 있을 뿐이었다.
히토카프 만은 하와이 공격부대의 은밀한 전진기지였던 셈이다.
이곳에서 사상 최강의 항모함대는 닻을 조용히 드리우고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11월 22일, 나구모 중장은 진주만의 모형이 있는 아카기 함대의 기밀실에 관계 참모들을
소집했다. 이 자리에는 최근 호놀룰루에서 갓 돌아온 스즈키 소좌도 있었다.
스즈키는 별로 새로운 정보를 갖고 온 것은 아니었지만, 참모들은 때가 때이니만치
그가 직접 수집한 보고자료를 주목했으며 그의 한마디 말이라도 놓치지 않으려 경청했다.
스즈키는 진주만에서의 주말 미 함대의 일반적인 관행을 소개한 다음 오아후 섬에 있는
비행장의 상태와 섬의 공군력을 자세히 설명했다. 나구모는 잠자코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나 스스키의 보고가 끝나자 그에게 질문을 집중하여 던졌다.
이것은 나구모가 오랫동안 걱정속에서 지내 왔다는 인상을 주었다.
오아후 섬으로 가는 도중 발각될 가능성은 없는가?
그 때 진주만에 함대가 없다는 염려는 없을까? 공격 뒤의 적의 반격은 어떤가.....?
이틑날인 11월 23일 아침,
기동부대의 전함장과 간부 장교들은 특별회의를 위해 기함 아카기에 소집되었다.
그중에는 아직 이번 계획을 통고받지 못한 장교도 있었고 또 개중에는 단순히 이번도
역시 연습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장교도 있었다. 그러한 환상은 나구모가 무엇을 위해
이와같은 전력이 히토카프 만에 집결하고 있는지를 설명함으로써 사라지고 말았다.
다만 나구모는 도쿄로부터의 최종 명령을 기다리는 중이며 틀림없이 진주만을
공격한다고 절대적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만일 워싱턴에서의 미묘한 교섭이 잘 되면 기동부대는 일본으로 되돌아가게 되고,
만일 교섭이 결렬되면 기습하게 된다는 계획이었다. 더 할데 없이 위험에 넘치는
작전이지만, 성공시키는 것이 일본의 전쟁 계획상 절대로 필요했다.
은신처 히토카프 만에 은밀히 집결한 진주만 기습 기동부대. 항모 가가의 모습이 보인다
진주만 기습 공격부대의 그 운명적인 출항은 11월 16일 잿빛으로 물든 여명에 시작 되었다.
함대가 닻을 내렸을 때에도 진주만 기습 결행은 아직 미정이었으나 전쟁으로 돌입하는
최종적 결정은 이 날로 내려졌다. 야마모토 연합함대 사령장관은 24시간 전에 그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워싱턴 주재 구르스 특사와 노무라 대사는 11월 20일 헐 장관에게
일본의 최종 제안을 제시했다. 내용인 즉,
만일 일본이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원료자원과 석유를 자유롭게 획득하는 조치와
미국이 석유 수출을 재개할 것을 보증한다면 일본은 남부 인도차이나에서 철군한다.
다만 일본군은 북부 인도차이나와 중국에는 계속 주둔하고 그밖의 동남아 지역을
중립지대로 간주한다는 제안 이었다. 일본의 제안에 따른다면 미국은 장개석군에 대한
지원을 중지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헐 장관은 이에대한 회답으로 이른바 헐 노트를
전달했는데, 석유 금수조치를 해제하는 조건은 일본이 인도차이나를 비롯하여
중국에서도 완전히 철수하라는 것이었다.
12월 1일 어전회의에서는 개전으로 치닫는 중대한 결정이 내려지고 있었다.
천황으로서도 전쟁의 가부 보다는 언제 개전할 것인가 하는 시기의 문제에 직면했다.
이토오 군령부 차장이 천황에게 "공격개시 때까지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싶지 않습니다.
기습적인 제1격의 효과를 최대한 올리기 위해서입니다." 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여러 안이 오가는 토론이 벌어졌다.
미국에게 1시간 30분의 시간을 주고 외교 관계를 단절하자는 안이 유일한 듯 했으나
한 시간 반의 여유는 너무 길어 위험하므로 좀더 단축시켜야 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마지막으로 워싱턴에 있어서의 선전포고와 진주만 공격과의 사이는 적어도 30분간이
아니어서는 안된다고 결정되었다. 천황은 이같은 결정을 받아들이는 조서에 서명했다.
정확한 시간은 1941년 12월 1일 오후 4시 20분이었다.
하와이를 향해 항진하는 기동부대.
기함인 항모 아카기의 뒤를 따라 항모 가가와 쇼가쿠가 항진하고있다.
아카기의 비행갑판에 97식 함상 공격기가 주기되어있다.
1941년 12월 2일 이날은 나구모의 기동부대가 출항한 지 7일이 경과된 날이다.
평온한 항해였다. 흐림, 미풍, 시계불량으로 기습공격자 에게 있어서 날씨는 오히려
이상적이었다. 순항 속도는 가장 느린 유조선 정도인 20노트(시속 22km)로 유지 되었다.
기동부대는 전함 기리시마, 히에이를 거느리고 두 개의 종진을 이루며 항진했다.
중순양함 도네, 씨쿠마는 양측으로 각각 수km 떨어진 해상에서 경계활동을 하며 항진했다.
무선 탐지를 불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무선송신기는 전면 봉쇄되고 각 함 사이의 연락은
수신호와 발광신호로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무선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만한 대함대의 조정을 무전없이 순조롭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었다.
일본으로부터의 단파는 대형함에 의해 수신되었지만, 소형함 특히 잠수함에 대해서는
수신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나구모 제1항공함대의
신호 장교는 한 가지 방법을 고안해냈다.
단파의 고주파신호를 항공모함 하나가 수신하면 저주파로 변경시켜 소형함에
송신한다는 것이었는데 이 방법은 완전히 성공하게 된다.
미국의 무선 방수장치는 저주파 신호를 잡을 수 있도록 되어 있지가 않았다.
그러나 예기치않은 사건이 하나 있었다.
11월 29일 기선 로라인 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하와이의 호놀룰루를 향해 항해중이었고,
하와이까지 사흘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이 배의 이등 항해사는 아주 감도가 좋은
무선장치를 가지고 장난을 하고 있다가 희미한 신호를 방수했지만,
그 정체는 알아낼 수가 없었다.
항해사는 이 이상한 신호를 며칠동안 추적했다.
그러나 항해사도 선장도 그 정체를 알아내지는 못했으나 단지 직감 적으로 누구인지는
모르나 그 행동을 숨기려 하고 있는 비밀 송신이라고만 느꼈다. 그들은 결국 하와이를
향해 은밀히 항해하고 있는 신기루같은 함대의 신호를 포착했다고 결론 내렸다.
그 희미한 신호의 정체에 대해서는 결국 미 해군당국에 문의해 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따라 호놀룰루에 입항한 다음, 미 해군에 보고했다.
그러나 미 해군은 그밖의 다른 정보와 함께 이 보고를 무시해 버렸다.
함대가 하와이에 가까워질수록 강풍과 파도가 사나와져 미군에게 발각될 위험이 줄었다.
어느 수병이 갑판에서 파도에 휩쓸려 바다에 떨어졌지만, 구출하려 멈추지 않고 계속
항진했다. 강풍과 거친 파도, 짙은 안개 속에서 계속 항진하는 동안 갑판 아래의
조종사들은 해도를 들여다보며 기습 목표의 모형을 연구하거나 쉬고 있었다.
도쿄를 경유하여 몇 시간마다 보*는 호놀룰루 영사관이 수집한 스파이들의 정보는
진주만에 있어서의 최신 정보를 알려왔다. 무선실에는 하와이 방송을 계속 듣고 있었는데
함대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한 듯 한가롭게 평상시의 정규 프로그램을 방송하고 있었다.
미국내 일본인과 일본내 미국인을 상호 교환 철수시키기로 양국이 합의 한 대로
호화 여객선 다스다 마루가 12월 2일에 요코하마 항을 출발하여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항진했다. 다스다마루는 12월 14일에 미국에 도착 할 예정이었다.
선장에게는 12월 7일 밤에 뜯어보라며 밀봉된 편지가 한통 전달되었는데 그 내용은
무선 연락이 단절되면 즉시 일본으로 되돌아 오라는 명령이었다. 일본 언론에서는
다스다마루의 출항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고, 미국은 일본이 얼마동안은 아무런 짓을
저지르지 않으려는 모양인 것으로 생각했다. 또 일본 군대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집결하고 있다는 보도역시 미국의 눈을 하와이로부터 돌리게 만든 역할을했다.
일본 시간으로 12월 2일 오후 5시 30분,
야마모토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부터 온 전문을 받아든 나구모 기동부대 사령관은
공격이 취소되지나 않을까하는 가냘픈 기대를 해보았으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암호문은 니히다까야마 노보레 - "니다카 산(薪高山)에 오르라! 1208 이었다.
1208이란 숫자는 개전시기가 일본 시간으로서 12월 8일로 정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호놀룰루에서는 일본인 스파이 요시카와 다케오의 지도를 받은 독일인 스파이
오토 케헨이 자신의 신호 시스템을 점검 중이었으며 일본 총영사관에서는
관계 서류들을 소각하고 있었다.
기습공격을 은폐하기 위한 술수에 사용된 다스다마루.
다스다마루는 1941년 12월 미,일 양국 철수민의 교환배로서 진주만 공격부대가
북쪽항로로 하와이로 향하는 동안 통상 항로를 따라 태평양을 항해한다
공격 개시일을 전달받은 기동부대 전체가 긴장의 절정에 놓여졌다.
함대는 미드웨이 섬 부근을 통과할 예정 이었고, 미국 초계정에 발견될 염려가 가장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좋게도 발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수병이나 조종사들은
기습 공격의 마지막 점검을 서둘렀다.
나구모의 기동부대가 먼저 출발시킨 잠수함대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항공모함으로부터
공격기를 발진시킬 위치까지 아직도 43시간의 거리에 있었다. 27척의 잠수함은 진주만
주변의 예정 위치에 대기하기 위해 사나운 파도와 싸우며 난항을 거듭하고 있었다.
5척의 특수잠항정 승무원들은 진주만 깊숙이 잠입할 결사적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구모는 일본시간으로 12월 6일 한밤중에 함수를 되 돌릴 수 없는 지점에 까지 도달했다.
워싱턴에서의 교섭이 성공했을 경우 함대는 되 돌아가기로 되어 있었으나, 그것과는
별도로 만일 12월 6일 이전에 탐지당했을 경우에도 공격을 중지하도록 지시받고 있었다.
함대는 탐지당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미군기의 모습도 보지 못했고, 잠수함대와 구축함대도 적함을 발견하지 못했다.
정보 기관으로부터도 탐지당했다는 보고도 없었고 호놀룰루 방송은 흥겨운 음악을
전파에실어 보내고 있었다.
나구모는 오직 미국 항공모함의 소재에 대하여 부심하고 있었다.
애당초 야마모토 제독은 진주만에서 항모 6척까지를 격파하게 될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11월 중순이 되어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요크타운, 호넷트, 렉싱턴, 엔터프라이즈 등
항모 4척이 하와이를 기지로 삼고 있으며, 사라토가도 추가로 참가하기로 되어있다는
것이었다. 나구모에게 전달된 정보로는 사라토가는 아직 미국 서해안의 어딘가에 있고,
요크타운과 호넷트는 대서양으로 전출되었는지 분명치 않았기 때문에 진주만에는 4척,
또는 그 가운데 한 척이 훈련에 나가있다 하더라도 적어도 3척은 정박해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5일, 하와이의 스파이 요시카와가 보내온 보고에 의하면 진주만에는
미국 항공모함이 한 척도 없다는 것이었다.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어쩌면 일본 함대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12월 7일(일본 시각), 기습 함대는 충분한 급유를 받았고, 유조선은 공격 후의
합류지점으로 돌아갔다. 한편 요시카와는 정보활동을 계속했으며 이날 아침 도쿄 방송은
요시키와가 막 수집한 진주만에 관한 따끈따끈한 정보를 알렸다. 이에 의하면 전함 7척,
순양함 7척은 입항하고 있지만 항모는 한 척도 없었다. 전함 가운데 5척은 1주일 동안
정박하고 나머지 2척은 하루전에 갓 돌아온 직후였다. 주말이었으므로 모든 전함은 9일인
월요일까지 출항할 징조는 없어 보였다. 같은 이유로 5척의 중순양함을 대동하고
일본시간으로 6일에 하와이를 떠났던 항모 렉싱턴도 곧 귀항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러나 일주일 전에 출항하고 있었던 항모 엔터프라이즈의 호위 순양함은 갓 입항 했었다.
따라서 기습 예정일에 그 항모가 돌아올 가능성은 매우 컸다.
요크타운과 호넷트에 관해서는 정보가 없었다.
7일 오후 9시 요시키와가 마지막 정보를 알렸을 때의 정세는 다음과 같다.
"하와이 오후 6시 현재 정박중인 함정은 다음과 같음.
전함 9척, 경순양함 3척, 수상기모함 3척, 구축함 17척, 도크에 들어간 경순양함 4척,
구축함 3척. 항모 및 중순양함은 모두 해상에 나가있음."
킴멜 미 태평양 함대 사령관은 여느때와 다름없이 주말에 휘하의 함대 대부분을
입항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항공모함만이 행방불명이었다. 나구모는 엔터프라이즈가
오아후 섬 근처에 있었던 것을 모르고 있었다 (엔터프라이즈의 함재기 몇 대가 7일
포드 섬으로 비행하여 이튿날 아침 일본측에 포착된다).
항모 즈이가쿠의 뒤를 이어 항진하는 가가와 아카기
7일 정오를 지나서 함대가 공격편대 출격 지점에서 800km쯤 떨어진 곳에 도달했을 때,
함대원 전원이 갑판에 집합했다. 장교와 수병들은 긴장된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는 가운데
일본 천황의 선전조칙(宣戰詔勅)이 방송되었다.
그 뒤를 이어 야마모토 연합함대 사령장관의 훈시가 들려졌다.
"황국의 흥폐는 이 일전에 달려있다. 각자 더욱 분발 노력하라."
도고 원수가 36년 전, 대한해협(일본놈들은 쓰시마 해협이라 부름)에서 전함 미가사에
게양했던 z가 기함 아카기의 마스트에 휘날렸다.
함대는 진로를 남쪽을 향해 기습출격지점으로 접근해 갔다.
여기서 탐지당하면 중대한 과실을 범하게 되므로 이후 부터는 숨막히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또다시 일본을 편들어주는 듯했다.
미국 초계정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몇 시간 뒤에는 어둠이 함대를 감싸주는 가운데
고조된 긴장은 점차 사라져 갔다.
드디어 출정이다!!
제 15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