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 동안 공산 측에 포로가 되었던 미군은
약 7,000명 정도 되었다.
이중 40%가 학대와 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한국군 포로의 사망률을 극히 낮았는데 이 사실로 미군의 극한 상황 버티기 능력이 이슈가 되기도 하였다. 포로들에 대한 학대는 중공군이 운영했던 포로수용소보다도 북한군이 운영했던 포로수용소가 극히 심했었다.
중공군의 벽동 포로 수용소- 앞에 압록강이 보인다.
굶주림에 시달리던 북한으로서 증오스런 미군에게도 특별히 나은 대우를 해줄 능력도,관심도 없었다. 이런 혹독한 포로수용소의 환경에 포로들은 탈출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상당수가 탈출했었다.
한국 전쟁 기록에 의하면 공산측에 포로가 된 미군의 10퍼센트인 670명이 탈출했었다.
그러나 이 탈출은 적에게 포로가 되고 얼마 안 되는 후방 후송 전이거나 최전선 야전에서 발생한 것이다. 정식 포로 수용소에서 탈출은 극히 어려웠다.
적십자사를 통해 전달되는 집 편지 나누어주기- 앞은 중공군 복장의 미군들
한국 전쟁 때 남한은 공산포로들을 미군들이 일괄 관리하여 거제도 수용소 한 곳에 수용했지만[포로 폭동 후 분산했지만] 공산측은 유엔군 포로들을 여러 수용소에 분산 수용했었다.
북한 중공군의 대부분의 포로수용소는 전선에서 아득히 먼 북쪽 압록강 연안에 설치되어있었다.
이렇게 머나먼 적의 포로수용소에서 탈출을 시도했던 사례가 무려 50여건이나 있었지만 전부 실패하였다. 험악한 지형과 현지 북한 주민들과 전혀 다른 생김새, 그리고 전선까지의 장거리가 탈출을 극히 힘들게 만들었다
극과 극 - 남북의 포로.
미군 소령에게 욕을 해대며 대드는 북한군 포로.남한의 북한군 포로들은 한국군보다 더 나은
급식을 받았고 수용소내 자유도 보장 받았었다.그래서 이렇게 간큰 포로도 나왔었고
나중에는 수용소장 도트 준장 납치 사건등이 발생하기도 했다.
전쟁 초기 중공군이나 북한군의 급식은 특히 최악이었다.병으로 죽는 포로들이 급증하자 부랴부랴 급식 형편을 개선했다. 식탁도 없이 걸인처럼 땅바닥에 앉아서 식사를 하는 미군 포로들
전쟁 발발 직후 북한 도시에 네이팜 탄을 투하하는 F 51 무스탕.
포로들이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탈출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보이는 아득히 먼 북쪽인 한 중 국경지대의 압록강의 만포진 포로수용소에서 과감히 탈출하여 북한 땅을 남북으로 가로 질러서 서울 동북방 미군 전선으로 귀환한 미군 세 명이 있다.
북한의 직동 포로 수용소
존 그래험은 장진호 전투 때 최전방까지 진격했던 해병 7연대 장병으로서 철수중 중공군에게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그래험은 철수 작전 도중 눈 쌓인 벌판에서 흰 위장포를 쓰고 접근해온 중공군과 격돌했다.
양측이 동시에 발사했고 나는 턱에 따발총을 맞고 쓰러지게 되었다. 의식이 돌아 왔을 때는 한 오두막 집안에 다른 아군 병사 여섯 명과 누어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그중에는 호수 건너편에서 우리들처럼 하갈우리 방향으로 철수하다가 적의 기습을 받고 포로가 된 육군 부상자도 있었다. 우리 모두 부상자였지만 희한하게도 내 턱은 붙어 있었다.
아마도 유탄에 맞은 것 같은데 그 충격은 기절 할 만큼 컸던 모양이다.
어쨌든 내 얼굴은 얼어붙은 피에 온통 뒤 덮여서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다.
중공군은 우리를 북한군에게로 넘겼고 놈들은 우리를 총검으로 몰아세우며 며칠동안 어디론가 데려갔다. 끌려가는 도중에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자는 총검에 찔려 죽었다.
며칠 후 한 작은 마을에 이르러서 심문을 받은 일행은 분산되었는데 나는 북한군의 포로수용소로 가는 대열 속에 끼게 되었다. 수주일간 산길을 따라서 밤에 걷고 낮에는 숨어 지내는 생활을
반복한 끝에 한 중 국경을 이루는 압록강변의 한 마을, 만포진에 이르렀다. 포로로 끌려간 해병에게나 육군에게나 그곳은 참으로 고약한 시설이었다.
페렌바크의 유명한 한국전쟁 책에 소개된 탈출한 포로들이라는사진인데 탈출 인원이 다섯명인 것으로 보아 그래함 일행은 아닌 것같다
나중에 듣기로는 이곳에 보내진 자들은 악질분자라 했으며 그래서 북한군의 지극히 ‘부드럽고 자애로운’ 대접을 받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중 한 명만은 악질이 아니었다.
변절자가 있었던 것이다. 탈출을 의논하고 있던 나는 덕분에 10일간을 땅 구덩이에
갇혀서 물만 마시고 지내며 교화를 받아야 했다.
전우들과 같이 포로가 되면 전우를 팔아서 득을 보려는
인간들이 꼭 나타나기 마련이다.
태평양 전쟁이나 대독 전쟁에서도 독일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포로중에 배신자가 꼭 나왔었다.
1976년도 사이곤이 함락되고 사이공 시에 이 대용, 안 희완등의
외교관을 포함한 수백명의 동포들이 억류 되고 말았는데
이중에 배 완용이라는 통역 출신 예비역 소령이
배신자가 나와서 월맹측에 외교관들의 신분을 밀고하는 바람에
이 대용 씨등의 외교관들은 악명 높은 치화 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4년 넘게 해야 했었다.
이자의 정체를 알아내고자 노력했지만 일찌감치 북으로
가버렸는지 알 길이 없었다.
수용소에서 23개월을 지낸 어느 겨울 날, 콜세어의 한 편대가
언덕을 넘어와 인근의 중공군 시설을 폭격하더니 또 다시
한 편대가 뒤를 이었다
인접한 건물에 네이팜탄이 떨어져 불타고 대공포가 간단없이 포효하는 소란 속에 경비병들은 살길을 찾아 우왕좌왕했다. 평소 탈출을 모의했던 우리 세 명, 뮬린스와 포드등 합 세 명의
동지 포로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만포진 수용소를 탈출하였다.
그리고 무조건 남쪽으로 달렸다. 우리는 그날 밤 밤새 걸어서 적의 추격망을 벗어났다.
날이 터오자 험한 지형의 잡목더미 속에 숨어 들어가 쉬었다. 그 뒤에도 주민들의 눈에 띄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여 숲 속에 숨고 밤에는 걸고 하는 탈출 행을 계속하였다.
배가 고프면 민가에 몰래 숨어 들어가 음식물이나 닭을 훔쳐서 허기진 속을 채웠다.
날씨는 무척 추웠으나 북극을 능가하던 장진호 호반 유담리의 혹독한 날씨에 비하면 그런대로 참을 수가 있었다. 거의 두 주일을 그렇게 남하했을 때 우리는 먼 전방에서 포화가
은은하게 들을 수 있는 것을 알고 뛸 뜻이 기뻐했다.
그러나 남으로 갈수록 적병들의 숫자가 눈에 띄게 많았다. 우리는 조심과 조심을 거듭하면서 전선으로 접근했다. 최전선 직 후방의 계곡에 숨어서 밤을 보낸 우리는 날이 부옇게 새자 적 경계선을 은밀하게 돌파하고 드디어 건너 전선에서 방어선을 치고 있던 미군들에게 구조 될 수 있었다.
그 곳은 서울 동북방 전선이었으며 우리를 구조해준 미군은 미 제 1 기병사단이었다
포로교환때 돌아온 미군포로들이 수용된 자유의 집
나는 이 고통스러운 탈출 중에 손가락에 심한 동상에 걸려 그 손가락들을 모두 잃었지만 꿈에도 그리던 자유를 찾을 수가 있었다.
일본 다치카와 기지로 돌아온 미군귀환 포로들이 수용소에서 손으로 그린 성조기를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그가 그 멀디 먼 압록강변에서 탈출해서 주민들이나 추격대에게 안 되고 전선을 통과해서 돌아 온 것은 기적같이 만 생각된다.
탈출한 국군이라면 모를까 한눈에 보아도 확연히 티가나는 미국인의 얼굴로 발각되지 않고 한반도 북반을 가로 질러 남하하였다는 사실도 믿어지지가 않다.
낮에는 숨고 밤에만 남하하는 용의주도한 조심성이 이들의 탈출을 가능케 한 것이라고 믿어진다. 특히 지도도 없이 정확히 남으로 올 수 있었던 것은 탈출 일행 중에 별을 보고 방향을 아는 사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함은 현재 79세의 나이에 몬타나 주의 카네지 읍에서 생존해 있다. 위는 카네지 읍내 주민이며 조각가인 그래이저가 그래험의 과거를 알고 그에게 헌정한 독수리 조각상. 그래함은 건강이 좋지 않아 그의 아들 존 H. 그래험[왼쪽]이 받았다.
자료제공 : 야후/울프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