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사단 박정인장군님

은하영웅 작성일 12.08.17 00:5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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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 표지판 보수 작업시 도발


지난 1970년대 어느 용맹장군이 북의 도발에 통쾌하게 보복 응징한 사건을 다시 생각해 본다.

1972년, 함남 신흥 출신의 반공투사가 백골사단으로 불린 3사단장에 취임했다. 6.25때 중대장으로 참전했던 박정인(朴定仁) 장군의 이야기다.

백골사단이 1973년 2월, 정전협정 절차에 따라 북측에게 통보한 후 춘계 DMZ 표지판 보수작업을 착수했다. 이때 북측은 남북 분계선 바로 북측에 559 GP를 설치하고 대남비난 심리전을 펴왔다. 백골사단은 적의 심리전에 말려 들지 않으려고 인내했지만 북측이 우리측 표지판을 제거하는 협정 위반행위로 나왔다. 당시는 남북협상이 진행 중이라 상호 비방방송마저 중단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에 분노한 박 사단장은 정보참모 조정채 중령에게 표지판 보수작업 강행을 지시하여 작업을 완료했다. 그러나 우리측 장병이 귀대하는 순간, 북의 기습으로 대위와 하사 등 2명이 중상을 입었으니 전쟁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박장군도 마이크를 통해 사격중지를 요청하며 계속 사격하면 중대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렇지만 북측에서는 이를 무시하고 외면했다.


사단 155미리 곡사포로 적진강타


참다못해 박 장군은 사단 관측기를 공중에 띄워적진을 관측시켜 559 GP에다 105미리, 155미리 곡사포를 조준, 포격하여 뭉개버렸다. 이어 연막탄을 발사하여 부상 장병을 구출, 귀대시켰다.

이 같은 통쾌한 응징 5분 뒤 1군 사령관 최세인 대장의 격려전화가 걸려 왔지만 10분 뒤 군단 사령부는 ‘무리한 사격’ 운운하며 엉뚱한 지시를 내렸으니 믿기 어려웠다. 분이 덜 풀린 박 장군은 이날 밤 사단 트럭들을 동원하여 전조등을 밝힌 채 DMZ 남방 한계선으로 진출시켜 당장 적진을 돌파할 기세를 보여줬다.

이때 북측에서 혼비백산하여 도주하는 모습이 관측되었다. 김일성이 너무나 놀라 전군에 비상 동원령을 내린 사실도 드러났다. 이때 유엔군 사령부에서도 “북측의 정전협정 위반으로 부상병 구출을 위한 자위적 작전이었다”고 해명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박 장군은 사단장직에서 해임되고 말았다. 당시 한미 양국은 김일성의 무모한 전쟁도발 구실을 막기 위해 전투 잘하는 장군으로 소문 난 그의 지휘봉을 앗아 버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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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인 장군의 철모와 군모들>



사단장 해임 후 ‘왕별’ 칭호


박 장군이 사단장 이임식 날 “백골사단 장병들의 무운장수를 빈다”는 이임사를 마치고 뚜벅뚜벅 걸어 나오자 사단 군악대가 ‘이별의 곡’을 연주했다. 떠나는 사단장에 대한 장병들의 가슴이 울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전속부관 이계복 대위(ROTC)가 떠나는 사단장에게 “장군님은 진정한 조지 패튼입니다”라고 울먹였다. 2차 대전시의 미 전차군단장 조지 패튼장군의 용맹성을 가르킨 말이었다. 이어 그날밤 수행부관 임영호 준위가 5성 별판을 집으로 가져왔다. 별 하나 준장에게 맥아더 원수의 5성과 같은 왕별을 선물한 것이다. 이때부터 박 장군은 ‘왕별’로 불렸지만 이미 ‘풍운의 별’이란 칭호도 받고 있었다.

박 장군은 육사 6기생으로 임관됐지만 장군진급 때마다 탈락하여 ‘만년 대령’ 소리를 듣다가 맨 마지막에 준장으로 승진했기 때문이다. 장군으로 진급한 뒤에도 주월 맹호사단장 등 예정된 보직에서 낙마하다가 월남 반공청년들의 뿌리인 백골사단장에 부임했다가 도중에 해임됐으니 ‘풍운의 별’이다.

그로부터 세월이 흐른 1985년 9월 20일, 남북 이산가족 평양방문단으로 평양 호텔에 투숙하고 있던 함남 도민회 이상순 회장에게 북의 정치보위부 간부가 찾아와 “함남 신흥 출신 박가라는 요란한 사단장이 지금 뭘하오”라고 묻더라고 한다. 이 회장은 이때 “나는 기업인이라 잘 모르오”라고 대답했지만 북측이 백골사단을 얼마나 무서워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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