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빛나는 전공 6사단 청성부대...

음냐z 작성일 09.06.25 22:05:37
댓글 6조회 1,968추천 4

124593497316685.jpg

- 제 6 보병사단 연혁

  제 6 보병사단은 서기 1948년 4월 29일 국방부 일반명령(육) 제 15 호에 의거 경기 수색에서 제 4 여단으로 최초 창설 후,
동년 11월 20일에 제 6 여단으로 개칭되었으며, 서기1949년 1월 15일 육본일반명령 제 15 호에 의거 사단으로 승격되었다.
  제 6 보병사단은 서기 1949년 1월 강원 원주로 이동하였고, 휴전 이후에는 서기 1957년 3월부터 1963년 8월까지 강원 홍천 사창리, 경기도 현리로 이동하였다.
  제 6 보병사단은 서기 1966년 ○월 ○○일부로 ○○' 현 위치로 이동하여 ○○○ 지역 경계를 담당하고 있다.
  제 6 보병사단 은 6.25전쟁 기간중 춘천지구 전투등 154여회의 대 ·소 전투에 참가하여 적 92,669명을 사살하고, 적 6,437명을 생포하였으며, 휴전 이후에는 25회의 대간첩작전을 통해 적 17명을 사살하고, 적 1명을 생포하는 등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제 6 보병사단의 상징명칭은「청성부대」다.  청성부대명칭은 6.25전쟁 당시 un군이 사단을 ‘blue star'라는 애칭으로 부른 것에착안하여 최강의 전투부대라는 뜻으로 서기 1951년에 사단에서 제정하였다.


 - 제 6 보병사단 편재

    - 2연대 (용문산부대)
    - 7연대 (초산부대)
    - 19연대 (독수리부대)
    - 포병대대( 27,76, 77 ,88 포병대대)

- 제 6 보병사단 주요 사단장

1950  : 김종오(金鐘五) 대령(당시 29세)
1951  : 장도영 준장(파로호전투)
1955~1957년 : 박정희 대통령
1965년 : 김재규
1975년 : 정명환 장군 (2땅굴 발견)
1995년: 남재준소장(前육군참모총장)
1997년 : 김장수 소장( 前 국방부 장관)
2004년 :허평환 소장(육사 30기)
2006년 : 임관빈 소장 (늘 푸른병영)
2007.10. : 조병오 소장

- 제 6 보병사단 한국전쟁 전공

 1. 춘첩대첩 (대한민국을 구한 푸른별)
 춘천과 홍천을 방어하던 6사단은 6.25전 생포한 북한포로의 진술로 전면전위기를 느낀 김종오사단장님의 휴가,외박,외출 통제로 전병력이 영내대기했다. 또한 비상령을 발포하여 항시 전투준비태세에있던 6사단은 6.25당일 다른사단과는 달리 3일동안이나 방어에 성공해 국군이 재정비할수있는시간을 벌어줬다. 나머지9개사단이 전쟁과동시에 추풍낙엽처럼 쓸려 도망갔던것과는 대조적이다.

 유일하게 사단기를 빼앗기지않은 6사단은 전쟁초기 t-34전차를앞세워 돌진하는 인민군에게 처음에는 고전했다.

그러나 모진교쪽에서 지형을 이용 심일소위와 육탄11용사가 화*을들고달려들어 적토치카를 파괴시켰다. 이것이 적전차를 파괴한것으로 잘못전해들은 국군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6사단 선배님들의 악착같은 모진교에서의 방어로 오히려 인민군 4사단과11사단,모터싸이클연대는 어처구니없이 패하고말았다.

 이에 김일성은 4,11사단장과 모터싸이클연대장을 해임한다. 그러나 다른 사단의 국군들은 패배를거듭해

결국3일만에 수도서울은 빨갱이치하로 넘어간다.  춘천,홍천에서계속방어하던 6사단은 결국포위될위기에 놓이게되었고 김종오사단장은 야음을 틈타 한강이남으로 전략적 철수를 명하게된다.

 이때 6사단이3 일을 버텨주지못했더라면 서울은하룻만에 함락됐을것이며 낙동강 방어선과 인천상륙작전도 없었을것이다.
 휴전이후 6사단이 전력의 요충지인 중부전선의 최선봉을 맡을수있었던 계기가되었고, 구국의 사단이라는 칭호를 받을수있었다.


2.  음성지구전투 (국군 최초의 승전보)
 대구와 부산을빼고 전국을 인민군에게 빼앗긴 국군은 낙동강에서 배수의 진을치게된다.

 6사단7연대는 동락리쪽을 방어하고있었는데 장호원에서 동락리로 치고들어오던 북괴군15사단과의 교전이 불가피하게되었다.

 15사단 2개연대는 국군이한명도보이지않자 동락초등학교에서 잠시 야영을하며 저녁을먹었다 이때 초등학교 김재옥교사가 국군7연대2대대장에게 신고를했고 2대대는 3대대에 지원을 요청해 박격포를동원 동락초등학교에 집중사격을가한다.

졸지에 기습을당한 인민군2개연대는 박살이났고 빠져나온인민군들은 2,3대대원들의 총탄에 쓰러졌다.

겨우빠져나온 2개연대인민군들은 휴식을취하다 지원을오던1대대병력을만나 또다시 패주해 전선밖으로쫓겨나게된다.

국군최초의 공격이었으며 승리인 음성지구전투로인해 이승만 대통령은 방송으로 우리국군이 지고있는것만은아니라고 말했으며 6사단 7연대 전장병이 일계급 특진하였다 국군최초의 대통령표창과 일계급특진이었다


3.초산진격 (압록강 물을 마시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대반격을한 유엔군은 거꾸로 적의 뒤통수를치며 10월1일 3사단을선봉으로 드디어 38선을 돌파한다.

그리고 1사단은 가장먼저 평양에들어가 북괴군과 접전을펼친다. 뒤이어 도착한 6사단과1사단의 협공으로 북괴군은 도망치고 주석궁에는 태극기가 휘날리게된다.

 와중에 6사단7연대 3대대는 김일성 승용차를 노획한다

 그러나 미군은 국군의 북괴군 추격을저지하고 미24해병사단에게 단독으로 북진할것을 주장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에 강력히 항의 우리국군에게 가장먼저 압록강에 진격하라고 명령한다. 이에 미24해병사단과 국군 7사단과6사단사이에 경쟁이 붙었다.

 6사단7연대는 임부택대령의 지휘하에 패주하는 북괴군을 몰아부치며 초산을향해 전속력으로 진군했다.

 당시 6사단 7연대의 진격속도는 패주하는 북한군을 앞지를 정도였다고한다.

 드디어 초산에 들어서자 북괴군은 최후의 발악을했으나 7연대는 이들을 섬멸하고 초산을 점령 1950년10월26일2시15분 드디어 압록강에 태극기를 꽃고 1대대 1중대 1소대장은 수통에 물을담아 이슴만 대통령에게 헌수했다..


4. 용문산전투 (세계를 놀라게 만든 푸른별의 위력)

 

================================================================================================

출처=디씨인사이드

 


 

밀리터리 인기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