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의선]영화의 깊이를 아는 이라면 누구에게나 추천한다.

뚫뚫뚫뚫뚫뚫 작성일 07.05.18 20:3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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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나 캐스팅 등으로 봐서 크게 당기는 영화는 아니었다.

단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평이 너무도 좋았기에 속는셈 치고 보았다.

장면 장면을 길게 잡아, 영화를 보는 이 조차도 외롭게 만드는 영화.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극장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일어나지 않고 올라가는 자막을 끝까지 보고 있었다.

고맙게도 극장에서도 자막을 끊지 않고 끝까지 올려주었다. 자막이 무슨 볼거리가 있겠는가?

아마도 영화의 여운 때문이었으리라.

이런 광경... 정말 정말 오랫만이다.

 

 

<경의선>의 인물들은 저마다 아픔을 지니고 있다. 지루하고 반복된 일상 속에서도 성실함을 잃지 않고 일하는 지하철 기관사 만수(김강우 분)는 어느 날 갑자기 선로로 뛰어들어 자살을 선택한 여자로 인해 삶 자체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독일 유학파에 대학강사로 남부럽지 않은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한나(손태영 분)는 대학선배이자 유부남인 교수와 위태로운 사랑을 유지하며 자신의 길 위에서 방향을 잃고 서 있다. <경의선>은 이들이 각자의 상처를 딛고 보다 성숙하게 삶을 가꿔나가는 과정을 담담히 풀어간다. 보는 이의 마음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장면은 없지만, 박흥식 감독은 기교 대신 담백함으로 영화 곳곳에서 공감을 이끌어낸다.

<경의선>의 두 남녀는 외롭다. 그런 그들이 남과 북으로 나누어진 철도의 종착역에서 서로 만난다. 상처받은 두 남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경의선>은 다가서기 어려운 작품일 수도 있다. 그러나 <경의선>은 생각만큼 어렵지 않다. 이 세상 사람들도 영화 속의 주인공들처럼 다들 상처를 가진 인생이기 때문이다.

지난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문에 초청되어 평단과 관객으로부터 호평을 받은 <경의선>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작위적으로 그려내려고 하지 않는다. 극적 재미와 감동을 위해 지나치게 미화하기 일쑤인 멜로 영화의 틀에서 벗어나려 고민한 흔적이 돋보인다. 박흥식 감독의 섬세한 연출은 관객으로 하여금 두 남녀의 삶 속으로 깊이 끌려 들어가게 만든다. 카메라는 두 남녀의 미세한 심리적 변화를 보여주는 움직임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미묘한 정서적 울림을 전달한다. 특히 한나 역을 맡은 손태영은 풍부한 표정에도 불구하고 과잉연기의 유혹에 빠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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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선>은 상영 시간 내내 이 두 남녀가 외로운 존재라는 걸 보여 주는 데 모든 걸 바친다. 만일 그들이 모든 상처와 갈등을 해결하고 이루어지는 결말이었다면, <경의선>의 비범함도 빛이 바랬을 것이다. 박흥식 감독은 상처받은 두 남녀의 아픔을 건드리기보다 위로와 격려의 말을 전하는 화법을 택했다. 놀라운 것은 이런 소재의 영화가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상투성에도 불구하고, <경의선>이 매력 있는 영화라는 점이다. 이 영화는 사랑에 상처 받은 두 남녀의 이야기를 통해 나와 다르지 않은 타인의 고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특별한 시선을 제공한다.

<경의선>의 또 다른 미덕은 가식적인 해피 엔딩이 없다는 것이다. 억지를 부리지 않고 조급해하지도 않는 라스트 신은 이 영화의 백미다. <경의선>을 상처의 치유에 관한 영화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 정의는 너무 인색해 보인다. 영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와 연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이 두 남녀의 일상은 지루하지만, 지루한 일상이 그들에게 부여하는 과제는 버겁다. 스스로 치유하고자 하는 두 남녀의 애씀이 어느 정도일지 관객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누구에게나 상처는 있지만 치유되지 않을 상처는 없다. 만수와 한나는 남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던 진실을 이야기하면서 절망을 딛고 다시 서는 방법, 삶에 대한 긍정적 시선을 배운다. 영화에서 경의선이라는 공간은 외부와 고립된 공간이면서 동시에 치유 가능한 공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경의선>은 이별의 아픔을 경험한 사람들을 진심을 다해 감싸 안는 따뜻한 포옹과도 같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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