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초기 한국군과 한국경찰과의 관계

미연시다운족 작성일 09.08.05 19: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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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 초기 군대와 경찰 사이의 관계가 매우 나빴다는 점은 아마 들어본 적들 있으실 겁니다. 여수에서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도 반란의 주모자였던 지창수 상사가 "경찰이 쳐들어온다!"고 사병들을 선동했고, 그게 먹혔던 것만 보아도 군인들이 경찰에 대해 가지고 있던 적개심의 정도를 알 수 있겠죠.
그런데 이 적대감이 감정다툼이나 시비, 주먹다짐 정도를 벗어나 총격전으로 비화한 사례도 있습니다. 오늘은 그중 최악의 사고였던 영암경찰서 습격사건에 대해서 짧게 다뤄볼게요.


미리 말해두자면, 이런 식의 충돌은 사실 어느 정도는 필연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애초에 미 군정이 군대를 창설한 시초 자체가 경찰예비대(Constabulary Police Reserve)였으므로 경찰은 경비대를 자신들의 보조기구로 여기고 있었거든요. 게다가 장비에 있어서도 경찰은 창설 직후부터 새 제복과 칼빈을 지급받았는데 경비대는 한참동안 일본군복과 일본제 38식-99식 소총을 써야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경비대원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건 바로 계급장이었습니다.

창군 초기, 경비대 계급장을 만드느라 골치를 썩이던 군정 당국은 일단 임시로 경찰모자의 귀단추로 사용하던 무궁화를 경비대 장교 계급장으로 쓰기로 했습니다. 무궁화 하나가 참위(소위), 둘이 부위(중위), 셋이 정위(대위)였지요. 경찰모의 귀단추를 계급장으로 쓰게 된 경비대를 보자 경찰은 경비대를 "더" 깔보게 되었고, 경찰에 대한 경비대의 적개심도 더 커졌습니다. 1946년 2월 1일자로 새 계급장이 제정되면서 이 문제는 조금 나아졌죠. 하지만 군경간의 갈등은 계속 있었고, 주로 외출/외박을 나간 군병력을 경찰이 제재하면 군인들이 몰려나가 보복하는 식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그중 가장 격렬했던 게 바로 이 영암경찰서 사건이죠.


1947년 6월 1일, 전라남도 영암군 신북면에서는 이곳 출신 국방경비대 4연대 소속 하사 1명이 외박을 나와 집에 들렀다가 신북지서 소속 경찰관과의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습니다. 경비대원이 쓰고 있는 모자에 달린 모표를 보고 경찰이 "일본놈들 좋아하는 사꾸라 꽃 같다"고 놀렸거든요. 이게 본서인 영암경찰서로 넘어가자 경찰에서는 이 하사를 즉각 구속하여 본서 유치장에 처넣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신병을 인수하러 찾아간 4연대 장교와 군기대(헌병) 사병들까지 폭행했습니다. 이 소식이 광주의 4연대 본부에 전해지자 듣자 눈이 뒤집힌 병사 및 하사관 3백여 명이 무기고를 털어 총과 실탄을 꺼내 트럭 7대에 나눠 타고서 영암으로 달려갔죠.

4연대 장교들이 허겁지겁 뒤쫓아갔을 때는 이미 때가 늦어서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경찰측은 아예 망대에다 기관총까지 걸어놓고 쏘아대고 있어서 공격측인 경비대가 크게 불리한 상황이었죠. 연대장인 이한림 소령이 경비대에 사격중지 명령을 내린 다음 영암군수와 함께 몸소 경찰서에 들어가 담판을 벌였는데, 접근중에 경찰이 던진 수류탄 때문에 호위병 1명이 죽고 1명은 중상을 입는 위험을 무릅써야 했습니다. 연대장의 적중담판(?)으로 간신히 사태가 마무리되기까지 희생자는 경비대가 사망 6명에 부상 10여 명, 유리한 위치를 잡고 있던 경찰은 제로였습니다(이상의 수치는 장창국 저 <육사졸업생>에 의하며, <경찰전사>에 의하면 경비대 2명, 경찰 1명 전사). 여기에 전남도경이 영암경찰서 지원을 위해 기동대를 출동시키고 있었으니 그 병력이 도착했으면 뭔 꼴이 났을지-_-;;

한 가지 재미있는 건 기동대 지휘관 정래혁 경감 역시 연대장 이한림 소령과 같은 군사영어학교 동창생 출신이었다는 겁니다. 군사영어학교 출신이라고 다 경비대에 들어간 건 아니었거든요. 총 170명의 졸업생 중 장교 임관자는 110명 뿐이었고, 나머지는 경찰 등 행정관서에서 일했습니다. 다만 정 경감의 경우는 임관하여 3연대에서 참위로 잠시 근무하다가 고문관과의 트러블 때문에 경찰로 옮겨간 사례라, 약간 경우가 다르긴 해요.

전남 지역에서는 1년쯤 지난 후에도 큼직한 충돌사건이 한 건 터집니다. 1948년 9월 24일에 구례경찰서 직원 한 명과 14연대 사병 9명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는데, 몰려든 구례경찰서 경찰관들에게 사병들이 구타당한 후 구금당했습니다. 그래서 14연대 헌병들이 구례까지 가서 이 병사들을 인수받아 왔는데, 연대 인사계인 지창수 등이 이 사건에 대해 분개하면서 언제 한 번 보복하겠다고 벼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후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반란이 터진 거죠. 그리고 뭐 그 뒤는.....

어때요, 그정도면 "경찰이 쳐들어온다"는 선동이 통할 것 같죠?

 

 

글출처: 슈타인호프의 홀로 꿈꾸는 둥지 이글루스 블로그.

사진출처: 아 6.25 그때는 자유를 이제는 통일을  네이버 블로그

 

대한민국 건국초기.. 우리나라 경찰과 국군은 얼마나 관계가 어떠했을까요? 라고 묻게되겠습니다만.. 제주 4.3사태때에도 그랬듯이.. 대한민국 건국초부터 우리나라 경찰과 국군은 그야말로 원수가 따로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 관련 에피소드와 동시에 14연대 반란사건때 주동자 지창수 상사(당시계급)가 선동할때 -경찰이 쳐들어온다!-라고 선동해서 연대원들이 움직였던만큼.. 한번 어느분이 에피소드들을 올린 것이 나와서 올려봅니다.

 

현재의 일본에서도 자위대와 경찰과의 관계는 나쁘다고하더군요.ㅋㅋ 걔들이 특히 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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