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쿠바혁명이 일어난 지 어느덧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1959년의 혁명으로 인해 쿠바의 국민들은 미국이 지원하는 종신 독재자인 풀헨시오 바티스타를 스스로의 손으로 몰아내고, 중앙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역사상 처음으로 외세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주권국가를 설립하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경제 봉쇄를 당하게 되죠.
우리나라에는 악질 공산 독재자로 알려진 카스트로 형제지만, 쿠바 혁명의 역사적 원인을 이해하지 않고는 왜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했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푸에르토리코와 더불어 신대륙 최후의 스페인 식민지였던 쿠바는 오랜 독립투쟁 끝에 1898년 스페인과 미국 사이의 전쟁에서 스페인이 패배함으로써 독립을 얻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명목뿐인 독립이었고 이후 정치/경제적으로 미국에 종속됩니다. 특히 미국은 독립 직후 쿠바의 신헌법에 미국이 쿠바에 적합한 정부를 유지하기 위해 미군이 쿠바의 사태에 얼마든지 개입할 수 있다는 조항을 삽입할 것을 강요하고, 쿠바의 산업과 대농장은 모두 미국 자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죠. 미국과 친밀한 상류층의 부와 권력은 더욱 집중되는 반면, 절대 다수의 쿠바 민중의 삶은 더욱 더 피폐해져 갑니다.
1933년, 하층 빈민 출신의 쿠바 육군 중사인 풀헨시오 바티스타가 이끄는 소장파 장교와 부사관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정을 전복시킨 뒤 1인 독재체제를 구축합니다. 처음에는 스스로가 하층민 출신이라는 점을 호소하며 쿠바 민중에게 친서민적인 정책으로 다가간 바티스타는 점차 영구집권 의도를 드러내고, 1940-1944년 동안 직접 대통령에 취임, 그 이외의 기간은 자신의 꼭두각시들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워 대규모 부정선거를 일으켜 당선되도록 합니다. 특히 1952년 야당 후보를 상대로 한 대선에서 승산이 없어 보이자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기존의 대통령을 추방하고 몸소 '과도정부'의 수반이 되죠. 미국은 쿠데타 정권을 얼마 지나지 않아 인정해 줍니다. 바티스타에 대한 쿠바 민중의 반감과 더불어 반미 감정도 서서히 커지게 됩니다. 1953년 쯤 되면 쿠바는 실업자가 700,000명에 달했고, 빈민을 위한 보건 복지제도는 사실상 전무했으며, 쿠바 농민들 중 30%는 자신의 이름도 쓰지 못하는 지옥인 반면, 쿠바의 부유층과 현지의 매춘, 도박, 관광사업을 손에 쥔 미국 마피아들에게는 천국이었죠.
1953년 7월 26일, 젊은 변호사였던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의 왜곡된 법으로는 바티스타를 정권에서 물러나게 할 수 없다는 생각 끝에 동생 라울 및 그를 추종하는 수백명의 학생 및 노동자들과 함께 무모한 몬카다 병영 습격작전을 펼치지만 처참하게 실패하고 투옥되었다가 멕시코로 추방당합니다. 그곳에서 카스트로 형제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젊은 의사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와 다른 혁명가들을 만나게 됩니다. 82명의 혁명군은 멕시코에서 군사훈련을 하면서 '그란마'라는 이름의 낡은 요트를 가까스로 구해 1956년 11월 25일 밤 멕시코의 베라크루스로부터 출발해 쿠바 동부 해안에 마침내 발을 딛습니다. 상륙 직후 쿠바 정부군에게 발각된 이들은 격렬한 전투에 휘말리고 여기서 60여명의 혁명군이 전사하는 참사가 벌어지죠. 하지만 카스트로 형제와 체 게바라를 포함한 20여명은 간신히 목숨을 건져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으로 도피하고, 여기서 전력을 가다듬고 혁명군을 모집하면서 민중의 지지를 얻게 됩니다. 혁명군은 점령 지역에서 대농장 지주들을 몰아내고 농지개혁을 실시해 가난한 소작농들에게 땅을 나눠주고, 글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인 쿠바 농민들에게 글을 가르쳐주거나 병을 치료해주는 식으로 신뢰를 얻게 되죠(Hearts & Minds의 원조들?). 특히 혁명군은 매복 전술에 능통한데다가 저격전술을 즐겨 사용, 항상 정부군 부대의 선두에 있는 첨병부터 저격함으로써 정부군의 사기를 곧장 꺾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한낱 산적떼 정도로만 알았던 혁명군이 기세를 떨치고 군대와 경찰에 대한 게릴라 공격을 늘리기 시작하자 당황한 바티스타 정부는 1958년 6월부터 8월까지 약 300명의 혁명군을 상대로 12,000명의 병력(당시 쿠바 군경과 민병대의 총 병력은 약 30,000~40,000명 정도)을 투입시킨 대공세를 펼치지만, 실전 경험이나 훈련이 부족하고 부패한 데다가 싸울 의지도, 민중의 지지도 없던 독재자의 군대는 현지의 지형을 꿰뚫고 있었고 공격 방향까지 예측한 데다가 현지인들의 지지까지 얻은 혁명군을 상대로 패배하고 맙니다. 이때부터 역사의 바람은 혁명군에게 유리하게 불기 시작합니다.
1958년 8월, 쿠바 정부군의 대공세가 실패로 돌아간 직후 정부군의 무기와 장비를 노획해 더욱 전력이 강해진 혁명군은 드디어 산맥에서 나와 수도 아바나를 향한 행군을 시작합니다. 혁명군의 부사령관인 체 게바라, 카밀로 시엔푸에고스, 하이메 베가가 이끄는 혁명군은 야과하이와 아바나를 향한 길목인 산타클라라에서 정부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둠으로써 사실상 전쟁의 승리를 거두고, 산타클라라가 함락당한 다음 날인 1959년 1월 1일, 바티스타는 자신의 골수 지지자들과 함께 인근의 도미니카공화국으로 망명을 떠납니다. 이날 아바나 시내는 기뻐서 거리에서 춤을 추고 노래하는 사람들, 그들과 함께 춤을 추는 혁명군 그리고 환호의 의미로 울리는 자동차 클랙슨 소리로 가득 찼다고 합니다.
1959년 1월 1일 이후의 쿠바는 그 이전의 쿠바와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미국으로부터의 경제적 종속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주요 수출품인 설탕 제조 시설과 각종 산업시설을 국유화하고, 외국 회사들이 소유한 쿠바의 토지(전체 경작 가능한 토지의 75%에 달했던)를 싼 보상값에 몰수하여 빈농들에게 나눠주는 정책과 동시에 빈민들에게 보건 및 교육 혜택을 보급하는 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미국은 쿠바를 '사회주의'국가라고 비난하며 쿠바와의 외교관계를 단절시키고 40년째 지속되는 경제봉쇄를 실시할 뿐만 아니라 1961년에는 망명 쿠바인들을 훈련시켜 실패한 피그즈만 침공 작전을 벌이기도 했죠. 이 사건을 계기로 쿠바는 더욱 소련 및 공산권 국가들과 친해지는 동시에 사회주의 영향권에 편입되고, 미국과 반대의 독자적 노선을 걸어가게 됩니다.
냉전이 끝나고 1990년대 대부분의 공산권 국가들이 사회주의를 버리고 자본주의 시장 체제로 전환을 완료한 시점부터 쿠바는 오랜 고난을 겪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해체한 소련의 지원을 기대할 수도 없고, 완전히 시장경제체제를 받아들인 중국은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쿠바와 거리를 두는 반면, 미국의 경제봉쇄는 풀리지 않아 생필품이나 의약품이 부족해지는 사태가 다반사고, 한때 세계 최우수 수준이었던 의료복지 제도도 사회주의 국가 특유의 비효율적 측면을 드러내고 있답니다. 또한 카스트로 형제의 장기집권에 대한 불만과 쿠바 공산당 간부 및 관료들의 부패 역시 문제가 되고 있고, 전체적으로 쿠바 혁명의 열기는 서서히 식어가는 추세이지요. 하지만 쿠바 국민들에게 혁명의 기억은 여전히 자랑스러운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피델 카스트로가 1970년 연설한 대로, 쿠바는 더 이상 '지옥같은 대농장'이나 '외국인들을 위한 유곽'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 누구의 도움도, 어떤 외세의 개입도 거부하고 직접 민중이 역사를 만들어 나아갔다는 자신감 때문이 아닐까요?
쿠바는 자국민을 탄압하는 군사 독재자를 민중의 손으로 권좌에서 끌어내림으로써 혁명의 1단계를 완수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스스로의 길을 걸어감으로써 혁명의 2단계를 완수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쿠바가 오랜 냉전적 사고에서 탈피하여 민주화와 개혁개방을 채택하고,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통해 경제봉쇄를 해제하여 국민의 복리를 증진시킬 때, 비로소 혁명의 3단계이자 최종 단계가 완성되고 진정한 '민중을 위한 혁명'이 이뤄지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출처:유용원 기자의tilover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