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도 인정한 진정한 전쟁영웅이었던 한국인 미국 장교가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한국계 미국인 카피텐 김,한국이름 김영옥
김영옥은 미국 하와이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김순권의 장남으로 1919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나 로스앤젤레스 시립대학에 진학했습니다. 그 당시 유색인종이 제대로 직업을 구할 수 없었던 시기라 육군에 지원했으나 거절당하고, 제2차 세계 대전 징집령에 따라 미군에 입대합니다.
장교후보생 학교를 졸업한 김영옥은 한국인이었지만, 일본인 2세로 구성된 '100대대'로 배속받게 됩니다. 100대대는 미국에 거주한 일본인들이 일본과의 전쟁으로 수용되었던 아픔과 적군 스파이라는 오명을 씻기 위해 입대하자, 그들을 백인간부의 통솔하에 모아놓은 부대였습니다.
김영옥은 100대대 부대를 이끌면서 대단한 전투 영웅으로 활약했습니다. 몇 가지 소개하자면
■ 대위 진급을 전장에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앞두고 적의 정보를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사령부에 김영옥은 포로생포작전을 건의했지만,위험 때문에 승인 불가 명령이 났습니다. 하지만 김영옥은 밤에 침투한 뒤 낮에 작전을 펼치면 가능하다고 주장해서 적진에 침투합니다.
일본계 아카호시 일병과 단둘이서만 밤에 독일군 지뢰밭을 통과한 김영옥은, 동이 틀 무렵 자고 있던 독일군 병사의 입에 총구를 겨누고 포복으로 아군진지까지 무사히 복귀했습니다. 김영옥의 작전을 망원경으로 보고 있던 클라크 사령관은 복귀한 김영옥에게 부관의 계급장을 떼 대위 계급장을 달아 줍니다.
■ 사무라이 김
처음 일본계 미국인들은 한국계 김영옥을 그다지 반기지 않았습니다. 조선과 일본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안 부대장은 깅영옥을 전출시키려고 했지만, 김영옥이 자진해서 남겠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부대원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김영옥은 철저한 부하 사랑과 능력 있는 전투력으로 차츰 인정을 받기 시작합니다.
중대장의 무모한 공격 명령이 부하를 희생시킬 수 있다고 판단한 김영옥은 최소한의 부대원 희생 작전을 펼치면서도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산타마리아 전투에서는 독일군 기관총 진지를 단 2개 분대원만을 이끌고 수류탄으로 폭파 시키고 포로까지 생포하는 전과를 이끌며 '사무라이 김'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부대원들은 김영옥을 '불사신 영(Young)'이라 불렀고 이탈리아 주민들은 '까삐텐 김'이라고 칭송할 정도로 그는 철저하고도 능력 있는 군인이었습니다.
1945년 휴가 중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소식을 듣고 김영옥은 펜타곤의 장기 복무 요청을 거절하고 명예 제대를 합니다. 그는 군 복무 기간 동안 모은 3,000달러를 가지고 코인란드리 사업을 처음 LA에서 시작하면서 사업적인 성공을 거둡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나자 김영옥은 잘나가던 사업을 뒤로하고 한국전쟁에 참전합니다. 그는 유럽에서 치른 전쟁보다 더 어려운 한국전쟁에서도 놀라운 전투력을 발휘합니다.
■ 도망치는 국군을 막아선 사나이
김영옥은 한국 전쟁에 7사단 31연대 정보참모로 발령받았습니다. 그에게 떨어진 명령은 인제군 개운동 계곡에 있는 다리를 사수하고 유엔군과 한국군의 철수를 보호하는 임무였습니다. 그 당시 중공군의 1차 춘계 공세가 시작되었고 소양강을 중심으로 아군들이 무질서하게 퇴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퇴각하고 있는 한국군을 막아선 김영옥은 다리 앞에 탱크를 포진시키고 홀로 탱크 앞에서 공산군을 막을 준비를 했고, 그의 용감한 모습을 본 한국군도 그를 따라 다리를 방어하였습니다.
■ 유색인 최초의 대대장
김영옥은 유색인종으로는 처음 대대장에 진급한 인물이었습니다. 원래 대위로 대대를 실질적으로 지휘했지만, 1951년 3월 소령으로 진급하고 정식 대대장이 되었습니다.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시기에 유색인종으로 단위 부대의 대대장이 되었다는 사실은, 인종차별을 뛰어넘는 그의 전과과 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구만산 탑골 전투'에서 김영옥은 권총을 손에 들고 적의 포탄으로 공격대형이 무너지는 곳을 뛰어다니면서 '후퇴하는 자는 즉결처분하겠다'라며 포탄이 떨어지는 전장을 다니며 적의 공격을 막아 냈습니다.
'금병산' 전투에서는 적과 대치하고 있는 미군이 머리를 들지도 않고 총을 쏘는 것을 보고, 총알이 빗발치는 능선을 과감하게 다니며 전투를 독려했습니다. 죽음의 공포에 있는 미군들에게 '나를 보라,이렇게 총알이 날아다녀도 나는 괜찮다' 라는 말로 미군의 전투력을 향상시키고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수많은 전투에서 군인으로 솔선수범하고 부하를 사랑했던 그는 신임 연대장이 부하를 희생시키는 전투를 강행하자 1952년 9월 한국을 떠났습니다.
김영옥이 단순한 미군으로 전투를 잘했다면 그는 한국인의 영웅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진정한 영웅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주었습니다.
○ 진정한 휴머니즘의 따뜻한 군인
한국전쟁 당시 배고픔에 거리를 헤매던 아이들을 위해 아예 고아원을 세웠고, 부대 보급품 맥주를 팔고 부대에서 의류를 모아 아이들을 도와주었습니다.
대대장 김영옥의 이런 모습을 본 대대 장병들은 자발적으로 봉급에서 몇 달러씩 모아 아이들을 도왔고, 김영옥은 전쟁이 끝나고 LA에 돌아가서도 '아시안 여성 포스터 홈''한인건강정보센터' 등 수많은 자원 봉사에 힘을 썼습니다.
○ 부를 버리고 조국을 위해 싸웠던 한국인
김용옥의 1950년대 코인란드림 사업은 대박 사업이었습니다. 김영옥이 최초로 LA에서 시도한 사업으로 지금도 미국에서는 스몰비지니스로는 최고의 사업 종목입니다. 돈을 벌기 시작했던 김영옥이 한국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미국을 떠났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한국을 조국으로 생각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김영옥 대령은 한국 전쟁에서 얻은 상처로 고생하다가 2005년 사망하였습니다.
미국 MSN이 선정한 미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영웅에 선정될 정도로 미국에서도 인정한 군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