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Cold War 의 시기는 미국을 주축으로 한 서유럽과 소련을 주축으로 한 동유럽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세력을 견주는 냉전보다 더욱 살벌했던 남한과 북한의 적대적 시기에는 실질적인 참상이 더욱 많았던 듯 하다.
60년대와 70년대에는 남과 북, 서로 상호비방하고 귀순을 권고하는 삐라가 성행했으며 전방지역의 산과 들은 새벽이면 날아온 삐라가 하얗게 깔렸던 기억이 새롭다. 언제부터인지 삐라를 주워오는 학생들에겐 학용품을 나누어주는 제도도 있었고 군인들이 학교에서 삐라줍기를 독려하던 시기도 있었다.
아래 사진은 전방지역 무슨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삐라를 찍은 사진들이다. 삐라는 흑백으로 된 것이 많았으나 이곳에는 컬러사진으로 인쇄된 것이 이채롭고 한결같이 용모가 단정한 미인들을 모델로 내세운 것이 특징이다.
삐라를 부려서 자신들의 환경을 소개하고 특히 전방지역 경계병력들을 대상으로 삐라를 소지하고 귀순하면 생활보장과 함께 아름다운 미녀들과 더불어 새삶을 보증한다는 그런 내용들이다.
위의 사진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TV 탤런트 고두심 아줌마의 젊은 시절 모습인듯 보인다.
남한에서 북으로 보낸 삐라인데 보상금을 순금으로 환산하면 대략 1 kg 가까이 지급한다는 내용이 있다. 현 싯가로는 몇천만원에 해당하는 금액일 것이고 당시의 경제사정에 비교한다면 수억원에 비교될 수 있을 금액이다.
북한공군 조종사 이웅평씨가 미그기를 몰고 귀순하여 스키장에서 리프트카를 타고 올라가는 것을 선전하는 삐라로서 남한에서 북으로 보낸 것이다.
이당시만 해도 귀순용사들은 영웅 대접을 받았으나 이후 남북관계가 화해적인 방법으로 선회하여 의식의변화가 많아서 이들도 사회적으로 냉대를 받던 시기도 있었다.
1950년대 미그기를 몰고 귀순하여 당시로서는 엄청난 거금인 15만 달러를 상금으로 받았으며 이후 미국으로 이민하여 삶의 터전을 마련한 분이 있었는데, 성함이 노금석이었는지 성낙현이었는지 정확한 기억은 하지 못하지만, 오래전 뉴욕시 브롱스의 한인교회를 다녔었다.
사진의 모습은 남한 군인이지만 이북서 날려보낸 삐라로서 특징은 강력한 문구를 사용하여 욕설이 인쇄되어 있다.
1950~1960년대 남한의 실업률과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북한으로의 귀순을 조장하는 삐라의 모습이다.
남,북한 간의 삐라는 선동을 목적으로 하는데 실제로 남한으로 귀순한 군인들도 많고, 이북으로 월북한 군인들도 많던 시절이었으며 전방지역에 근무하던 미군장병도 월북하기도 했었다.
내 어릴 때 삐라의 내용은 김일성 장군님 품에 살고 기와집에 이밥 '쌀밥'에 쇠고기국을 먹으면서 지상낙원을 이룩한다는 문구가 빠진적이 없었는데, 어쩐 일인지 쌀밥은 고사하고 옥수수도 제대로 먹을 수 없어 굶어죽어가는 인민들이 그렇게 많은 것인지...
그들이 내세울 수 있는 미인들을 선발해서 모델로 삼았으며 여인들은 당시 인기 영화배우등이 주종을 이루었다.
이제는 이런 조잡한 삐라가 사용되지는 않겠지만 철책선에서 근무하는 군인들 중에는 선전에 혹해서 동료를 죽이고 도망치거나 홀로 도망쳐 자신만 잘살겠다는 이기심을 품고 도망친 사례들이 많았다.
북한서 귀순한 월남자의 가족들은 공개총살형에 처하여 귀순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잔혹하게 다루었으며, 남한에서 북으로 간 월북자 가족들은 '연좌제'에 연루되어 공무원이 될 수 없었으며 해외여행을 하지 못하고 늘 감시당하며 살던 불행했던 시기였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우리의 불행했던 과거를 전설 속에 있던 이야기로 알지만 부모님 세대에는 서로 비방하고 죽이고 죽는 안타까움이 많았던 시기였다. 뉴욕의 지인 중에 70년대초 친척이 납북어부로서 한달만에 풀려난 전력이 있었는데 그당시 엄청난 고생을 했다고 하며, 이후로도 그의 가까운 친척들까지 감시당하며 살던 이야기를 들려주던 전라남도의 어느 아저씨...
이제는 서로 적대감을 품지말고 강대국들의 눈치를 살펴서 통일할 생각을 말고 남북한 정치인들이 오픈된 마음으로 만나 서로의 고충을 들어주면서 민족의 동질성에 호소하여 조속히 통일을 이루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자료제공 : 야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