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때 학도소년병들의 전차중대 이야기VOL3- 입대와 훈련

미연시다운족 작성일 09.08.11 00:3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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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1950년6월25일

 

 

서기1950년 봄

 

 

그 해의 사회상은 잘 알 수 없다, 신학기가 된 나는 중학 3학년이 되어 부모님 밑에서 평화롭게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우리집은 용산역 뒷편 신계동이었다. 조용한 일요일 새벽 멀리서 은은한 포성이 들리면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과 함께 우리가족은 피난봇다리를 짊어지고 피난준비를 해야했다. 집앞 제방 뚝에 (현 용산 전자상가) 올라 한강다리쪽으로 갔다. 많은 사람이 피난 보따리를 갖이고 간다. 강뚝 따라 용산철도 기지창 가스탱크 옆을 가다가 돌아오는 사람들을 보았다 이유는 다리가 끊어졌다는 것이다 우리 가족 은 피난을 포기 했다...

 

 

그리고 피 비린내 나는 동족상쟁의 남침전쟁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피난도 못가고 인민군을 만났다 그리고 빨간완장을 찬 사람에게 이끌려 김일성 歌를 배우기도 했다. 우리 큰 형님은 인민보안대에 의해 이북으로 끌려 가신후 소식이 없다 경찰관이었다는 이유로....

 

 

1950년 8월15일경 이다 동내 친구들과 함께 대문앞에서 전쟁 이야기와 잡담을하다가 하늘을 보니 B-29 폭격기가 하얗케 떠서 오더니 폭탄이 쏟아진다 어느 순간에 우리위로 떨어젔다 목표는 용산역 이지만 역에서 가까운 우리 동내도 오폭을 맞았다 나는 우리 집 안방에 엎드렸다 친구는 건너집 으로 들어갔다 순간 큰 폭음 소리에 사방이 먼지로 뒤덮이고 집이 무너지 는 소리와 내 등 뒤에 장롱이 덮여 있고 잠시후 밖을 보니 앞이 훤히 트이고 바로 집앞에 큰 웅덩이가 생겼다. 그 후 앞집으로 들어간 친구는 영원히 보지 못하였다...

 

 

나는 무서움에 용문동쪽을 지나 금양초등학교쪽으로 가는 도중 서적 인쇄소가 폭격을 맞았다 길위에 사람이 엎드려 있는데 등에 커다란 구멍이 뚫여있고 피가 땅바닥에 낭자한 것을 보기도 했다. 또한 피를 흘리고 우왕 좌왕 하는 사람들 을 보며 여기저기 사람의 살점들이 흩어져있고 동내에서 키우는 개들은 인육을 먹는 것도 보았다 나는 놀랜 남어지 가족도 생각지 않고 효창공원을 지나 마포 형무소를 거처 마포 경찰서 뒷편 감 나무밭 뒤로새로지은 개와집 동내를 지나 외갓집이 있는 뒷산으로 도망을 하여 산위에서 용산원효로 우리집 쪽을 보았다, 얼마가 지났을까?

 

 

시간이 지나 조용하다,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보니 앞집으로 들어간 친구는 앞집 식구와 함께 어디로 혼적도 없이 살아졌다. 내 누이동생은 폭격에 맞은 옆집 흙더미속에서 살아 나왔다. 그리고 그후 나는 국군이 공격해오는 김포 상공을 보고 인민군들이 서울 시가를 떠나는 모습도 보았다 그런 환경에서 국군이 들어와 수도가 탈환 되었으니 얼마나 기쁘랴.....그러나 그것도 잠시일뿐 다시 1950년 12월 26일경 소위 1.4 後退로 서울를 떠나 피난을 갔다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그때가 봄쯤이었을 것이다 ,1951년도의 사회상은 피난갔던 서울 시민들이 5월경 돌아 왔다 페허된 수도서울 곳곳이 파괴되어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였다 간간히 서있는 건물 우리 학생들은 누군가에 의해서 연락을 받아서 학교 등록을 했다..

 

 

당시,광화문 경기고녀 자리에 서울 시내 학생들이 모였다 우리들은 집이 원효로 2가 학교로 가려면 먼 거리를 걸어다녀야 했다, 원효로에서 광화문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 때때로 군용트럭이나 화물차를 타기도하고 달려가는, 화물차를 올라타면 운전기사님에게 쫓겨나기도하고 낮설흔 여학생집도 기웃거리면서 학교에다녔다 저녁이면 이발소에서 친구들과 잡담도하고 시간있으면 소공동 미공관에 가서 공부할수 있는 책을 찾아 보기도 하고 교과서가 없는 터라 시장에서 일본책을 사서 보면서 열심히 수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해 9월 우리는 한학년씩 진학 하고 다시1952년3월 에 다시 진학했다 학년 제가 중등, 고등으로 나눠젔다 그리고 그때부터 중등,고등학교로 불리워지고 있었다 우리 서부훈육소 뿐만 아니라 동부훈육소 북부훈육소도 있었다 (訓育所란 각 학교 학생을 모아 놓고 붙인 학교 명칭임) 때때로 길건너 서울고등학교 운동장에 모여 학도 호국단 결성과 어떤구호를 외치기도 하면서 수업을 했다 그때 나는 고 1이고 함께 입대한 우리들 네명은 (그중 두명은 우리보다 한학년 위로서 기갑장교로 갔다)가끔씩 저녁에 만나서 앞으로의 진로도 걱정을 하면서 어수선한 시절을 보내던중 서울지구병사구사령부(병무청)군인이 각 교실에 다니면서 모병을 했다. 그리고 게시판 에도 붙여 있었다, 소년전차하사관 후보생모집 이라고 또 일본에가서 교육을 6개월 마치고 한국전선에 온다고 했다,

 

 

우리들은 신체검사를 마치고 합격된 사람만 5월초 병무청앞 여관에 투숙 그 이튿날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는줄 알었다. 그러나 기차는 대전에서 우리를 내리고 떠났다. 그리고 버스에 오르니 논산 제2훈련소가 아니가? 모두 실망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누군가 도망했다는 소문도 들었으나 우리 일행중에는 아무도 없었다 각지에서 온 학생들 책가방을 들고온 학생도 많이 있었다. 훈련소에 도착 천막속에 임시 가마니를 깔고 지냈다. 편성되기전 보충대 역할인 것 같다. 음식은 입에 맞을리가 없다 처음에는 모두 남겼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배가 고파 밥알 하나 남긴사람이 없었다 며칠후 우리는 콘세트 건물로 이동 정식으로 군번(0817577 ~ 0817680 대략,가나다順으로)을 받고 第 23 연대 第 2 중대로 배속되었다,第 1 중대는 장교 후보생들이었다.

.......훈련이 시작 되었다......

 

 

1952년7월20 일

 

 

제2훈련소를 수료후 육군보병학교 전차교육대를 입학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다행히 선배들이 거쳐간 것일까? 교육과정은 그런데로 진행되는 것 같다, 또 우리는 소년전

차하사관 후보생이란 기대도 있었다. 그리고 훈련때 소년전차병가를 부르기도 하였으나

어느새 흐지부지 되었다. 이때 받은 교육이 일생동안 나에겐 많은 상식을 갖게

되었으니...

 

 

조종, 통신, 포수, 탄약 이렇게 과를 나누어 교육을 받기 시작 하였다 학과는 흥미를 갖게 했으며 모두 열심히 하였다 얼마쯤 지나, 우리는 적성과 희망순으로 과를 결정하고, 다시 전문교육을 받고 장성 비야 사격장에서 실습도 하면서 기술을 습득하였다. 점점 교육과정이 끝나감에따라 마지막 행군은 담양읍으로 목적을 두고 행군을 하였다. M-24 경전차로 그때의 행군은 멋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드디어 1952년10월25일 보병학교 전차교육대를 졸업하였으나 모두 하사관 대우가 없어 불만을 갖기도 하였다. 어쩔 수 없었다.(그래도 가슴속에는 소년전차하사관이란 자부심을 갖고 복무 하였고 모두 제대후모임 명칭을 57 소년전차 전우회로 모임을 갖고 해마다 2회씩 모임을 갖고있다)일주일 휴가를 얻어 집으로 갔었다 집에 부모님은 반가워 하시면서도 내 모습을 보시고 눈물를 흘리셨다 어린 것이 고생을 사서 한다고 또 미안해 하시는 것을 간신히 이해시키고 돌아 왔다. 우리는 그때도 얼마든지 군을 포기할 수 있는 어린나이다 그러나 군에서 생활하는동안 우리는 군인이 무엇이란 것을 배웠고 또 한편으로 자랑스러운 느낌도 있었다.

 

글출처: DEFENCE KOREA 김수영님.

사진출처: 하늘대장군의 잡탕 블로그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네이버 블로그

 

수기입니다. 수기를 관련되어서 나온 것이라서.. 좀 어설픈게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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