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연대 기병대대 제7중대장 김 촌성
일 시:1977년 5월 19일
장 소:제2관구사령부
대 담: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주요 증언 내용
김포.오류동부근전투
세부 증언 내용
나는 대학재학시인 1948년 London 올림픽 대회에 길 전식등과 함께 승마선수로 선발되었다가 출전치 못하고 말았는데, 그러자 당시 기갑연대장인 이 용문 대령의 권유로 대학선수 9명과 수의 5명이 함께 육사 8기 2반으로 특채되었다.
당시에 기병대대는 경주의 종마목장 것까지 합치면 말이 300여필 되었다.
장비는 분대장 이상은 CAR이고 분대원은 M1 소총이었는데, 그 모습은 서부할극의 기병대와 흡사하였다.
다만 복장만 다를 뿐 마구는 전부 미제였다.
화기 소대에는 60㎜박격포 4문과 경기관총 8정까지도 말에 싣고 다녔는데 6.25전쟁 당시까지도 마필이 확보되지 않아 제5, 제6 2개 중대 밖에 편성이 되지 못하였고, 병사들의 승마훈련만 했을 뿐 마필에 대한 전지적응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대대참모를 하다가 1950년 초에 보병학교에 입교하였다가 졸업시에 성적이 수석이라 하여 학교의 교관요원을 남아 ‘기병전술’을 강의하게 되었다.
6.25전쟁이 터지자, 학교의 교관들이 모두 일선부대의 중대장요원으로 차출되어 나갔다.
그래서 나는 이왕이면 내가 몸담았던 기병대대를 찾아가고 싶어서 학교 고급부관인 이 석봉 중령의 주선으로 기갑연대로 전속명령을 받게 되었다.
27일인가 기갑연대로 갔더니, 기병대대 주력은 이미 퇴계원쪽으로 출동한 뒤였는데, 남아있던 2개 중대로써 임시 제7중대를 편성해서 중대장직을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는 장갑대대에 배속되어 김포로 출동, 갑관 맞은편 강안에 배치되어 있는데 당시에 내가 알고 있었던 기병전술은 300m쯤 뒤에 1인 5구씩 마진을 치게 하고 나머지 기병은 보병전투를 하다가 돌파구가 형성되면 수마한 말을 추진케 하여 기마 돌파를 감행함으로써 적의 배후를 교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강안배치 상태에서는 그러한 전술이 응용될 수 없었다.
오히려 말이 적의 포격에 놀라 이리저리 뛰게 되어, 보병전투마저 여의치 않았다.
글출처: DEFENCE KOREA 금성천님.
사진출처: war file 네이버 블로그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에는 기병대가 있었습니다. 정확하게는 기병대대죠.. 기갑연대 예하로 기병대대가 존재했고 기병대대의 전투기록에 대해서 입니다. 아마 M8 장갑차가 27대 밖에 없는 기갑세력인 국군으로서는 기동예비로서 남겨둔 전력으로 판단됩니다. 하지만 그 기병대대도 제대로 준비가 안된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 문제라는 점이죠; 관련 증언을 한번 올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