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최초 항모 '비크란트' 이야기

릴리알렌 작성일 09.12.23 01:5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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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항공모함 보유 역사는 예상외로 깊다. 이미 1961년부터 항공모함을 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후진국들의 항모 보유가 대체로 실패하거나 돈 들인 보람이 없는 사례가 많은 반면 인도는 나름대로 돈 들인 값어치를 실전에서 했다.

 

어떻게 보면 정규 항모를 보유하지 못하는 나라들이 왜 경항모라도 가지려 하는지 보여주는 사례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운이 좋은 면도 있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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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최초의 항모 비크란트. 원래는 영국 경항모 머제스틱급중 한척인 ‘허큘리즈’였다. 사진은 아직 씨 호크와 알리제가 현역이던 시절의 것.

 

 

인도가 보유한 최초의 항모 ‘비크란트’는 사연이 좀 기구하다. 원래는 영국의 경항모였기 때문이다. 2차 대전중 영국은 항모 부족사태를 깨닫고 급한대로 미국제의 호위항모를 대량으로 얻어 썼지만 한 편에서는 독자적으로 경항모인 머제스틱급을 건조했다.

 

머제스틱급은 전쟁중에 급하게 설계됐다고는 하지만 현대 항공모함의 발상지인 영국의 설계답게 14,000톤급의 배수량과 25노트의 속도, 밀폐형 격납고와 장갑화된 비행갑판등 전반적으로 견실한 배였다.

 

아마도 당시의 경항모 클래스에서는 세계 최고의 수준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1943년부터 6척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머제스틱급의 운명은 단 한척을 제외하고는 신통치 못했다. 완성되기 전에 전쟁이 끝나면서 단 한척도 영국 해군에서 항모로 취역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나고 심한 경제난에 직면한 영국 정부는 이 항모들을 직접 쓰는 대신 여러 영연방 국가들에 빌려주거나 팔아넘겨버렸으며 한 척은 아예 건조 자체가 중단되어버렸다.


비크란트는 원래 그 중 한척인 허큘리즈(만재 배수량 19,500t, 최대 길이

 213m)였다. 2차 대전의 종결과 함께 건조가 중단되어 조선소 도크에 방치되어있던 것을 1957년에 인도가 구입, 4년에 걸쳐 대대적인 개조에 들어갔다.

 

이제 제트기를 운용해야 하는 만큼 새로운 경사갑판과 착함구속장치, 광학식 착함 지시기, 증기 캐터펄트등을 장착해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허큘리즈는 1961년 11월부터 비크란트(힌두어로 ‘한발 앞서 나간다’는 뜻)라는 이름의 인도 해군 항모로 거듭나게 됐다.

 

그러나 당시 인도 안에서도 찬반 양론이 만만치 않았다. 비크란트는 당시 인도 해군이 보유한 가장 비싼 무기체계였는데다 경항모라는 한계상 함재기의 성능과 숫자도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비크란트에 실린 함재기는 영국제 호커 씨호크, 프랑스제 알리제 대잠초계기, 그리고 2대의 알루엣3 헬기였다.

 

숫자 자체도 상당히 빈약한 편이지만 탑재된 주력 전폭기인 씨호크는 기관포와 폭탄, 로켓 정도로만 무장한 아음속기로 똑같은 아음속기라 해도 미그15나 F86등과 만나면 불리할 수 밖에 없는 직선날개의 초기 제트기였다.

 

- 영국 해군에서는 운용된지 7년만에 일선에서 은퇴가 시작될 정도였고, 대부분의 다른 운용국(독일이나 네덜란드등)도 1960년대 중반까지 퇴역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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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크란트의 주력 함재기였던 호커 씨 호크. 인도 해군에 취역할 당시에도 구식 기체 취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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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제의 대잠초계기, 알리제. 알리제는 작은 크기에 비해 우수한 성능을 가지고 있어 인도처럼 작은 항모를 운용할 수 밖에 없는 나라들에게 매우 요긴한 함상 대잠전력이었다.

 

 

이런 빈약한 성능이기는 해도 가상적국인 파키스탄의 해군력은 인도보다 훨씬 뒤떨어졌고, 인접국 중국 역시 당시에는 해군력이 바닥이던 상태라 일단 파키스탄이나 중국 공군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해역에서라면 비크란트는 나름대로 의미 있는 전력이었다. 게다가 오래지 않아 이 배는 뜻하지 않은 전과를 올린다.

 

취역한 뒤 4년이 채 안되어 맞은 첫 번째 실전, 즉 1965년의 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 파키스탄은 비크란트를 격침시켰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드라이도크에서 수리중이어서 아예 전투에 참가하지 못했던 비크란트인지라 파키스탄은 거꾸로 망신만 당했다.

 

1971년 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터지자 비크란트는 비로소 실전에 투입됐다. 18대의 씨 호크와 4대의 알리제 대잠초계기를 싣고 동부 파키스탄(오늘날의 방글라데시)의 해안 지역에 있는 주요 항구인 콕스 바자르와 치타공을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인도 해군은 최초의 실전을 반기면서도 불안한 기색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고 한다. 이미 1971년이면 주력 함재기인 씨 호크는 완전한 구식이고, 만의 하나 파키스탄 공군의 F-104와 같은 전투기와 만난다면 도저히 살아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전투기는 둘째 치고 상대가 지대공 미사일이라도 쏜다면? 심지어 아음속의 구식 기체인 씨 호크로서는 적 대공포 사격조차 상당한 위협으로 다가올 판이었다.

 

사실 인도 해군이 가진 불안감은 만만치 않았다. 실제로 파키스탄은 비크란트의 행방을 눈에 핏발을 세우고 찾았고, 인도 해군도 전면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2월 2일에 비밀리에 비크란트및 그 호위함들을 출격시켜 파키스탄이 먼저 대응하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이틀간의 항해 끝에 목표 주변에 도달한 인도 해군의 비크란트 항모전단은 12월 4일 오전 11시에 공격 제1파가 첫 번째 목표인 콕스 바자르의 비행장을 향했다. 그리고 14시에는 두 번째 목표인 치타공을 향한 공격 제2파를 발진시켰다.

 

놀랍게도 인도 해군기들은 적 전투기는 커녕 대공포화조차 거의 만나지 않았다. 인도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이 지역에 인도군의 공습이 있으리라고 생각한 파키스탄군 관계자가 없었던 것이다.

 

뜻하지 않은 행운을 만난 인도 해군의 씨 호크들은 비행장과 항구등의 목표를 마음껏 폭격했고, 특히 항구의 초계정등 무장 선박들은 집중적인 표적이 되었다. 하지만 파키스탄군의 방공전력과 공군력은 훨씬 서쪽에서 벌어지는 인도 공군과의 대결에 쏠려있었고, 인도 해군의 씨 호크들은 졸지에 동부 파키스탄 인근 해안지역의 제공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호랑이가 없는 곳에서 여우가 왕이 된 셈이기는 했으나 어쨌든 현실적인 힘의 우위는 무시할 수 없는 법. 공격이 시작된지 48시간 뒤에는 이 지역에 정박해 있던 파키스탄측의 해군함정과 항공기 대부분이 파괴되면서 비크란트및 호위함들은 해안으로부터 70km정도까지 접근할 수 있었고, 비크란트의 함재기들은 이제 최대 무장탑재량만큼 폭탄을 매달고 마음껏 폭격에 나섰다.

 

문자 그대로의 완벽한 기습에 허를 찔린 파키스탄은 잠수함으로 반격했다. 사실 파키스탄 해군은 잠수함 ‘가지’를 출동시켜 비크란트가 모항인 비샤카파트남에서 떠날 때 격침시키려 했지만 막상 도착한 날인 12월 3일에 비크란트및 호위함들은 이미 항구를 떠난 뒤였다. 가지는 결국 이 날 인도 해군에게 발각되어 격침당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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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해군의 잠수함 ‘가지’. 1945년에 건조되어 1963년에 파키스탄에 양도된 미국제의 텐치급 잠수함(원래 명칭은 USS 디아블로)으로, 비크란트를 격침시키려 했으나 거꾸로 격침당한다.

 

 

나중에 다른 파키스탄 잠수함이 비크란트를 노린 듯 하지만 2차 대전 당시에 건조된 구식 잠수함의 성능에는 한계가 있었던 듯 하다.

 

한 번은 비크란트를 호위하던 구축함의 함포 사격에 도망쳤고, 또 한번은 잠수함으로 보이는 물체를 발견한 호위 구축함의 요청으로 비크란트에 탑재된 알리제 대잠초계기가 발진한 일이 있으나 특별한 전과 없이 돌아왔다.

 

어쨌든 12월 10일까지 비크란트와 그 호위함들은 동부 파키스탄에서 마음껏 작전을 펼쳤다. 단 한 대의 탑재기도 격추되지 않았고, 이 기간동안 동부 파키스탄 지역의 제공권과 제해권은 완전히 인도의 손에 넘어갔다.

 

물론 전쟁의 승패가 이것 하나만으로 좌우된 것은 아니겠지만, 인도-파키스탄 전쟁의 향방에 비크란트의 존재가 무시 못할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었다.

 

대체로 파키스탄에 불리하게 전개된 전쟁 속에서, 다른 곳도 아니라 파키스탄의 동쪽 끝까지 인도에게 일방적으로 공격당할 수 있다는 사실은 파키스탄에게 큰 압박이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인도-파키스탄 전쟁은 그 뒤 20일에 인도에게 매우 유리한 상황에서 멈췄고, 비크란트가 공격했던 동부 파키스탄 지역은 인도의 후원을 받아 방글라데시로 독립하게 됐다.

 

비크란트는 비록 그 시점에서조차 구식인 배(탑재된 함재기까지 포함해서)였지만 항공모함으로서 요구된 전략적 능력을 보라는듯이 수행한 것이다.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끝난 뒤 비크란트와 그 승조원들은 말 그대로 인도의 영웅이 되어 귀국한다. 동시에 비크란트의 존재가치에 대한 의문도 사라졌고, 인도 해군은 항모를 계속 보유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물론 돈이 넉넉하지 않은 인도 해군으로서는 비크란트가 한동안 유일한 항모였다. 워낙 오랫동안 운용되다 보니 1979년부터 1982년 사이에는 대대적인 수명연장 공사를 벌이면서 엔진도 교체하는 등의 현대화 개조를 받았고, 1983년부터는 또 한번의 개조를 거쳐 절망적으로 구식화되어 있던 함재기 씨 호크를 훨씬 현대적인 씨 해리어로 바꾸게 되었다.

 

1989년에는 대잠 초계기로 쓰이던 알리제까지 퇴역하고 그 자리를 씨킹 대잠헬기가 메꾸면서 더 이상 캐터펄트가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캐터펄트를 없앤 비크란트에는 스키 점프대가 설치되었고, 이것으로 비크란트는 V/STOL기 운용에 적합한 경항모로 변신했다.

 

물론 이런 개조를 거쳤다 해도 비크란트가 현역 항모로 운용되기에는 이미 심하게 무리였다. 90년대 초반에 이르면 비크란트는 도크에서 수리를 받는 시간이 출항하는 시간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전형적인 ‘죽기 직전의 배’ 신세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인도 해군은 최소한 비크란트보다는 상태가 나은 항모 ‘비라트’(이것도 영국 항모 ‘허미즈’를 구입한 것이지만)를 1987년부터 실전배치할 수 있었고, 그때부터 비크란트는 훈련 항모로서의 역할이 더 중시되면서 노후화에 따른 부담을 한 숨 덜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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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해군이 비크란트의 뒤를 이어 취역시킨 비라트. 이것 역시 영국 해군의 ‘허미즈’를 중고로 도입한 것이다.

 

 

1997년, 마침내 비크란트는 인도 해군에서도 퇴역했다. 진수된지 52년, 인도 해군에 취역한 시기만 따져도 36년만이라는 긴 운용 끝의 일이었다.

 

하지만 비크란트는 비슷한 시기에 건조된 다른 영국 항모들(특히 다른 머제스틱급들)에 비해 끝까지 운이 좋았다.

 

1940~50년대에 건조된 영국 항모들은 사실상 전부가 퇴역한 뒤 해체되어 사라졌지만, 비크란트만큼은 인도 해군에서의 빛나는 전과를 기려 뭄바이 항구에 정박된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비크란트는 2차 대전중에 건조된 영국 항모로는 사실상 유일하게 아직까지 존재하는 배인데, 이 정도면 ‘팔려 나간’ 배로서는 보기 드물게 성공한 인생(함생?)을 보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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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뭄바이 항구에 박물관으로 보존되어있는 비크란트. 비슷한 시기에 건조된 영국 항모들 중 오늘날까지 보존된 배는 이것 단 하나뿐이다. 함수에 해리어 운용을 위해 89년에 추가한 스키 점프대가 보인다.

 

 

 

여담이지만, 비크란트라는 이름은 2012년부터 현역 항모로 다시 부활하게 된다. 인도 최초로 독자 건조하는 항모가 비크란트로 결정됐기 때문이다.

 

인도는 러시아의 키에프급 항모를 개조해 도입하는 것은 물론 비크란트급 항모(현재 확정된 숫자는 두 척)를 직접 건조해 항모 전력을 대대적으로 늘리고 있는데, 단지 항모의 숫자만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배수량(4만톤급)도, 또 함재기의 수준도(MiG-29K) 대대적으로 업그레이드될 예정이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런 항모 전력의 업그레이드는 물론이고, 인도해군에서 항모 전력의 존재 자체가 유지된 것도 비크란트가 1971년에 보인 선전 덕분이니 인도 최초의 자체 건조 항모에 비크란트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충분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출처  유용원의 군사세계    홍희범의 밀리터리 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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