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사진은 바로 여기서 등장하는 35호 전차가 소속된 3전차소대의 소대장님과 대원들의 사진이라고 합니다.
제 57 전차중대 소년전차병들의 이야기 - 베티고지, 노리고지 전투
http://myhome.naver.com/boy_tank에서 발췌
이글은 만 16세와 17세의 지원 학도병으로 구성되었던 57전차중대의 이야기로서 소년전차병 홈페이지의 글입니다. 저작권은 소년전차병 홈지기님에게 있으며 관련 내용을 디펜스 코리아에 올려서 보다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하기를 허락받은 것임을 밝혀둡니다.
베티고지와 노리고지에서의 전투
☆. 전사기록참조
전사기록 756쪽27번째 줄
[ 사단은 지난해부터 美 제73전차대대 C 중대의 지원을 받던 중, 이해 1월 10일에 육본으로 부터 제57전차중대를 배속케 되어, 공병대대로서 주저항선에 전차사격진지를 마련하는 가운데 미군 C 전차중대로서 우일선 연대를, 제 57전차중대로서 좌일선 연대를 각각 직접 지원토록 안배함으로서 주저항선 연대의 전력을 쇄신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근거에 의거.....
우리 57전차중대는 전차교육대를 졸업(52년10월25일)후 11월 초부터 M36 전차 22대, M32 구난차 1대 합 23대와 장비를 수령하여 적응 훈련을 거치고 있었다, 그리고 1952년12월 선발대 김형고 소대장외 20 여명이 지엠씨트럭을 타고 출발 며칠 후 우리본대도 광주 송정리역을 국민의 환송을받으며 출발했다
서울 용산을 거처 연천역에 하차후 임진강 변, 옆으로 군 부교가 있고 포소리만 들리는듯 한곳에 주둔 ( 연천역은 인민군이 남침하기 위한 곳으러서 전차를 기차에 실어 연천에 전차부대를 집결시킨 곳이었다고 한다) 임진강 동쪽 기슭에 중대본부가 설치되고 강변에 전차가 정열되니 장관이었다, 그리고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그후 우리는 휴전으로 인하여 한탄강 남쪽 강옆에주둔 때 중대는 다시모였다, 서울 시가 행진 할때 까지 각소대 는 만난적이 거의 없다 여기서 불어나는 강물에 전우 김홍식군이 익사하고 시신은 찾지 못하였다) 배가 지나가는 임진강물에 밥을 지어먹기도 했다 그리고 그 겨울 정신무장을 시킨다고 찬 강물에 집어넣어 부관으로부터 벌을 받기도 하면서 지내다 며칠후 전선으로 출동했다
첫 번째 출동
우리 3전차소대는 밤에 박도신 소대장님의 뒤를 따라 31호 전차, 조종수는 윤종익군 다음 32호, 33 호 나의 전차 35호 조종수는 나(오명섭) 그리고 전차장 김관동 선임하사님, 포수는 홍사호군, 통신수는 손덕배군, 탄약수는 목영학군, 5명이었다 그리고 36호 조종수 김종필군 이렇게 5대로 구성된 전차소대가 야음을 타고 처음으로 전선에 투입, 모두 긴장하고 출발하는 가운데 우리조종수 들은 뒤에 켜진 미등만 보고 어딘가 달렸다.
먼지는 얼굴을 덮으며 숨쉬기조차 힘들지만 긴장한 탓에 앞 전차따라 한없이 간다. 헤드라이트도 끈 채 어디쯤 가고 있을 때 옆으로 캄캄한 별빛속에 우측으로 위장망이 처저 있다. 그리고 헤드폰속이 아닌 外部에서 들리는 소리는 엔진 소리뿐이다 아마도 멀리 적들도 알았으리라, 서로 숨을 죽이고 가는 것 같다 후에 알았지만 바로 강이 내려다 보이고 노리고지가 보이는 언덕위 산복도로를 지나는 길이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무렵 우리 소대는 분산배치되었는데 그 후 중대에 올 때까지 별로 서로 만난적이 없었다, 아군보병에 의해서 우리 35호차는 미리 준비 되어진 전차진지에 유도되어 후방으로 놓고 정신차려 주위를 둘러 보고 너무 지친 몸에........
날이 밝자 주위를 둘러보니 전면에 낮은 봉우리 들이 보이고 노리고지가 2시방향으로 멀리 보
이면서 317(315) 고지가 10시 방향 에 있었다 (고지 이름은 후에 알게됨) 간간히 소총 사격음이 들리지만 그렇게 위험하지 않는 것 같고 우선 밥을 지어 먹고자 하여 주위를 보니 개인용 항고(반합의 일본식 표현- 당시에는 그렇게 불렀다고 함)뿐 우리는 Cal. 50밀리 탄통을 구해 밥을 해먹으려고 밥을 다하고 나서 뚜껑을 열다 진공상태에서 그대로 밥이 천장으로 오르는 바람에 밥을 쏟고 말았다 우리로서는 황당한 일이었다. 탄통으로 밥을 해먹기는 처음이니 다시 밥을 해서 5명이 먹고 지냈다 , 그날 오후 여러 가지 상황을 알게된 우리는.......
저녁 해지고 난 후 요란한 총성과 예광탄이 나가는 것을 보고 나는 놀라고 말았다. 그 시간은 낙하산 신호탄(조명탄인듯..)이 내.려.오.면.서 환하게 밝히는 동안 모든 화기가 일제히 사격을 하는 것이다, 정말 아름다운 풍경이다,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고 마치 불꽃놀이를 보는 것 같다, 다음날 알았지만 적이 침투해 올까 우려하여 사전에 위협사격을 하는 것이란다, 우리도 그 이튿날 밤부터 보병과 함께 2 정의 기관총으로 그 신호탄만 올라가면 함께 적의 진지를 향하여 사격을 했다.
낮엔 때때로 1사단에서 지원사격을 부탁하면 우리는 우리의 사격권 안에서 지원사격을 하였으니, 사단에서 참모부 모두 호의적이었다 왜냐하면 우리 M36은 90mm 직사포로 유효사정이 20.000Yds, 우리는 2000Yds,정도에서 발사하는 포탄은 100%로 명중함으로 敵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다고 자부한다, 때때로 밤에 그들이 공격하기도 한다 어느때는 敵의공격으로 誤認 긴장해서 밤을 세우고 나면 중공군 포로를 생포하는 것을 때때로 보았다, 그리고 포로를 잡은 병사는 1주일 포상 휴가도 간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탱크를 확인한 중공군은 우리탱크를 보고 그들의 포로 맹포격을 하였으나 대부분 빗나갔다 그리하여 우리 탱크는 햇지가 10mm 철판에 불과해 포탄에 맞으면 위험함으로 마대자루 푸대에 모래를 담어 세겹 네겹씩 올려놓고 싸웠다(당시 부족한 방어력을 개선하기 위해 3분의 1인치짜리 철판을 덧대거나 샌드백을 쌓는 경우가 흔했다고 한다. 게다가 상부장갑이 없는 Open top방식이라 보병공격에도 취약했다), 후에는 탱크 벙커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하루는 전차 앞의 아군보병 교통호를 방문 벙커를 구경하기도 했다, 낮에는 드문드문 비어 있다, 나는 벙커에서 창구를 통하여 적진을 보고 또 우리 보병들이 두꺼운 상자 종이위에 자기들 이 사격하는 목표를 만들어 놓고 야간때 위협사격하는 것을 알았다, 정면에 산봉우리들이 좌우로 그려져 있었는데 고지 이름은 모르고 다만 벳트고지로만 알고 지냈다, 전사기록으로 이름을 확인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당시 317고지 다음부터 바블고지까지는 전부 뱃드(베티)고지로 알고 있었다, 또한 315 고지는 본래는 317고지였다 전쟁중 너무 많은 포탄으로 산정상이 깎여 315고지로 명칭이 바뀐 것같다,
초겨울부터 여름까지의 우리들은 계절을 느끼지 못하고 또한 날짜도 모르고 지냈다 오직 긴장속에 ........ 그래도 우리는 기다리는 것이 있었다, 일주일 한번씩 오는 보급차와 위문편지.. 편지도 받아보았다 발신주소 없는 편지도 있고 그 안에 치약 비누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때는 그것이나마 반가운 물건이었다. 사실 여기서 다른 소대의 출동은 알 수가 없다, 다만 후에 5소대는 예비소대로 있다가 우리가 중대본부로 복귀할 때 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 1소대와 2소대는 태풍고지 주위에 주둔하였다는, 소대장님의 말씀을 듣고 후에 확인할 수 있었다, 現 태풍전망대(△264 고지)가 바로 우리 1소대장님이(1953.5.16) 전사하신 곳 이다 보병 갑종 24期 지금도 6월이 오면 동기생들이 모여 추모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사진/글출처: DEFENCE KOREA 김수영님.
베티고지와 노리고지 전투의 수기입니다. 소년전차병들의 첫 전투의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