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치와 씨팍] 세기말적 감수성을 펑크정신으로!

유어웰컴 작성일 06.10.30 18:3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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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내공 : 우수함



'아치와 씨팍'은 90년대 말에 기획된 작품이다. 당시는 IMF라는 경제적 충격과 세기말적 징후가 맞물리며 기존 한국사회의 전통적 가치관이 무너지면서 실험적이고 탈권위적인 문화현상이 봇물처럼 터져나오던 시기였다. 인터넷의 등장도 그러한 현상에 부채질을 하면서, 제도권에서 수용할 수 없는 전복적인 내용을 담은 영상물이 범람하는데 한 몫을 했다. '아치와 씨팍'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탄생하였으며, 특유의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으로 당시의 혼란했던 시대상황의 일면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십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아치와 씨팍'의 도발성과 선정성은 관객에게 별다른 충격을 가져다주지는 못할 것이다. 배설이라든가 사지절단, 마약, 폭력, 사디즘적 성도착 등이 이제는 당당하게 (그것이 여전히 주변에서 이루어지는 것일지라도) 문화적 담론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치와 씨팍'은 여전히 흥미롭고 재미있다. 오히려 우리가 '아치와 씨팍'을 영화 그 자체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치와 씨팍'은 처음부터 끝까지 속도감으로 관객을 몰입시킨다. 비교적 단순한 플롯의 진행속에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숨 돌릴 틈 없는 액션장면이다. 액션씬의 동선이라든가 구성은 상당히 공들인 티가 나며 어디에 내놓아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괄목할 만한 수준을 보여준다. 셀 기법으로 그린 인물과 3D로 처리된 배경도 이질적인 느낌이 없다. 보자기갱단 졸개들의 파란 몸 색깔이 약간 촌스런 느낌을 주긴 하지만 어딘가 스머프를 연상시키는 모습 때문에 보는 내내 웃음이 나온다. 주인공인 아치와 씨팍이 액션장면에서는 조연이라 할 정도로 별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그게 영화이 흠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뒷 골목 삼류 양아치가 적진을 누비며 화려한 액션을 펼친다면 그게 더 개연성 없는 연출인 것이다.


주연급 인물 대부분을 비전문 성우를 기용했는데 극중 인물과 목소리 연기를 맡은 배우들의 이미지가 겹치면서 캐릭터에 한층 생생함을 부여하는 것 같다. 다만 씨팍 역을 맡은 임창정이 본인의 칼칼한 목소리를 억지로 뭉뚱그려서 내는 탓에 약간의 어색함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예전 플래시 에니메이션 때 씨팍역의 임원희가 그대로 해줬으면 더 좋은 결과를 만들었을 수도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현영은 생각보다 이쁜이역과 잘 어울린다. 워낙 목소리 자체가 하나의 '연기'이다 보니 별다른 연기력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 같다.


'아치와 씨팍'은 권력집단들의 악다구니 속에서도 결국 살아남고 실리를 쟁취하는 것은 주변부 인생, 즉 루저들이라는 일련의 영화적 경향의 연장선에 있다. 그런 영화들이 가벼울 수 밖에 없듯이 '아치와 씨팍'도 국가의 독점과 통제, 자원의 착취로 인한 부작용, 생체실험 등 디스토피아적 미래상으로 뭔가 있을 법한 소재들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에 합당한 고민을 남기지는 않는다. 아치와 씨팍은 그저 계획 없이 사건에 부딪히고 저돌적으로 뚫고 나갈 뿐이다. 이런 무정부적인 인물을 앞세워 한바탕 때리고 부수고 총질을 하다가 유야무야 사건이 마무리되는 과정이 전부이다.(마지막에 보자기갱단의 두목과 정부의 국장이 한 몸으로 연결되는 장면은 초록은 동색이라는 말을 떨올리게 한다.)


누군가는 '아치와 씨팍'이 킬링타임 영화라고 하지만 우리나라의 만화영화 제작 여건상 제작진들이 8년간 흘렸을 피와 땀을 생각하면 이런 명칭은 영화를 저평가하는 감이 있어 아무래도 입에 담기 미안한 말이다. 게다가 한국 에니메이션의 발전을 염두에 둘 때 '아치와 씨팍'은 새로운 시도이며 그 성과 또한 상당하다는 점에서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하지만 '아치와 씨팍'은 고민하면서 볼 필요가 없는 영화이다. 재미없고 지루한 현실에서 잠시나마 일탈하고 싶다면 아치와 씨팍이 나누는 걸걸한 욕지거리가, 개코와 보자기갱단이 펼치는 멋진 액션이, 이쁜이와 지미가 보여주는 섹시함(?)이 80분 동안 관객에게 '하드'처럼 시원한 청량감을 맛보게 해 줄 것이다. 영화 곳곳에 숨어 있는 패러디 장면을 찾는 것도 쏠쏠한 줄거움을 준다. 단, 쌍욕과 피와 똥에 거부감이 있는 관객이라면 공연히 역겹다느니 저질이라느니 하는 유언비어 퍼뜨리지 말고 관람을 자제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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