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전쟁, 아니, 제2차 세계대전은 이 한장의 사진으로 대변되어 왔다.
1945년, 베를린 함락을 소련에게 빼앗기고,제국의사당 꼭대기에서 소련 병사가 노동기를 흔들며 감격해 하는 장면을 소련이 대독 승리에 대한 공헌을 상징하는 장면으로서 잔뜩 이용해 먹고 있을 때,전 후, 동아시아 에서의 주도권 논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미국 언론이 항상 내세우던 것이 바로 이 한 장의 사진이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유명한 "이오지마 사진의 진실" 이라는 미국인에게 흥미로운 주제를 이용하여, 흔히 아카데미에서 잘 먹혀 들어가기 마련인 전쟁이라는 주제와 흥행성의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응큼한 시도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 영웅 만들기"에 열광하는 미국인의 본성을 아프게 꼬집으며, 전쟁의 진실을 보다 인간적인 목소리로 얘기하고자 하는 휴머니즘 적인 시도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스필버그는 항상 "가족주의"를 얘기 하길 좋아하고, 이스트우드는 항상 "삶의 고독한 진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이 두사람의 욕심이 결합하여, 물량이 잔뜩 투입된 전투씬과 가족의 해체와 재결합,거기다 인간의 본질적 고독함과 삶의 진실에 대해서 한꺼번에 논하는, 조금은 머리가 복잡해 지는 영화가 되었다. 그래서 조금은 산만하다는 느낌도 든다.
전쟁이란 중국 전설에 나오는 끊임없이 먹어치우다 끝내 자신 마저 먹어치우는 괴물 처럼,
도무지 생산이 없고 소모하기만 하는, 소모의 블랙홀이다.
전쟁에서 모든 것은 생산되고 끝없이 소모된다. 그리고 그 반복이다.
비단 군수물자 뿐만아 아니라, 인간 마저도 전쟁에서는 생산되고 소모되는 부품일 뿐이다.
이미 미국은 장비와 기술의 군대로 거듭나,이미 병사란 물자가 아닌 존재가 되었지만, 아직도 군사력의 대부분을 병력에 의존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는, 병사가 물자로 취급되는 전쟁의 진실은 아직도 가슴아프게 와 닿는다.
특히, 고지의 정상에서 병사들이 동료의 시체를 밟고 기어가 깃발을 꽂았을 때, 고위 정치가는 자신의 방에 걸어둘 장식품으로 그 깃발을 요구하는 장면에서, 한국의 청년들을 필요를 위해 아무 죄책감없이 소모시키는 한국 정치가들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 영화를 제작함과 더불어, 일본의 시점에서 동일한 전투를 그린, 영화를 만들었다.
지금까지의 미국 전쟁 영화에서 일본인은 항상 끝없이 잔인 무도한 야만인으로만 그려진 한정된 시점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라고 생각된다.
참으로 절실히 필요하고 위대한 시도이다.
이 영화를 통해,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확실히 "서부극 배우" 라는 이미지로 부터 벗어나, "명감독"이라는 시선으로 바라 볼수 있게 되었다.
사실 외국은 이미 피부색 부터가 다른 과거의 적국의 관점에서 전쟁을 바라 볼 수 있게 되었는데,
아직도 한국은 같은 민족은 북한의 관점으로 전쟁을 바라 볼 사회적 관용을 갖추지 못했다....
우리에게 숙제를 안겨주는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