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필자는 비무장 지대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민통선 안에 김신초 침투로를 견학하게 되었는데 다음의 사진들은 현재는 목사가 된 김신조의 직접 고증하여 만든 밀랍 인형들로 재현 해 놓은 것들입니다. 들고 있는 소총이 AK소총으로 되어 있는 등 부분적으로는 잘못된 것도 있지만 그래도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전시물이란 생각이 들어서 카메라에 담아봤습니다.
유독 필자가 1968년 북괴 124 특수군 소속의 청와대 기습공비들에게 관심을 갖고 이렇게 글을 쓰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필자의 아버님이 당시 청와대 경호실 소속으로서 사건 당일 바로 청와대내에서 근무를 서고 있었기에 그 어떤 자료보다 생생한 당시 상황을 직접 전해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진설명 : 김신조를 포함한 북괴 무장공비 침투 모형 인형
사진 설명 : 남방 한계선 철책선 밑을 통과하는 무장공비의 모습이 당시의 현장감을 더해준다. 이 위치는 김신조씨가 직접 지정한 장소이다.
사진설명 : 광각앵글로 잡아본 철책선을 통과하는 모습의 모형
사진설명 : 사건개요를 설명하는 안내판
사진설명 : 북괴 1.21무장공비 침투로 설명 안내판 .
참고로 말한다면 당시 서부전선은 미군 2사단이 철책선을 담당하였는데 그 경계근무가 매우 허술하였다고 합니다. 김신조일당의 침투로를 보면 미군 2사단이 담당하는 비무장지대와 남방한계선을 넘어서 왔는데, 그 후 침투로는 미2사단과 한국 25사단의 경계로를 따라서 침투하였다는 것입니다. 보통 부대와 부대의 경계가 일반적으로 적이 노리는 취약지점이지요.
또한 한편으로는 아군 복장이었기 때문에 미군의 의심을 회피할 수 있었기도 합니다. 어쨌든 김신조일당의 청와대 습격조는 아주 유유히 휴전선을 넘어서 서울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 후 미군경계지역을 벗어나서 검문다운 검문을 한 것이 바로 세검정에서 당시 종로경찰서장이시던 최 규식 총경이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아버님으로 부터 직접 들은 내용을 전해 드립니다.1968년1월 21일 당시 저의 아버님은 청와대 경호실에 근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들은 바 그대로 옮겨봅니다.
그림 : 순직한 종로 경찰서장 故 최규식총경
김신조 일당이 최규식 총장을 총격하고 그곳에서 총격전이 벌어 졌습니다. 물론 그 전에 신고가 접수되어서 우리의 군경이 대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대가 북괴 특수 침투요원이라고는 상상도 못하였던 상황이었습니다.
68년 1월21일 저녁 7~8시경이었습니다. 당시 기온은 영하 20도를 헤아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최규식 총경의 검문에 막힌 김신조일당의 총격으로 콩볶는 듯한 소리가 효자동 세검정 그리고 청와대까지 들렸습니다. 우리의 군경과 북괴침투조간의 격렬한 총격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상황실에는 청와대 외곽 경비초소로부터 다급하면서도 지원을 요청하는 경비전화가 빗발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일부 외곽 초소경비요원은 거의 울음 썩인 목소리로 긴급지원(실탄등) 을 요청하는 그런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계속 다급한 지원요청은 들어오고 총격전의 소리는 더더욱 커지는 상황에서 당시 저의 아버님은 경비대 본부에서 근무를 하고 계셨습니다. 따라서 당시 상황을 그 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고 지금도 당시 말씀을 하실때는 마치 당시로 돌아가서 서 있는듯 생생하게 말씀하십니다
그중에서도 박대통령의 모습은 지금도 너무나도 생생하다고 하십니다. 무선과 유선으로 날라오는 상황에 대해서 박대통령께서는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진두지휘를 하셨다고 합니다. 당시 김신조를 포함한 북괴 특수부대를 최규식 총경보다 먼저 조우한 사람은 서대문경찰서장 이었습니다. 소속을 묻자 특수수부대훈련 마치고 귀대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바람에 의심을 가지면서도 그냥 통과 시키고 말았습니다. 물론 아무래도 미심쩍으니까 서대문 경찰서장은 뒤따라가면서 무전을 날렸습니다.
사진설명 : 기자회견중인 김신조. ( 김신조씨는 스스로는 생포된 것이 아니라 투항한 것이라고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바 있다. 현재는 목사로 목회활동중이다)
"미상의 부대 이동중, 재 검문요망"
이 무전은 바로 당시 중앙 정보부에 잡혔습니다. 그래서 중앙정보부에선 바로 종로 경찰서에 알렸고 그래서 최규식 총경은 부관과 함께 "빽차(당시 경찰차는 새하얀 백색의 찦)" 를 타고 자하문 밖 세검정으로 달려 간 것입니다. 허리에 권총만 찬 총경이 북괴 특수부대를 가로 막고 검문을 하였습니다.
"소속을 말하시오"
"방첩부대야! 저리 비켜" (서대문경찰서장을 따돌리는 수법)
"난 종로서장이요. 소속을 확인해야 합니다. "
바로 그때 세검정 고개길로 77번 시내버스가 헤드라이트를 키고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김신조를 포함한 북괴특수부대원들은 77번 시내버스를 최규식총경을 지원하러오는 지원부대인 줄 착각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총격을 한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시내버스라는 것을 알았다면 최규식총경 (부관,운전병)일행을 무혈 진압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후 김신조 일당을 잡은 군경은 승진과 포상을 받았지만 제일 처음 김신조일당과 조우하였으나 미처 검거치 못하고 놓친 서대문서는 그 어떤 포상도 못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 서대문서장의 자조섞인 말도 있었다고 합니다.
"죽은 총경보다 산 순경이 낫지 않은가?"
어째든 그 후 김신조 외에 1명을 더 생포 했습니다만 그 한명은 후송중에 자폭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한국은 대테러전까지 가미한 국가안보체제를 형성하였습니다. 분명 121사태(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는 국가의 심장부를 노린 테러였고 또 그 테러의 여파는 대한민국을 변화시켰습니다.
대테러전 능력까지 겸비하게 된 대한민국을 보고 당시 김일성은 통탄해마지 않았습니다.
"앗 뿔사! 내가 실수 했구만"
바로 김일성이가 박대통령이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상대를 잘못 고른 결과입니다.
< 출처 : 야후 - 비겐 (viggen) 님 블로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