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 군대에 PC방도 생기고, 노래방도 생기고 여러가지 형태의 '여가활용공간'이 많이 생겼지만, 내가 상병이 되기 전까지 PC방은 그저 '먼나라 이웃나라 얘기' 처럼 상상의 공간 이었고, 노래방의 경우 최신곡 목록에 HOT의 '캔디'가 있는 노래방 기계가 정비고 한쪽 구석에 '방치' 되어 있었다. (당시는 HOT가 해체된 후 한참 뒤였다)
어디 마을회관에서 보수작업하고 얻어온 듯 보이는 그 기계는 가끔 화면이 안나오고, 음향시설이라고 해봐야 마이크가 고장나서 그냥 폼으로 들고 노래하는 거였지만, 그래도 노래 하나 부를 수 있다는 사실에 그 마저도 짬이 되야 이용할 수 있는 '특급 노래방' 이었다. (짬이 어중간한 고참들은 소대에 배치된 통기타를 틀고 소대 뒷편에 나가 '바위섬' 같은 노래를 조용히 불렀다)
이런 상황에거 군인에게 유일한 '즐길거리'는 '축구'였다. 가끔 농구를 하자는 부류가 있기는 했지만, 울퉁불퉁한 연병장에서 높이가 다른 두 골대에 공을 집어 넣는 게임을, 난 농구라기 보단 '미식축구'라고 부르고 싶다. 더군다나 우리 부대는 농구골대 옆쪽으로 오물장이 있어, 땀을 흘리고 나면 그 땀에 하루살이들이 수백마리씩 붙어 있는 '세상에 이런일이' 같은 풍경을 연출했다.
친구나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물론 이 '축구'는 왕고의 성향에 따라 바뀐다. 그 소대의 왕고가 족구를 좋아할 경우, 그 고참이 전역하기 전까지는 무조건 족구만 한다. 야구의 경우 물품이 없는 까닭에 왕고가 야구를 좋아 하더라도 야구를 하긴 힘들지만, 고참이 '투수'였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내 동기의 경우, 공을 잘 받는 다는 이유로 일병시절 내내 소대 옆쪽에서 고참이 던지는 테니스공을 포수처럼 받아야 했다. 물론, 타자도 없이 말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축구'다. 초등학교 때 부터 체육시간이면 축구를 하는 경험이 많지 않은가. 더군다나 부대에서는 소대별, 중대별, 대대별 축구시합을 마련해 포상휴가를 걸기도 하니, 군인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축구공을 들고 연병장으로 뛰어 나가는 거다.
고참이 "다 나와라 축구하게" 라는 이야기를 했다면, 가이들은 무슨 급박한 상황이 있건, 무조건 연병장으로 달려 나가야 한다. 몸이 안좋거나 편지를 쓸 예정이라고 해도 일단 나가서 편을 짤 때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내고 들어와야 한다. 소대 문을 열고 나오라는 고참에게, 침상에 앉아 '전 그냥 소대에서 편지쓰겠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꺼낼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 지는 직접 체험해 보길 바란다.
2. 포지션은 짬 순으로
축구를 아주 잘해 눈에 띄는 경우 가끔 고참들의 '공격'을 돕기 위해 공격진영으로 나가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냥 평범하게 축구를 하는 경우라면? 당연히 '수비'를 해야 한다. 어느 포지션을 맡아야 효과적이고 그런거 없다. 군대축구란 무조건, 공격을 하는 고참들에게 공을 제대로 연결해 주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이 수비가 쉬운 일이 아니다. 반대로 생각해서, 상대방 공격들 역시 같은 소대나 중대의 고참들이다. 중대가 달라 서로 '아저씨'의 개념일경우 별 문제가 안되지만, 같은 소대나 같은 중대의 고참들을 열정적으로 막으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공을 빼냈다고 하더라도 분명 그 고참의 기분이 좋진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 일이 번번히 일어나 계속 당신에게 그 고참이 공을 빼앗기면 그 고참은 이미 당신에 대해 악감정을 가지게 되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설렁설렁 그냥 유야무야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잡고, 뭐 이런 자세로 축구에 임하면 같은 편 고참들의 '따뜻한 관심'을 받게 될 것이니,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까?
센스가 필요하다. 대충 우리편이 이기고 있는 게임이라면, 상대 공격수 고참이 공을 몰고 올 때 좀 설렁설렁 하게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우리편이 지고 있는 게임이라면, 온 힘을 다해 막아라. 그 고참과 몸싸움을 하면, 나중에 그 고참이 따로 불러서 뭔가를 이야기 하려 할 수도 있지만, 우리편에 그 고참보다 짬이 더 되는 고참이 있다면, 그분께서 커버해 주실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그 공격을 막은 당신은 히어로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또 한가지, 공격해 오는 고참이 승부에 별로 연연하지 않으며, 평소 후임들을 잘 갈구지 않는 고참이라면 정면승부를 해 보는 것도 바람직하다. 하지만, 악명높은 고참이며, 악랄한 갈굼으로 유명한 고참이라면, 당신이 굳이 최선을 다해 막지 않아도 대부분의 고참들은 이해해 줄 것이다.
이것은 상황에 따라, 그리고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이야기니, 위의 상황을 참고로 자신의 상황에 맞는 센스있는 대응이 필요하다. 이미 군생활 매뉴얼 정독으로 어느정도 분위기를 파악한 '입영대기자'라면, 분명 적절한 대응으로 축구 때문에 갈굼을 당하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3. 축구얘기를 하는 근본적인 원인
위에서 말한 사례들을 살펴본 결과, 군대 축구에서 '골을 넣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병장이다. 골키퍼라는 포지션을 좋아해 골키퍼를 하는 병장을 본 적은 있어도, 스스로 공격대신 수비를 택하는 병장은 내 군생활 중에 본 적이 없다. (물론, 소대, 중대별 축구나 대대별 축구의 경우는 무조건 이겨야 포상휴가가 있기 때문에 실력파가 공격위주로 배치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골을 넣는 영광의 순간을 가장 많이 차지하는 것은 병장들이다. 우리 부대에는 팔에 깁스를 하고도 몇 골씩 넣는 병장도 있었다. 짬이 되기 전까진 항상 수비를 보다가 고참급이 되어 공격에 나간 상황, 축구에 아주 소질이 없지 않는 이상 나처럼 오프사이드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도 몇 골씩 넣을 수 있다는 얘기다.
정말 축구를 잘해서 축구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병장시절의 그 자신감으로, 후임이 눈치를 보다가 피해준 것도 모른 채, 밖에 나와서는 '군대 있을때 스트라이커였어' 라는 슛돌이 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간혹 그 자신감에 전역 후 '조기축구회'에 나갔다가, 예비역들에게 캐발살 난 후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 '난 축구 잘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주변 예비역들이 하는 축구얘길 듣다보면 알겠지만, 몇 명을 뚫고 찬 공이 그물을 갈랐다는, 혹은 항상 축구시합 때 마다 몇 골씩 넣었다는 이야기가 대부분 일 것이다. 우리끼리니까 그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좀 알려주자면, '중대 대표' 정도의 실력이면 잘하는 것 맞다. 짬으로 어떻게든 끼워 들 수 있겠지만, 계급이 전혀 상관없는 중대 대표로 나가 상대 중대와의 경기에서 골을 기록했다면, '슛돌이'로 임명해 줄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소대 내에서 축구를 한 이야기를 근거로 '나 슛돌이'라고 하는 예비역이 있다면, 그냥 '안습'이라고 생각하며, 조기 축구회에 나가볼 것을 조용히 권유해 주는 것이 좋다.
예비역들에겐 정말 많은 '축구얘기'가 나올 것이다. 비오는 날 벌인 수중전의 경험은 꼭 하나씩은 가지고 있을 것이고, 도저히 축구를 할 수 없는 곳에서도 축구를 한 이야기도 있을 것이다. 여전히 여성분들에겐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가 재미없을지 모르겠지만, 위와 같은 내용을 알고 듣는다면, 조금은 재미있어 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번외편 메뉴얼을 작성해 봤다.
다음편은 아마 '동반입대'에 대한 매뉴얼이 될 것 같다. 동반입대시 겪었던 예비역님들의 이야기를 댓글로 들려주신다면, 다음편에 소개해 드리며, 댓글로 남겨주시는 의견들이 이제 막 '동반입대'를 생각하고 있는 가이들에게도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