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프랑스 참패의 근원 "마지노선"

릴리알렌 작성일 09.12.09 02:4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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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공불락의 마지노선, 과연 난공불락의 조건을 갖추었을까?
고정된 요새의 수비에만 상당한 전력을 할애한 프랑스 육군, 독일군의 기동전에 속수무책으로 말려들다
시행착오를 거듭한 독일군의 진격, 2% 부족했지만 혁신적인 전술과 전략으로 압도적으로 우세한 프랑스군을 제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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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성과 토목공사의 달인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으로서 시즈가타케의 7본창으로 불리운 가토 기요마사가 7년에 걸쳐 축성한 규슈 구마모토성
  총 둘레가 9km에 이르는 거대한 성으로 3중으로 구성된 견고한 성곽( 현재는 산노마루가 시가지화되고 니노마루와 혼마루의 일부만이 남아있지만 )으로 인해 세이난 전쟁 당시 50일에 걸친 사이고 다카모리군의 맹공에도 함락되지 않는 철옹성의 위엄을 과시했다.
  대신 이 때의 전투로 덴슈카쿠와 혼마루 고톈을 비롯한 성의 주요 시설물이 모조리 불에 타버려 우토 야구라를 비롯한 일부 건물만이 생존한데다 메이지 유신 이후 내려진 다이묘들의 흔적을 없애버리기 위한 목적으로( 물론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겠지만 ) 내려진 폐성령으로 인해 주요 성곽들이 철거되면서 구마모토성 역시 산노마루와 니노마루의 일부 구획이 철거당하는 비운을 맞이했다.
  가토 기요마사는 조·일전쟁 당시 조선을 침공해 지금의 울주군 서생면에 서생포 왜성과 울산광역시 중구 학성동에 울산왜성을 축성하기도 했는데 이 두 성은 조·명 연합군의 맹공에도 함락되지 않아 방어전에 강한 일본성의 장점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처럼 난공불락의 구조를 가진 요새들은 때때로 공성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강요하는 반면 농성군에게는 최소한의 피해만으로 대규

모의 적병을 막아낼 수 있다는 이점을 제공했고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엄청난 인명피해를 냈던 프랑스( 모토 자체가 "돌격, 돌격, 죽어도 돌격!!"이니 )는 종전 이후 어떠한 적의 공세를 받더라도 막아낼 수 있는 요새를 꿈꾸었고 그 결과 등장한 것이 바로 마지노선이었다.
  그러나 이 마지노선이 바로 프랑스가 전쟁에 참패하게 만든 근원 중 하나가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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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노선의 단면도
  축성 당시의 기술력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만큼 정교하면서도 첨단화된 시설을 자랑한다.
  이 거대한 지하요새를 지키기 위해 투입한 병력 규모도 상당하지만 그 많은 병력이 불편함없이 근무할 수 있도록 제반 여건을 충실하게 제공한 프랑스의 기술력도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하는데 문제는 이처럼 너무나도 편안한 생활까지 보장될 정도로 견고한 요새를 건설한 것이 프랑스의 패착으로 작용했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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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전으로 종전되자 가장 혹심한 피해를 입은 프랑스는 독일이 다시금 과거와 같은 군사력을 갖추지 못하게할 요량으로 잔혹한 경제적 제재를 가했고 알자스와 로렌 지방도 도로 빼앗은 것으로 모자라 후일에는 루르 공업지대까지 강제로 점령하기에 이른다.
  독일로서는 패전의 치욕과 막대한 배상금까지 물게 되었으니 경제는 엉망이 되고 인플레이션 역시 심화된데다 1920년대 미국의 대공황으로 카운터 펀치까지 얻어맞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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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털루 전투의 영웅, 게프하르트 폰 블뤼허와 제1차 세계대전의 치욕적인 패전을 극복하고 은밀하게 독일군의 재무장을 추진한 정통 군인 귀족 출신 한스 폰 제크트( 오른쪽 )
  자존심이 강하고 프로페셔널리즘이 굳건한 정통파 독일 군인 귀족 출신 장성들은 연합군의 말도 안되는 베르사이유 조약에 대항해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특히 발트해 초입에 위치한 슐레스비히의 군인 귀족 가문 출신 장성인 한스 폰 제크트 장군은 참혹한 패전 이후 전차를 비롯한 중장비는 단 1대도 보유하지 못할 뿐더러 방대한 국토를 단 10만명 내외로 제한된 병력만으로 수비해야하는 굴욕적인 조약에 대항해 사기가 저하될대로 저하된 독일군을 필요시에는 얼마든지 과거와 같은 대병력으로 확장될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10만명 내외로 제한된 총병력은 모두 일반 병사가 아닌 부사관이나 장교에 준하는 사실상의 간부나 받을법한 훈련과 교육을 받아 언젠가는 100만명 이상으로 늘어날 독일군 신병들을 완벽하게 훈련시킬 수 있는 조교와 교관 수준으로 인력 양성을 시작했고 개발 자체가 사실상 금지된 기관총, 전차, 장갑차, 항공기는 국외에서 은밀하게 진행시켰다.
  하지만 장비만 개발한다고 하여 모든 일이 다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이를 운용할 승무원의 양성도 시급했고 이에 따라 자동차에 캔버스 판넬을 부착한 모의 전차와 모조 대전차포 등의 장비가 생산되어 운용인원을 철저하게 훈련시켰고 숙달된 승무원 교육생들은 이제 실제 전차와 대전차포, 장갑차를 조작하더라도 별다른 이질감없이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그 가능성을 보여준 항공기의 중요성도 강조되어 민간 글라 이더 및 항공 클럽들이 잇따라 개설되어 청소년들을 훈련시켰는데 훗날 독일 공군의 주옥같은 에이스들 상당수가 바로 이 민간 항공 및 글라이더 클럽에서 양성된 인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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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독일은 과거의 패전을 교훈삼아 언젠가는 자신들에게 굴욕적인 치욕을 안겨준 프랑스와 영국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지만 옆동네 프랑스는 그렇지가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이라는 영예에 심취한 그들의 군복은 위장효과를 고려해 카키색으로 변경되었을 뿐 사실상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었고 보다 현대적으로 설계가 변경된 m36을 채용하는 등 현대전에 걸맞는 군대로 변모했지만 프랑스군은 여전히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운용했던 아드리안 철모를 운용하고 있었다.
  소총 역시 독일군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gew 98을 보다 개량항 마우저 kar-98k와 다용도 기관총의 시조인 mg 34를 채용했지만 프랑스군은 1936년 제식 채용된 7.5mm mas 36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부대가 여전히 mle 1916 소총과 호치키스 mle 1914 기관총을 운용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건축, 토목 기술력이 집약된 마지노선, 그러나 난공불락은 절대로 아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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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가 막대한 공사비를 투입한 거대한 요새선 마지노선
  사진과 같이 지상에 노출된 시설물은 사실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닌데 이는 요새의 상당구간이 지하화되었기 때문
  공격하는 독일군 입장에서는 프랑스군 수비대의 흔적을 쉽사리 발견할 수 없는 반면 수비하는 프랑스군은 몰려오는 독일군을 훤히 감제하면서 기관총과 요새포, 대전차포의 세례를 흠씬 퍼부어주는 격이니 독일군은 막대한 사상자만을 내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독일군도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이 요새를 무리하게 정면공격할 이유 자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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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노선은 위 지도에서도 알 수 있듯 독일과 프랑스 국경지대를 따라 만리장성과 같이 띠를 이루며 배치되었기 때문에 이 요새지대를 방어하기 위해 프랑스군은 2개 집단군에서 차출한 4개 야전군( 아직 3개 야전군 56만명만을 보유한 한국군 입장에서 보자면 엄청난 병력 낭비임을 알 수 있는 대목 )이 배치되었다.
  하지만 기왕 돈들이고 프랑스가 자랑하는 건축, 토목 기술력( psm 공법 등을 개발하기도 했는데 )을 총 집약시킨 김에 연장선을 벨기에까지 확장했다면 좋았겠지만 프랑스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리고 1940년 05월을 기해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자 마지노선은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는 mg 08과 mg 08/15 기관총을 주축으로 한 독일군의 참호선에 돌격을 감행했다가 막대한 사상자를 내었고 최초의 독가스 공격까지 얻어맞아야 했다.
  그렇게 참혹했던 제1차 세계대전의 악몽을 뼈저리게 체감한 프랑스군 수뇌부는 이후 다시 전쟁이 발발하더라도 과거와 같은 상황은 재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프랑스 - 독일 국경지대에 거대한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하니 이것이 마지노선이다.
  오늘날에는 관광객들의 관광명소로 프랑스의 프랑을 벌어주는 효자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지만 축성 당시인 1927년에는 프랑스의 모든 기술력과 막대한 예산이 소모되는 엄청난 국책사업이었다.
  총연장만 750km에 이르는 이 거대한 요새선을 건설하면서 프랑스는 건축, 토목 분야에서 막대한 노하우를 습득했지만 단순히 그것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마지노선은 철저하게 수비대 위주로 구축된 요새였다.
  요새에 상주하는 수비대원들이 사실상 반지하 갱도화된 요새의 근무환경에 지루해지지 않도록 충분한 편의시설과 내무실을 마련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어지간한 폭염으로 대지가 타들어가는 여름에도 마지노선 에서 근무하는 수비대원들은 천연 에어컨이나 마찬가지인 지하의 차디찬 대기에 동사하지 않기 위해 두툼한 방한복을 착용하고 있어야 했다.
  또한 각 진지를 연결하기 위한 갱도 철도 등의 교통 시설 역시 빈틈없이 구축되어 유사시 어느 한 구간이 독일군에게 돌파당하더라도 수비대원들이 신속하게 대피할 수 있었다.
  자연히 이 호화로운 요새에서 근무하는 수비대원들에게 마지노선 근무는 오늘날 군대 용어로 "때깔"이라는 호칭이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은 격이 되었는데 이런 평화로운 시기도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완전히 깨지고 말았다.
  독일군은 비록 불완전한 전력이었으나 편제나 교육훈련 수준, 장비 면에서 제1차 세계대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폴란드군을 격파하며 소련과 부그강을 경계로 폴란드를 분할 점령하는 승리를 거두었고 프랑스와 영국은 독일과 전쟁 상태로 돌입하지만 그렇다고 상호 간에 포탄이나 총탄이 주고받는 교전 상태가 벌어진 것은 아니었다.
  독일로서는 당장 압도적인 전력을 갖춘 프랑스와 영국군에 맞서 전력을 증강시킬 필요가 있었고 프랑스와 영국의 입장에서는 선전포고는 한 입장이지만 당장 독일 본토로 진공하기를 주저하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지속되었다.
  자연 전시 소집된 프랑스 예비역들의 투덜거림은 하늘을 찔렀지만 프랑스군은 자신보다 열세의 전력을 보유한 독일군과 대치하며 1940년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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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서부전역 개전 당시 독일군의 전차 전력 중 500대도 안되는 Ⅲ호 전차와 Ⅳ호 전차를 제외한다면 사실상 기관총을 장비한 Ⅰ호 전차와 Ⅱ호 전차가 무시못할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일부 전사가들은 Ⅰ호와 Ⅱ호 전차는 전력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상황으로 어찌되었든 이 Ⅰ호와 Ⅱ호 전차를 합친 독일군의 전차 전력은 겨우 2,439대에 불과했다.
  최근 모 블로거가 리델하트의 주장을 인용해 독일이 서부전역을 3,500대의 전차로 시작했다고 하는데 포츠담의 독일군 기밀문서들이 소각되는 등 제대로된 정보가 불충분했던 시절, 연합군이 자신들의 패배를 합리화하고 독일의 군사적 승리를 퇴색시키기 위해 얼마나 왜곡과 날조를 병행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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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을 어느 정도나마 보충한 독일군은 마침내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한데 이어 본격적으로 네덜란드와 벨기에로 진격하며 서부전역의 개전을 알렸다.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는 나름대로 선방하고 있었던 독일군!
  하지만 프랑스 본토는 얘기가 달랐다.
  그들의 앞에는 마지노선이 가로막고 있었고 이 견고한 요새선을 향해 빈약한 전차 전력을 앞세워 돌격하는 것은 우리 좀 모조리 몰살시켜 달라는 요청이나 마찬가지였고 따라서 독일군은 아르덴느에 주목을 하게 된다.
  당시 아르덴느는 수차례 그 위험성이 지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 스군이나 벨기에군 병력이 많이 배치되지 않은 취약지대였기 때문에 이 곳에 주목한 독일군의 선택은 매우 탁월한 것이었다.
  문제는 독일군 내부에서 일어났다.
  기갑부대를 우선적으로 통과시켜 스당을 공략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곳의 교통로를 일반 보병사단들까지 이용하게 되면서 아르덴느에서는 심각한 교통체증이 일어나고 만 것이다.
  독일 기갑부대의 아버지로도 불리우며 "차렷! 전차!!( achtung! panzer )를 저술한 하인츠 구데리안 장군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답답한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독일군이 이처럼 시행착오를 겪으며 교통체증에 걸렸을 때 아르덴느를 공격하지 못한 프랑스군의 대응도 참으로 걸작이라 하겠는데 이는 여전히 독일군의 주공이 페도르 폰 보크 장군의 b집단군이라 오판한 연합군 수뇌부의 삽질이 낳은 결과였다.
  결국 교통체증을 돌파해 아르덴느를 통과하는데 성공한 구데리안 기갑군단은 마침내 스당과 스톤을 돌파하는데 성공, 과감한 서진을 감행함으로써 b집단군을 공략하기 위해 마지막 남은 예비부대까지 모조리 올인시켜버린 연합군의 뒤통수를 보기 좋게 강타하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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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갑과 고정식이지만 당시 모든 독일 전차를 1방에 보내버릴 수 있는 위력적인 75mm 주포를 탑재한 이 중전차는 실제 스톤 전투 등 몇몇 전투에서 독일 전차대를 유린하며 독일군을 궁지에 몰아넣었지만 무전기가 제대로 장착되지 않은데다 집중되지 못한 단차 위주의 운용으로 인해 조직적으로 덤벼드는 독일 전차대에게 하나 둘 제압당하고 말았다.
  집중시켜야할 전차대는 이미 보병부대의 지원용으로 갈기갈기 찢어놓은 바람에 공격력이나 방어력은 연합군이나 프랑스 전차에 뒤졌지만 대신 우수한 무전기로 효과적인 지휘를 하는 독일 기갑부대의 상대가 될 수 없었고( 아무리 성능이 우수한 전차라 하더라도 제대로된 지휘를 받지 못하면 무용지물임을 증명했다 ) 군수보급 체계 역시 제리캔을 이용해 효과적으로 연료를 보급 하던 독일군에 비해 프랑스군은 유조차를 이용해 전차에 각각 연료를 보급하는 어처구니없는 방식을 채용해 유조차량이 공습으로 파괴된 이후 전투에서 연료 부족으로 멈춰서는 프랑스군 전차가 속출하고 말았다.
  이처럼 전투는 점점 독일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갔고 히틀러 총통의 됭케르크 정지 명령이 아니었다면 연합군은 됭케르크 해안에서 독일 전차대에게 짓밟혀 유럽 전선은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다르게 흘러갔을 것이다.
  여기까지 이른 것만 봐도 마지노선은 1940년 프랑스 전선의 전황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프랑스군이 만약 마지노선을 포기하고 이 곳에 배치된 4개 야전군 병력을 신속하게 전환했다면 최소한 그처럼 비참하게 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무엇보다 마지노선에 배치된 4개 군의 프랑스군은 자신들의 전방에 위치한 독일군 사단이 겨우 20개도 채 안된다는 점을 알았을때 얼마나 기가 막혀했을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필자는 2007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2008년 01월 02일, 독일 연방군 대령인 칼 하인츠 프리저가 저술한 "전격전의 전설"( blitzkrieg legende )을 구입해 정독한 이후 이러한 견해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깨달았다.
  독일군은 비록 불완전한 전력이었지만 전술적인 면에서는 프랑스에 비해 혁신적이었고 초창기 수뇌부의 갈등으로 인한 시행착오에도 불구 하고 마침내 프랑스와 영국군을 격파하고 위대한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독일군이 마지노선 구간의 장갑 벙커를 특공으로 공략해 파괴하는 전과를 거둔 점으로 보아 제 아무리 마지노선이라도 결코 난공불락의 요새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준 대목이다.
  어떠한 요새나 방어진지라도 시대에 맞춰야지 변해가는 시대의 흐름에 대응하지 못한다면 유물이 될 수밖에 없음을 마지노선은 여실없이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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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년 개전 당시 독일군은 총 139개 사단의 병력만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 중 전차를 포함한 기갑부대의 전력은 영국과 프랑스군에 비해 턱없이 열세였다.
  더욱이 조공을 맡아 연합군을 유인해내는 역할을 맡은 페도르 폰 보크 원수의 b집단군은 겨우 30개 사단에 불과했으며 마지노선의 프랑스군 4개 군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은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원수의 c집단군은 아예 18개 사단에 불과했으니 연합군이 독일군의 함정에 제대로 걸려드는 실수를 저질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독일군은 취약한 전차 전력을 보병부대에 배속시키는 등의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 집중의 원칙에 따라 운용함으로써 성공적으로 전역을 종결시켰다.
  물론 스톤이나 아라스 전차전과 같은 돌발상황도 발생했지만 무전기가 제대로 장착되지 않은 영국과 프랑스 전차에 비해 말단 전차 전량에 무전기를 장착한 독일군의 혁신적인 전술운용은 결국 압도적인 전력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단 6주 만에 프랑스 전역을 석권하는 위대한 군사적 승리를 거두는 원동력이 되었다.
  프랑스 전역은 아무리 열세의 장비를 갖췄더라도 우수한 전술과 지휘관의 확고한 의지가 뒷받침된다면 승리할 수 있다는 전훈을 남겼다.
  프랑스는 마지노선을 구축함으로 안도감을 얻었지만 그로 인해 방심이라는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위험요소를 방치했고 이는 치명적인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던 것이다.
  프랑스의 전훈을 통해 우리는 아무리 열악한 장비로 무장한 적들이라도 치밀한 전쟁준비를 갖추고 엄격한 규율로 훈련되었으며 효과적인 전략·전술 체계를 구축한 상태에서 덤벼든다면 결코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특히 북한군은 비록 장비 자체는 대단히 노후화되고 일부는 예비 부품과 연료 부족으로 가동률이 극히 하락하는 실정이지만 여전히 전쟁의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경계해야할 대상이며 우수한 장비와 전력을 갖췄으면서도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술로 작전을 운용한 프랑스군 수뇌부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 그들의 초기 공세를 저지해낸 후 즉시 기갑부대를 앞세워 반격에 나서야 할 것이다.

 

《 오늘날의 마지노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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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노선 내부에는 이처럼 쇼샤 mle 1915 경기관총, mg 13, m2hb 등 당시의 무기들도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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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1927년부터 축성한 시설이라면 믿어지겠는가?
  마지노선은 당시 프랑스가 가진 모든 건축, 토목 기술력이 집약된 걸작이지만 너무나도 완벽한 시설로 인해 정작 독일군은 정면 공세도 감행하지 않을 뿐더러 이 거대한 요새를 지키기 위해 무려 4개 야전군 병력이 발을 묶어두는 전략적 실책까지 범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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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지로 변모했지만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잡초가 무성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출처http://blog.daum.net/qhdtjsghkduswjd/7012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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