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29의 위엄 두번째 이야기

킬링필 작성일 12.01.01 15: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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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글은 디시인사이드 2차대전 갤러리 쉬발라님 글을 퍼왔습니다.

gall_bt.gif 짤방> B29의 요코하마 폭격사진. (짤출. 라이프2차대전사. 이글 전체의 출처도 그 책)
자, 과연 저 자욱한 폭연 밑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을까요? 우리 이쁜이들 준비됬나? 그럼 다함께 밑으로 내려가 보자.


영화 진주만에서 다들 봤다시피, 최초의 일본 본토 공습은 1942년 4월 18일의 둘리틀 폭격대에 의한 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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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8일 정오.. 상업 고등학교 학생인 17세의 이다 미노루가 기왓장 작살내는 폭음소리에 창문으로 달려가보니, 웬 엔진 두개 달린 뱅기가 지붕위를 스쳐날라가는 게 아닌가, 이런 씨빠빠!! 뱅기에 하얀 별이 그려져 있다!! 저게 바로 쌀나라 뱅기?!! 그 순간 항공기 옆구리에서 검은 깡통들이 후드득 쏟아져 내리는 게 아닌가! 그중 한 개가 집 지붕위에 떨어져서 처마에 걸렸다. (근데 이 쉑은 왜 학교 안가고 집에 짱박혀 있던 거지)
우리 이쁜이들 같으면 뒤도 안돌아보고 컴퓨터챙겨서 토셨겠지만, 미노루 이 햏자는 평소에 방공 연습에 착실히 참여했기 때문에 저게 3kg소이탄이란 걸 알아보고 얼른 집에 있는 모래 양동이를 들고 뛰어올라가 빠지직 거리며 덜덜떠는 폭탄에 모래를 퍼부어서 껐다.
가까온 도로에 떨어진 소이탄 2개도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와서 종이 부대에 담긴 모래로 블로킹했다.

일본이 최초로 겪은 이 공습은 1시간만에 끝났고 12명이 죽었다. 경미한 피해이긴 한데... 일본 햏들이 겪은 충격은 상당한 거였다. 방공 연습같은 거야 그냥 시키는 거니까 시키는 대로 하긴 했지만, ㅅㅂ 실제로 미국 햏들이 여까지 날라와서 폭탄을 던지고 갈 줄이야.. 그래서 사람들이 종니 흥분해가지고 평소에 방공 연습때 하던 거 다 잊어버리고 우르르 옥상에 올라가서 뱅기 구경하면서 꺅꺅 거렸지. 사이렌 울리자 방공호에 들어간건 종니 모범생 초딩들 밖에 없었다.

이다 미노루와 기타 등등의 사람들이 소이탄을 모래 양동이로 끄는 데 성공하는 바람에, 사람들은 소이탄 그 까이 꺼 걍 살포시 밟아 꺼줌 되겠네- 라는 그릇된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치만, 생각있는 사람들은 종내 덜덜덜 걱정했지. 도쿄라는 도시가 500평방km의 널찍한 평지에 나무와 종이로 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거대한 불쏘시개 라는 걸 아는 거다. 일본 집이라는 게 죄다 나무벽에 종이 창에, 짚으로 짠 다다미로 덮여있고, 부엌에서는 숯을 때거나, 한뼘도 안되는 깊이로 매설되어있는 가스관으로 가스를 끌어다 쓰고 있잖냐.
그래서 예로부터 도쿄에서는 대화재가 자주 났다. 대화재가 자주났는데도 소방시설은 빈약하기 짝이 없었음이다. 더구나 전쟁 무렵에는 소방 설비 유지요원들이 군대에 입대해버렸기 때문에 소방차의 20%는 수리 대기 상태였고 소방대의 지휘도 대개 군사훈련에만 관심있는 자들이 맡았기 때문에 소방대는 소방훈련보다 군사 훈련을 더 많이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군 지도부는 도쿄를 태워먹지 않기 위한 가장 확실하고 간단한 방법을 제시하였으니... 당연히 적 폭격기가 도쿄를 때릴 수 있는 범위 안에 적 기지가 없으면 되는 거 아냐?
대륙에서는 버마까지 밀어버렸고, 밑으로는 뉴기니까지 밀어버렸으니 이거 참 쇠고기 안심이로구먼. 둘리틀 씨빠빠가 핳공모함에서 떴다고? 야마모토 햏, 미드웨이에서 그 미군 핳모들 다 뽀개주셈~
미군 핳모들을 뽀개는 건 실패했지만서두... 미군도 둘리틀의 맨땅에 니킥넣기를 되풀이하진 않았다. B29 완성시킬 때까지는 참고 또 참는 거야. 베틀크루저 나오기만 해봐라, 쪽발 햏들, 해리 포터와 불의 잔을 원샷하게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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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9와 제로기와 보잉747의 크기비교

둘리틀 폭격대의 공습이후, 일본 정부는 공습 대책을 개선하기 시작했다. 그 핵심 내용은- 10~12대 세대를 한 단위로 묶은 동네 반상회가 주축이 되어서 이 반상회 회장님이 각 가정마다 모래, 물탱크, 양동이, 삽, 빗자루 등등의 방공장비를 잘 구비하고 있는 지 감독하게하고- 반상회별로 양동이 릴레이 훈련을 실시하고 등화관제 규정에 대한 상 벌점 표를 만들어서 상호 체크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기적인 행동을 삼가고, 이웃을 방어하기 위해 단결하겠다]- 라고 서약하는 "필승의 방공선서"를 모든 시민들이 엄숙히 선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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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 진압 연습을 하는 반상회 회원 아줌마들. 아직 B29 구경을 못 해본 시절.


반상회 회장이 하도 들들 볶는 통에, 도쿄 시민들은 씨부렁거리면서도 결국 엉성한 방공호를 집집마다 파긴 팠다. 그 위에 널빤지를 덮고 그 위에 흙 둔덕을 쌓은 다음, 미관을 위해 그 위에 꽃과 야채를 재배하도록 권장되었다.
이 방공호 지붕은 방공 연습 때, 사람들이 들어가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그 위에 올라가 서있는 장소로 변했으니, 아무도 그 축축한 방공호 속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사람이 없었거든 (도쿄는 토질이 습해서 당장 지하수가 고였다). 그리고 어차피 불나면 다 뛰쳐나와서 소이탄 끄고 양동이 릴레이해야 하니까 지상에 나와있어야 됬거든.
시 당국은 물건 사러나왔다가 공습에 걸린 시민들을 위해 상점가에도 참호를 파게 했는데, 아 놔, 도데체 물건 사러나왔다가 참호에 떨어져서 발 뿌러먹고 머리 깨지고, 이게 뭔 삽질이래? (참호는 확실히 삽으로 팠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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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렇게 인도를 다 파헤쳐 참호를 파놨따.
일정한 간격을 두고 놓인 큰 방화수 탱크에 대해서도 원성이 높았으니, 거기 괸 썩은 물이 모기떼를 들끓게 한 것이다.... 그렇지.... 이때는 아직 1943년. 모기를 욕할 여유가 아직 있었음이야.

1943년 말에는 내무성이 도쿄에 방공 총본부를 설치했고, 이 방공 총본부가 맨 처음 한 일이 뭐냐면- 도쿄 지도를 펼치고- 지도위에 가로 세로 줄을 바둑판처럼 촘촘히 그은 다음에 그 선에 걸려있는 집은 다 헐어버렸어.
불이 날 경우에도 그 빈 공간에 막혀 불이 더 번지지 않게하기 위한 방화대를 짠 것이다. 헐린 집에 살던 2만명은 정부가 제공하는 폐가에 입주하거나, 자력으로 새 집을 알아봐야했다. (전체주의 체제는 확실히 위에서 다스리기에는 편한 체제군)

드디어 1944년 6월 16일에 일본 하늘에 B29가 처음으로 등장!
뭐 야와타 제철소등 규슈 여기저기를 까러 왔다는데, 뭐 별로 큰 피해는 없었음이야. 중국에서 날아오니까 너무 멀어서 규슈넘어 도쿄가 있는 혼슈까지는 오지도 못하고, 제대로 작전 기동하기도 빡세고, B29승무원들도 아직 이 아쎄이 뱅기 모는 게 능숙하질 않았고, 까마득히 높은 데서 떨구다 보니까 폭탄도 제대로 맞지도 않았던 게지. 빗나간 폭탄이 주택가에 떨어져도, 잘 훈련받은 반상회 회원들이 간단히 불을 껐던 게지.

그러나... 미군이 드디어 사이판과 티니언 섬에 상륙했다. 도쿄에서 2000km 밖에 안 떨어진 곳이야..... B29항속거리는 5600km고.
양퀴햏들이 순식간에 사이판과 티니언에 수백대의 B29를 주차시킬 비햏장을 만들기 시작했고, 도쿄의 고위층들은 드디어 '젖땠다'- 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거지.

그래서 일본 지도부 내에서는, 언제부터 상황이 이렇게 쥐를 쳐맞게 꼬였나 서로 탓하기 시작했다.
ㅡ븅신들아, 내가 보르네오까지 병력 다 빼랬잖아 ㅡ씨파... 미드웨이에 나구모 씨빠빠 보낸 넘이 누구냐, ㅡ아흐.. 애초에 진주만부터가 실수였다니까 .. ㅡ븅딱들이 만주국 놀이 할 때부터 알아봤지... ㅡ메이지 유신때부터 좀 착하게 살아보자니까.....ㅡ사무라이 전통이 쫌 거시기하긴 거시기하지... ㅡ내 생각에는 나무에서 내려온 게 가장 큰 실수였던 거 같다.

그렇게 서로 탓하기 다툼 끝에, 결국 도조 히데키가 1944년 7월18일 수상직을 사임했다.
후임으로 조선 총독이었던 고이소 구니아키 장군이 수상이 되었지만, 이 양반이라고 뭐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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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감이 고이소 구니아키 수상

드디어 1944년 11월 1일에 최초로 도쿄 상공에 B29 한대가 나타났다. 폭탄 떨구러 온건 아니고, 도쿄 방공체계가 얼마나 허술한지 사진 찍어가러 온 거였다.

11월 중순에 6대의 B29가 다시 리허설을 위해 도쿄에 나타났다. 이때도 폭탄은 안 뿌렸다. 때마침 점심시간이라서 사람들이 길가에 모여 그것들을 구경했다.
청명한 가을하늘에 아련한 엔진음을 남기며 날아가는 은빛 반짝임.
솔직히 그 광경 자체는 너무나 아릅답게 보였기 때문에 구경하던 사람들은 찬탄을 감출 수 없었다.
(요격하러 뜬 일본 전투기들은 그 근처에도 닿지 못했고....)

그리고 11월 24일 94대의 B29가 도쿄 근처의 공업지대 상공에 출현해 폭탄을 떨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도 도쿄 시민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니....
사람들은 방공호로 들어가지 않고 B29를 구경하러 죄다 뛰쳐나왔다. 경찰은 사람들을 방공호에 몰아넣기 위해 계속 호루라기를 빽빽거려야 했고, 사람들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구경하려고 빌딩 옥상들에 다닥 다닥 붙었다.

아직은 도쿄 시 외곽의 공장, 군사시설들만이 B29의 목표였고, 가끔 주택가에 잘못 떨어지는 폭탄은 거기 사는 사람이 운이 나빴다고 밖에 할 수 없었다. 안전하게 초고공 폭격만을 고집한 B29가 무사시노에 있는 거대한 나카지마 비행기 공장에 폭탄들을 떨궜지만- 그건 마치, 우리 이쁜이가 15층 아파트 옥상에서 50원짜리 동전을 던져서 지나가던 초딩을 맞추려는 시도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해보지는 말것. 맞으면 진짜로 죽을 수도 있다).
가끔 경량의 마그네슘 폭탄이나 인(燐)폭탄이 튀어올라 지붕위에 떨어지거나 지붕을 뚫고 떨어질 때도 있었는데- 자루가 긴 대걸레나, 축축한 가마니등을 즉각 사용하면 끌 수 있었다.

사실상, 도쿄 시민들은 B29의 공습에 놀랐다기 보다는 차라리 매혹당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 우리들은 이러한 초기의 공습 때 흥분과 서스펜스를 느꼈다. 오히려 모험감을 맛보았고, 민간인으로 있으면서도 전쟁의 스릴을 겪는 짜릿함에 심장이 두근두근 거렸다."
-B29 구경 마니아였던 가토 마스오 기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렇듯 B29를 즐겼던 거지.
사람들은 공습의 패턴을 파악하고 거기에 생활 패턴을 맞추기 시작했다. 보통 낮의 공습은 점심시간에 2~3시간 정도 계속되었다. 11월과 12월의 도쿄 공습은 .. 우연인지 일부러 그랬는지 모두 3의 배수 날이었다. 즉, 3일, 24일, 27일, 30일.... 주부들은 이런 3의 배수 날의 정오부터 3시까지는 집에 박혀있었다.

야간 공습기는 '거룩한 방문객' 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웠는데, 그것도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으니, 사람들이 11시 30분 전후의 공습 사이렌 이전에 조금만이라도 자두기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게 되었고, 사이렌이 울리면 우르르 현관이나 방공호 지붕에 올라가서 밤하늘에 펼쳐지는 화려한 만화경을 감상하는 거지.
탐조등 불빛의 대각선들이 이리저리 밤하늘을 가르고, 대공포화는 불꽃놀이처럼 빵빵 터져대고, 급상승하는 전투기, 멀리 보이는 화재의 불길 등등은... 자신들이 그 불길속에 있게 될 날이 오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에게 '전쟁 구경'의 흥분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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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에 설치된 '방공포대'..........

미 육군 항공대는 일본의 항공기 산업을 절딴내려고 계속 B29를 날려 보냈지. 무사시노의 나카지마 항공기 공장, 오무라,고베,오사카 등징의 항공기 공장을 노린 공습이 계속되었는데, 이 놈의 B29가 초고공을 날아서 좋긴 한데, 그 높이에선 폭탄을 던져도 목표에 맞질 않는 거다. 명중탄 비율이 20% 이하로 나타난 게야.
거기에 더해 두꺼운 구름까지 끼면.... 1945년 1월의 어느 흐린 토요일에 15대의 B29 편대가 무사시노 공장을 폭격하려고 했는데, 밑이 보이지도 않았지. 그냥 아무데나 던졌는데 그게 도쿄 한복판이었어.
마침 도쿄에서는 군중들이 방공 사이렌의 해제소리를 듣고 우르르 거리로 다시 나왔는데, 폭탄 무더기가 5번가 긴자 한복판에 떨어진거야. 지하철 역이 직격탄을 맞아 수백명이 죽었고, 극장안에서 또 수백명이 죽었고, 고가 전철 철교 밑에서 또 수백명이 죽었어.
무사시노 공장은 단 한발도 안 맞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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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9한대에 대략 저만큼의 폭탄이 들어간다.


육군 항공대의 B29가 그렇게 삽질하고 있을 때,... 2월 17일에 해군 항모에서 출격한 해군 함재기 편대가 무사시노 항공기 공장을 때렸어. 단 1회의 폭격으로 6차례에 걸쳐 수백대의 B29가 때린 피해보다 훨씬더 막대한 피해를 입혔지. 헬캣과 커세어 전투 폭격기는 저공으로 공장상공으로 진입해 들어와서 무사시노 공장의 항공기 생산 라인을 죄다 아작내버린 거야.

일이 그렇게 되버렸으니.... B29 체면이 그냥 씹창난거지. 아 씨... 저 기름만 잡아먹는 물덩치, 그냥 수송기로나 쓸까?
그러나, 하늘의 싱하형- 리메이 장군이 1월에 새로 21폭격사령부 사령관으로 임관해왔다! 형왔다 . 45년 8월 15일까지 존내 떨어라.
(리메이 햏의 애정어린 폭격에 대해서는 이전 글들 참조)
리메이 햏은 일본의 도시 그 자체를 표적 삼아 저공 폭격으로 몽땅 지져버린다는 깜찍한 전략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제 그걸 시작할 참이다.

2월 25일. 시험적으로 도쿄의 공장들과 노동자들의 목조 주택을 지져버리기 위해 B29 편대가 대량의 소이탄을 떨궜다. 이 230kg 짜리 소이탄 깡통들이 9000m 상공에서 떨궈졌는데, 때마침 몰아친 센 바람이 이 소이탄들을 대부분 도쿄만과 농촌쪽으로 몰아붙여서 도쿄에는 몇개 안 떨어졌다. 230kg 짜리 쇳덩이도 9000m 상공에서 떨어뜨리면 추풍낙엽처럼 바람타는 법이다.

그러나... 리메이햏은 아직 진짜 카드를 꺼내지 않았다. 다음에는 B29들이 훨씬 낮게 날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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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47소이탄은 30kg의 양철통으로, 지상 30m에서 폭발하면서 네이팜을 넣은 길이 60cm의 긴 원통 수십개를 광범위하게 뿌리도록 장치되어 있다. 그 원통들이 충격을 받으면 불타는 네이팜을 토해내고, 처음에는 파란 불꽃들이 수없이 파닥거리다가 순식간에 뭉쳐 거대한 불길이 된다.
후속 폭격기들은 그 M47이 만든 화염을 겨냥해 M69라는 다른 형태의 소이탄을 투하하는데- 이것은 기름을 담은 3kg짜리 깡통이다. 그것도 백열광같은 불빛을 내며 공중에서 터지며 돌풍같은 불길을 일으킨다.
화염은 도로를 따라 번지고, 뒤따라오는 폭격기들은 점점 커지는 화염의 가장자리에 폭탄들을 투하해 화염의 범위를 더욱 넓혀간다.

운명의 그날.

1945년 3월 9일. 심판의 금요일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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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의 밤하늘에 강림하는 심판의 천사 (공중에서 불이 붙은 채 쏟아지는 네이팜탄)

이날은 새벽부터 초봄의 산들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오후부터는 3월의 거센 바람이 일기 시작하여 저녁에 접어들면서 바람은 점점 더 강해졌다. 도쿄 시민들은 이런 바람이 부는 날에는 불조심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귀에 젖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그러나 불조심이라는 단어는 곧 기분 나쁜 농담이 될 것이다.

밤 10시 30분, 라디오 방송이 B29 편대의 도쿄 접근을 알렸다. 적기에 관한 정보는 도쿄만으로부터 남쪽으로 오가사와라 군도까지 이어진 일련의 섬에 배치된 감시원들에 의해 잇따라 중계되어 들어왔다. 얼마 후 첫번째 공습 경보 사이렌이 울렸다.

밤12시 직전에 제 1번기가 동쪽으로부터 저공으로 급히 접근하여 30lkg짜리 네이팜탄 뭉치를 풀어놓았다. 그것이 땅에 닿자마자 지상에는 화염이 선을 그리며 분출하여 밤하늘을 밝혔다. 2번기는 스미다강 상공에서 1번기의 진로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며 소이탄을 투하하였다. 1번기와 2번기가 교차하며 던진 소이탄으로, 도쿄의 공장, 상점, 소주택들이 몰려있는 도쿄의 동북지역에 거대한 불의 X자가 조용히 그려졌다.

그리고 250대의 심판자들이 폭음을 울리며 3000m의 고도로 진입해 왔다. 도쿄 시민들은 그렇게 낮은 하늘에서 그렇게 많은 B29의 엔진 폭음이 울펴퍼지는 걸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제까지의 B29놀이랑은 근본적으로 다른 상황이란 걸 다들 본능적으로 깨닫았다.

덜. 덜. 덜.

불의 X자를 기준삼아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네이팜탄과 기름뭉치들이 봄에 내리는 늦은 눈 처럼 도쿄의 은밀한 어둠속에 내려앉기 시작하고. 그 찰나의 순간과 함께 불꽃은 밤하늘 30m 높이까지 치솟았다.
시속45km의 지상풍에 힘입어 화염은 순식간에 옆으로 위로 사방 팔방으로 기세좋게 뻗어나갔다.
그 불의 쓰나미는 골목길과 애써 만들어놓은 방화대 따위는 있지도 않은 것처럼 뛰어넘으며 모든 유기질을 닥치는 대로 삼켜나가기 시작했다.
처음 15분 동안에 목조 건물들이 밀집해 있는 구역이 거대한 불구덩이로 변했고, 화염의 열기 때문에 풍속이 시속 65km 이상으로 강해졌다.

시민들은 처음에는 소방훈련때 배운 대로 실천하려고 했다. 소이탄에 물이나 젖은 걸레를 퍼붓기도 하고, 양동이 릴레이를 조직하려고 시도했다. 경찰관, 소방대원, 훈련받은 구조요원들이 지시하는 대로 행동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정부 당국은 각 동네의 시민들이 자기 할일을 완수하면 그 동네들은 무사할 것이고 결국 도시 전체가 무사할 것이라고 말해왔기 때문에.

그러나 그 누구도 적기가 네이팜탄뿐 아니라 기름이 가득찬 25톤짜리 폭탄을 2.6평방km당 1개 꼴로 투하하고, 바람이 질풍처럼 회오리 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말 그대로 바람의 속력으로 밀려오는 불의 쓰나미에 불을 끄려고 시도하던 사람들도 잡아먹혀버렸다.
경찰은 사람들을 방화대, 공터, 혹은 이미 모든 게 다 타버린 장소로 이동시키려고 노력했다. 소방대원들은 살아남은 몇개의 소화전을 통해 화염에 휩싸인 거리를 뛰어다니는 사람들 몸에 물을 뿌려줬다.
불에 타죽지 않은 사람들은 뜨거운 연기에 질식하거나, 불이 산소를 모두 태워버려 질식해 쓰러져 죽어갔다.

도쿄의 동북지역에서는 피난민들이 간논사라는 절에 몰려들었다. 그 절은 오랜 세월, 도쿄의 숱한 화재들 속에서도 한 번도 불타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절이 관세음보살의 가호를 입고 있다고 믿었던 거다.
그러나 경내의 정원에 불이 옮겨붙자, 절의 목조 건물과 수많은 수목들은 거대한 화장(火葬)용 장작더미가 되고 말았다.
그 멀지 않은 곳에는 요시하라라- 공창가가 있었는데, 여기는 접대부들의 탈주를 막고 외부에서의 화재를 막기 위해 큰 철문들이 닫히게 되어있었다. 수많은 접대부와 손님들이 그 철문 안에서 죽어갔다.
남쪽의 니혼바시근처에서 경찰들은 피난민들을 유명한 극장인 메이지좌로 피난토록 했다. 그러나 이미 도쿄를 가득 메운 불에 극장안의 산소도 부족해져갔고 마침내 무대의 막에 불이 옮겨붙자, 극장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화장로(火葬爐)로 돌변하고 말았다.
동북지역을 가로질러 흐르는 스미다강은 화염폭풍으로부터 안전할 것 처럼 보였다. 그래서 양쪽 기슭에서 수만명의 사람들이 강의 얕은 물로 뛰어들어갔다.
그러나 도쿄 동북지역 전체가 화로로 변했기 때문에 스미다강도 끓어올랐다. 문자적 의미 그대로 사람들은 물속에서 삶아져 죽었다.
다리위에 있던 사람들도 다리의 철골구조가 뜨껍게 달아오르자 물에 뛰어들어 죽어갔다.

3월 9일 밤 12시에 시작된 공습은 3월 10일 새벽 5시 공습 해제 사이렌 소리와 함께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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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이탄 불길에 직접 쏘여 죽은 시체
네이팜의 파란 불꽃은 1000도를 넘는 고온으로서 인체와 접촉할 경우 수분을 고속으로 증발시켜버리기 때문에 시체의 형태가 비교적 온전하게 유지된다.

3월 10일 이후 도처에 시체가 쌓여있었다. 스미다강을 따라 걸어간 한 군의관은 강 기슭에 쌓인 시체들을 보았다.
"수많은 표류 시체를 보았다. 옷을 걸친 시체도 벌거숭이 시체도 모두 목탄처럼 검게 타있었다.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그들이 사람의 시체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남녀를 분간할 수 조차 없고, 그 곁을 떠내려가는 물체가 팔인지 다리인지 아니면 불탄 나무조각인지도 식별할 수 가 없었다."

반상회 조직은 살아남아서 식량조달과 임시거처 마련을 위해 힘썼다. 군대가 파견되어서 시체들을 수습했다. 신원 확인이 불가능한 시체는 100구씩 모아서 커다란 공동 무덤에 매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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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0일 아침부터 수십만명의 대탈출이 시작되었다. 철도는 빠른 속도로 복구되어 그들을 실어날랐다.
천황은 방공호에서 기어나와 나와 2시간동안 폭격지역을 둘러보았다.

단 한차례의 폭격으로 대략 25만동의 가옥이 파괴되었고 180만명이 집을 잃었다. 약 40평방km가 잿더미로 변했다.
사망자 숫자에 대해서는 아무도 확실하게 집계하지 못했다. 정부는 사망자 숫자에 대한 보도를 억제했기 때문에 12만명이 사망했다는 신문 보도는 발표되지 못했다. 프랑스인 기자 로베르 귀엥은 사망으로 간주되는 피해자 수가 19만7천명이라고 보고된 일본 문서를 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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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는 단 1차례의 폭격으로 그처럼 막심한 인명피해를 낸 일은 없었지만, 이 폭격은 공포의 시작에 불과했다.
(폭격의 경과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B29덜덜덜' 이전 글들을 참고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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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4일의 공습으로 간판만 빼고 홀랑 다 타버린 궁성.
군대, 소방대원, 공무원등 1만명이 40대의 소방차를 동원하여 약 4시간동안 진화작업을 벌였다 (주택가가 훨훨타고 있는 동안). 천황가 삼종의 신기는 이때 도쿄 궁성에 보관되어 있지 않았다고 한다. 궁성의 정전을 포함해 27동이 홀랑 다 타버렸다. 천황은 황실 도서관 지하 방공호에 짱박혀 있던 덕분에 무사했다. 그리고 전쟁 끝날 때까지 거기서 살아야 했다.

정부는 피난을 금지하는 명령은 내렸지만 수많은 노동자,시민들이 지방으로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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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4일의 오사카 폭격때 274대의 B29는 두꺼운 구름에도 불구하고 레이더를 이용하여 1733톤의 소이탄을 뿌렸다. 13만 4744동의 가옥이 파괴되었지만, 효과적인 방화대와 노동자 가옥의 분산화 정책 덕분에 사상자 수는 그리 크지 않았다.
오사카 소방국은 사망자 4천명, 그 두배의 부상자, 행방불명자가 500명이라고 발표했다.
(확실히 관서기질이라는 것이 도쿄에 비해 사상자 숫자를 줄이는 데에 도움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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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9일의 도쿄 공습 이후, 3월 11일 나고야/ 3월 13일 오사카/ 3월 16일 고베/ 3월 19일 나고야 순으로 진행된 리메이의 3월 1차 공습으로 이들 도시의 면적 82평방km가 불로써 지워졌다.

이후 5월들어 공습은 더 큰 규모로 전개되었고 B29는 이틀에 한번씩 날아와서 목표물들을 지졌다. 7월 들어서는 사흘에 두번씩 날아왔다.

그런 와중에 미신이 퍼졌으니, 무너진 집에서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용케 빠져나온 도쿄의 한 부부는 그 행운을 폐허더미 속에서 시체로 발견된 그들의 굼붕어 한쌍이 주인을 위해 대신 죽은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그 금붕어들을 가까운 절에 들고가서 정성껏 매장했다.
소문이 퍼지자, 도쿄의 금붕어란 금붕어는 엄청나게 비싼 값으로 순식간에 다 팔려버렸다. 진짜 금붕어처럼 착색한 가짜 금붕어도 날개돋친 듯 팔렸다.
대동아 공영권 건설을 외치던 대일본 제국의 신민들이 금붕어보고 대신 죽어달라고 빌게 된 것이다.

엉뚱한 소문들이 수도없이 나돌았지만 그 중 샒스러운 것 중 하나가 요코하마에 관한 것이었다. 도쿄의 바로 옆에 붙어있는 요코하마는 개전 후 한번도 B29의 폭격을 당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요코하마가 무사히 수개월을 넘기자- 사람들 사이에는 미군이 본토 상륙때 요코하마 항의 부두를 이용하려고 요코하마를 안 태우고 내버려 둔다는 소문이 퍼졌다.
요코하마는 안전하다고 믿은 도쿄 시민들이 도쿄의 마지막 숨통을 끊을 대폭격을 피해 요코하마로 향했다. 피난대열이 도쿄 요코하마간 국도를 가득 메웠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미국이 그 시점에서 폭격에서 제외한 도시는 도쿄였다. 6회의 대폭격을 실시한 후 5월 말에 이르러 미국은 더이상 도쿄를 때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5월 29일 낮에 B29가 요코하마를 쳤다. 1시간동안의 폭격으로 요코하마의 절반이 잿더미가 되었지만 기적적으로 사망자는 5천명에 불과했다. 다시 가재도구를 버린채 요코하마를 빠져나가는 피난민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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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폭격 사전 경고 삐라. 일본인들은 궐기해서 독재자들을 몰아내라는 내용도 씌어져 있다. 이 삐라를 줍는 자는 징역 3개월이었다.

전쟁이 끝나가는 걸 아쉬워하는 듯- 도합 2천대의 항공기가 동원된 개전이래 가장 대규모 합동폭격이 7월 10일에 결행되었다.
500대 이상의 B29가 오사카 근교의 와카야마와 사카이, 나고야 근처의 요카이치에 있는 정유소, 나고야 배후의 산중에 있는 기후, 도쿄에서 북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센다이의 5개 도시를 폭격했다. 함재기 1천대가 도쿄 주변의 비행장을 때렸다. 300대는 규슈의 비행장을 때렸고 나머지 항공기들은 오사카와 나고야를 폭격했다.

그렇게 폭격은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더이상 파괴할 것조차 없겠다고 여길 정도가 되었다. 폭탄은 떨어진 곳에 다시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지만- 도쿄 사람들은 절대 그말을 믿지 않았다.
7월까지 미국은 9만톤에 가까운 폭탄을 일본에 투하했고, 총면적 330평방km의 도시 26개를 초토화했다.
건물 250만동이 소실되었다. 산업 생산량은 1944년 생산량의 약 40%로 떨어졌다. 석탄 생산은 반으로 줄었다. 정유량은 15%로 줄었다. 항공기 엔진은 4분의1로 줄었다. 총포,화약의 생산량은 45%. 알루미늄은 9%로 떨어졌다.
7월까지 약 50만명이 폭격으로 죽었고 그 밖에 1300만명이 집을 잃었다. 옥외생활과 식량부족,영양실조, 결핵 또는 다른 질병으로 죽은 사람의 숫자는 파악되지 못했다.

몇몇 사람들은 공업도시인 히로시마가 왜 끝까지 폭격을 받지 않는지에 대해 궁금해했다.
그 궁금증이 풀리고 나서야 전쟁이 끝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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