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리뷰 - (절대 스포일러 포함)

ash062 작성일 06.08.03 15:4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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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내공 : 상태나쁨


영화 '괴물'을 개봉 당일 저녁에 수많은 관객과 더불어 감상키로 하고 예매에 성공했다. 솔직히 주한미군 기지에서 포름알데히드를 흘려보내는 장면에서,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나 시작부터 ‘악의 뿌리’를 명확히 정해버리는 구도 설정이 차라리 어설픈 암시나 말장난보다야 낫지 않은가 하는 개인적인 취향 덕에 용서해주고 말았다.

봉준호 감독. 영화를 잘 꾸미는 데에 역시 빼어나다. 한강변 민초들의 감칠맛 나는 (배우들의) 동선과 설정 하나하나가 일품이다. 매점털이에 실패한 꼬마 거지들의 능청스러운 줄행랑과 송강호의 얼굴에 붙은 100원짜리 동전 등의 소소한 장치들을 과연 이 영화 이외의 어느 괴수 영화에 탑재할 수 있었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니 채 몇 분 되지 않아 벌써 만족스럽다. 학교가 파하고 돌아오는 딸이 너무 반가운 나머지 바닥에 꼴사납게 자빠지거나 손님에게 내놓을 구운 오징어 다리를 몰래 떼어 먹는 40대의 하자 있는 남자가 영화의 주인공이라는 사실 또한 이 영화에 대한 입소문에서 익히 들어온 터, 영화를 끌고 가는 게 첨단 무기와 영웅들이 아니라 동네 아저씨와 옆집 누나, 우리네 가족이라는 설정도 이만하면 잘 알았다. 이제 대충 인물의 면면도 살폈으니 괴물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하면 되었다.

그런데 괴물의 실체가 등장하면서 영화는 약간 짜증스러워진다. 디자인부터가 환경단체 마스코트라는 생각이 확 끼친다. 초대형 망둥이의 허리춤에다 각종 생선의 하단부를 마구 꽂아놓은 듯한 생김새는 한강에 흘러든 유독물질이 우연히 만들어낸 걸작이다. 영화는 이 시점에서 무분별한 오물 방류와 각종 생활폐수의 유입으로 극심해진 한각의 오염이 괴물과 같은 돌연변이를 탄생시켰으며, 특히 직접적인 원인은 영화 초입의 주한미군 관계자에게 있다는 인과관계를 관객에게 강요하고 있다. 그것도 시각적으로만.

하지만 그 이미지에 압도당한다거나 뇌리에 박히지는 않는다. 킹콩이나 고질라처럼 크기로 압도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죠스나 아나콘다처럼 친숙한 동물의 형태도 아니다. 흉측한 몰골에 소름이 오싹 돋을 뿐, 우리의 거대 망둥이는 관객에게 주인공 대접을 받기에는 2% 부족한 것 같다. 아무리 봐도 내게는 환경오염을 상징하는 기괴한 조형물 이상의 의미로는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 영화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소시민’의 ‘가족 이야기’라 했으니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 치자. 자신을 흉측하게 만들어낸 인간들에 대한 분노인지, 아니면 간만에 강안으로 나온 자신에게 집중적으로 각종 쓰레기를 투척한 일부 예의를 모르는 이들에 대한 응징인지는 모르겠다. 하여튼 괴물은 별 긴장감도 없이 한강변으로 상륙하더니 한가로운 오후를 즐기러 온 시민들을 무차별 습격하기 시작한다. 김이 샜냐고 누가 묻는다면, ‘아니야. 나름 느낌 있었어.’ 정도일까. 오달수의 가히 동물적인 목소리 연기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해야 관객에게 감동을 주니 차치해두기로 하자.

이제 사람 이야기를 해 보자. 세월의 풍파에 성격이 과도하게 둥글어져버린 변희봉과 정신지체와 정상인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타는 장남 송강호, 80년대 운동권 출신의 날백수 박해일, 개인적으로 제일 싫어하는 성격의, 말 한마디 없이 갑자기 사고치는 양궁선수 배두나. 이 일가는 가족의 히로인인 중학생 딸을 괴물의 마수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모자란 형을 툭하면 욕하고 후려치는 동생이나 이런 오빠들을 사람 취급 안 하는 여동생을 보라. 역시 정상정인 집구석은 아니다. 일단 맘에 든다. 괴물은 더러운 한강물에서 나온 거대 망둥이인데 주인공이 강남의 호화 빌라에 사는 화목한 가족이면 어색하지 않겠는가. 그 밖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대체로 각 직업군에서 찾아볼 수 있는 대표적 속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 전체의 통일성을 고려할 때 이러한 인물 구성은 매우 적절하다. 잃어버린 가족을 되찾기 위해 폐차장에서 무기와 차량을 말도 안되는 고가에 구매하여 별 소득도 없이 우여곡절을 겪고, 괴물과 몇 번을 조우한 끝에 결국 ‘환상의 가족 + 노숙자 4단 콤비네이션’으로 괴물을 격퇴하고 마는 송강호 일가의 처절하고 비장하기 그지없는 모습은 역시 이 영화를 잘 팔리게 한 봉준호 감독의 재능이자 뛰어난 감각이다. 자신의 영화가 차지해야 할 좌표를 잘 알고 있었던 듯, 심형래 류의 괴수물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인물 설정으로 칸에서 기립박수를 받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매우 언짢은 감상을 남긴다. 최근 오페라의 연출을 마지막으로 안식년을 갖고 있는 한 거장은 한 인터뷰에서 “어떤 종류의 극이던 중심 이야기는 강조되어야 한다. 나머지의 에피소드는 필요조건이 될 수 없으며 중심 이야기를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가감되어야 하는 하나의 장치에 불과하다. 극 안의 다른 장치들이 지나치게 부각되거나 상반되는 이미지를 담고 있을 때 극은 그 중심 의미를 잃게 된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말에 동의하고 본다면 확실히 ‘괴물’은 여러 가지 에피소드와 장치들을 영화 안에 무리하게 끼워 넣은 느낌이다. 특히 주한미군과 관련한 영화적 장치들은 이 나라에서 소시민들이 매일 직면하는 사회 시스템이 가진 불합리성의 한 면으로 등장했으나 결과적으로 전체 이야기의 개연성을 떨어뜨림은 물론 영화의 수준을 확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영화 초반에 괴물과 어설프게 대적하다 팔을 잃고 쇼크로 죽어버린 미군 병사와 대생화학 병기 ‘에이전트 옐로우’는 영화 안에서 과장되거나 희화화되지도 않았으면서 그렇다고 진지하고 비중 있게 다루어지지도 않았다. 때문에 뒤틀린 반미 감정을 툭툭 건드리는 것처럼 관객의 짜증스러움을 유발한다. 영화 ‘한반도’에서처럼 노골적으로 민족주의에 호소하는 게 차라리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속 편하다. 매점을 털다 괴물의 희생양이 되어 버린 꼬마 도둑 형제도 불쌍하긴 하지만 영화의 산만함에 한 손을 거든다. 어린 아이를 희생해서 관객에게 선사한 메시지는 무엇인가. 괴물의 잔인함에 대한 확인도 아니고 단순한 안타까움도 아니다. 어린 아이를 하수도로 내몰아버린 이 사회에 대한 비난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상황이 되면 이제 송강호 일가는 미제의 폭압과 불합리한 사회 시스템에 맞서 싸우는 어릿광대 투사가 되어버린다. 화염병을 던지고 활을 쏘며 그들이 벌이는 사투는 80년대에 운동 좀 했다는 사실을 무슨 참전의 훈장처럼 여기는 일부 386세대의 초점 없는 피해의식의 유령이 벌이는 희극처럼 보인다.

또 하나. 이제는 한물 간 70년대 거장 감독은 한 강연에서 “영화는 관객에게 꿈을 심는 매체”라 말했다. 뤼미에르 형제가 기차의 출발 모습을 영사기로 보여줬을 때, 혹은 1800년대 말 한 선교사가 일제 당시 서울 호텔 마당에서 조선 사람들에게 아이스크림을 대접하며 활동사진을 비췄을 때 스토리도 메시지도 없는 단순히 ‘움직이는 그림’에 관객들이 놀라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관객은 영화를 통해 꿈을 꾼다. 그렇다면 영화 ‘괴물’은 관객에게 어떤 꿈을 주는가. 어느 시점부터인지 우리 영화는 ‘좋은 영화’와 ‘잘 만든 영화’를 혼동하기 시작했다. 노골적이고 잔인한 묘사와 사람의 어두운 감성을 자극하는 정교한 이야기가 인기를 얻는다. ‘가족의 사투’를 카피로 내건 이 영화도 별반 다를 게 없는 듯하다. 송강호 일가는 가장을 잃고 결국 딸도 잃고 만다. 감독이 배우들을 죽을 고생을 시켜가며 사투를 벌이게 한 이유는 ‘현서’를 구하기 위함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이 영화의 가장과 삼촌, 고모는 가족을 구원한 게 아니라 그 아비와 딸의 ‘복수’를 했을 따름이다. 오히려 그들을 못살게 구는 이 사회에 일침을 가한 것이다. “현서야~” 딸의 이름을 외치며 절박하게 달려가는 아버지도 결국 딸을 구할 수는 없다. 비장하게 괴물과 대면한 노인은 허무하게 바닥에 내동댕이쳐진다. 가족은 왜 사투를 벌이는가.

우리는 괴물을 향해 이를 간다. 미군 병사의 의문사를 은폐하려고 한국인의 머리를 천공(穿孔)한 주한미군의 방종과 우리 정부의 무능함에 이를 간다. 우리를 괴롭히는 한강에 거대 괴물이 헤엄치고 돌아다니는 판국에도 방역 업체와 담합하는 세상의 속물들에 이를 간다. 이를 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피해의식의 집합이 괴물로 탄생했다. 그래서 괴물은 우리 자신을 투영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잔인함과 역겨움에 화염병을 던지고 총과 활을 쏜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면 짜증스러운 구조다. 사투가 끝나고 말미에 그 어린 것도 말하지 않는가. 테레비 끄고 먹는데 집중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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