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해전 - 발틱함대의 침몰

슈퍼스탈리온 작성일 09.05.28 22:4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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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해전  - 발틱함대의 침몰

 

   러시아와 일본의 강화 회의 개최의 여부가 불확실한 가운데 1905년 5월 말 대마도 부근에서 러시아와 일본의 대해전이 벌어졌다. 

   1905년 1월 초 발트 함대는 마다가스카르 섬의 서쪽에 위치한 작은 섬인 노시베 섬에 기항하였는데 이 곳에 머무는 동안 여순 요새가 함락되었다는 비보를 들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는 데에는 4개의 항로가 있었다. 첫 번째 항로는 대한 해협, 둘째는 대마도 해협, 셋째는 일본 혼슈우(本州)와 북해도 사이의 쓰가루(津輕) 해협, 넷째는 북해도와 사할린 사이의 소오야(宗谷) 해협을 통과하는 것이었다.  일본 해군의 주력이 대만 부근에 있을 것이라 예상한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최단 항로인 대한해협을 통과하기로 하였다.

일본 해군도 발트 함대가 어디를 통과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였다. 소오야 해협 아니면 대한해협으로 보았는데, 참모들 다수는 소오야 해협으로 예상하고 있었으나,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八平郞) 제독은 발트 함대가 대한해협을 통과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

 

   5월 17일 발트 함대는 반퐁 항에서 출발하였다. 25일 발트 함대는 속력을 늦추고 무전도 끊은 채 북상을 계속하였다. 2만 8800km에 달하는 장거리를 항해해 온 발트 함대는 지쳐 전투력이 크게 떨어진 상태였다. 전투를 피하기로 결정한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함정의 탐조등을 끄게 하고 항해하였다.

1905년 5월 27일. 총 38척의 발틱함대가 쓰시마해협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27일 오전 2시 45분 경 일본 순양함「시나노마루(信濃丸)」는 발트 함대 병원선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포착하였다.    
 사령관 로제스트벤스키는 함대 최선봉의 수바로프호에 타고 각 함대를 종렬진으로 편성하여 지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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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5월 27일 새벽, 쓰시마해협 남쪽에서 활동중이던 일본의 가장(假裝) 순양함 ‘신농환’에서 ‘적함 발견’이란 무선전보가 전파에 실렸다.

 진해만에서 도고 해군 대장의 지휘하에 대기중이던 일본 연합함대는 ‘적함 발견’이란 무선전보를 접수하고 즉각 전투태세로 돌입하여 발틱함대를 기다렸다. 정오 무렵, 드디어 러시아와 일본의 해군 주력이 조우하게 되어 세기적 해전이 시작되었다.

 

27일 새벽 1시 55분 기함 미카사(三笠)에서 도고 사령관은
“제국의 운명이 이 전투에 달려있다. 모든 병사들은 최선을 다하라”는 의미의 “Z" 신호기를 게양했다. 새벽 2시 2분 도고 제독은 남서쪽으로 자신의 항진을 고정시키고 적을 향해 진격했다. 적 함대까지의 거리가 8km에 접근할 때까지 3분간 항진한 뒤 2시 5분 도고 사령관은 자신의 함대에게 항로를 180도로 줄줄이 바꾸도록 명령했다. 소위 ”도고의 회전“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2열 종렬진으로 항해중이던 러시아 발틱함대에 맞서, 한국 진해만에서 남하한 일본함대는T자형 전법으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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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함대의 항로변경을 이용하기 위해 러시아의 로제스트벤스키 사령관은 발포를 명령했다. 2시 10분 러시아 함대와의 거리를 6.4km로 좁힌 후 도고 사령관도 발포를 명령했고, 치열한 소위 쓰시마 해전이 시작되었다.
 12척의 일본 전함들은 완전히 180도 회전하여 도고의 미카사 기함을 선두로 직선의 전투대형을 갖추었다. 일본의 함대는 우현에서 러시아 함대를 공격했으며 러시아 함대는 선두의 미카사함에 공격을 집중시켰다.

전투 시작 1 시간 뒤인 3시 10분 경 러시아의 전함 오실라비야가 일본의 집중 공격을 받아 화염에 휩싸였고 로제스트벤스키 사령관의 기함 수보로프도 화염에 싸여 대열에서 이탈했다. 다섯 시간의 전투 후 러시아는 네 척의 주력함을 잃었다

수바로프호는 진로를 가로막고 함대의 앞과 뒤의 발포로 쉴새없이 공격해 오는 연합함대의 함포사격을 견디지 못하고 크게 파손되고 말았다.
  그 전함에 타고 있던 함대 사령관 로제스트벤스키도 중상을 입어 의식불명의 상태에 빠지고, 급기야는 전함 자체도 침몰하게 되어 승무원 900명이 한 사람의 생존자도 없이 수장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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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선을 제압한 연합함대의 끈질긴 공격에 오슬리아비아호, 알렉산더호, 보로디노호 등 발틱함대의 주력이 속속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1905년 5월 27일, 28일 이틀간의 해전에서 발트 함대는 대한해협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였다. 38척의 러시아 군함 가운데 19척이 격침되었다.

그 가운데 주력전함 6척과 순양함 3척이 포함되었다. 항복 후 포획된 함정은 전함 2척을 포함하여 모두 7척이었다. 순양함 1척과 구축함 2척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였다. 함대 대형 후방에 있던 순양함 3척은 도주하여 6월 초순 필리핀의 마닐라 항으로 들어갔다.

기타 보조선박 수척이 중국의 상하이 등지로 도주하였다. 4800명의 장교와 사병이 전사했고 6천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 반면에 일본 해군의 손실은 3척의 어뢰정과 전사자 117명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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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일본 연합함대는 러시아 발트 함대에 비해 몇 가지 우월한 점이 있었다. 우선 영일 동맹 체결 후 일본 해군은 그 편제와 훈련법 등 해군 운용의 전반에 관하여 영국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
 일본 연합함대의 신형 전함들은 대부분 영국에서 발주한 것이고 그 운용법도 영국 해군 군사고문단에 의해 전수받아 일본 해군 승무원의 숙련도는 당시 세계최강의 영국 해군에 필적할 정도로 우수하였다.

   또한 러시아 해군이 모르는 기발한 사격지휘법이 있었다. 당시 함대 간 포격은 발사명령이 나면 군함들이 각자 사격을 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 방식으로는 동시에 발사된 수십 발의 포탄이 일으키는 물기둥으로 인하여 자신이 쏜 포탄의 탄착 지점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일본 해군은 구경별로 다른 색의 화염을 일으키는 포탄을 쏘았다. 그리고 사격도 포대의 포수 임의로 하는 것이 아니라 포술장의 지휘 아래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이 방식은 훗날 1차 세계대전에서 일반화되었지만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사고였다. 그리고 포 구경은 작았지만 신형속사포를 많이 장비하여 분당 발사 수에서 우위를 차지하였다.

 여기서, 쓰시마 해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바로 무선으로 전해진 전보였다. ‘적함 발견’이라는 그 전보가 없었다면 쓰시마 해전은 물론 러·일전쟁의 승패와, 세계 역사의 전개 방향도 변화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정찰중에 러시아 발틱함대의 이동을 최초로 발견한 가장 순양함 ‘신농환’이 ‘적함 발견’이라는 무선전신을 거문도의 무선중계소로 보냈고, 거문도 무선중계소에서는 이 전보를 ‘엄도’로 중계했다. 이어 ‘엄도’에서는 진해만 해군기지에 대기하고 있던 일본 연합함대로 전보를 보냈고, 연합함대에서는 그 정보에 따라 신속하게 작전을 전개할 수 있었다.

  반면 러시아의 발틱함대도 본국을 출발하기 전 독일 텔레푼겐사의 무선전신기를 구입하여 설치하고 독일인 기사를 태웠다. 그러나 독일인 기사는  군대 규율에 반발하여 마다가스카르섬에서 배를 내려 버렸다.

 이후 일절 무선통신을 하지 못한 러시아 발틱함대는, 일본함대에게 집중 포화를 받으면서도 구조요청을 보낼 수 없었다.  그러나 일본은 신속한 무신통신망을 이용하여 함대를 전쟁터에 효율적으로 투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료제공 : 두산백과사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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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 히 잠 드 소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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