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오랜만에 극장을 찾아 개봉 영화 ‘행복’을 사랑하는 내 애인과 같이 봤다. 예매율이 치솟는 이 영화에 제법 큰 기대를 걸었다. 그리고 긴 시간동안 행복했다. 비극적인 사랑을 하는 연인들의 이야기는 우리 마음에 엔돌핀을 돌게 하고 그래서 우리를 잠시나마 따분한 일상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해주는 마술 같은 것이다.
‘희망의 집’은 역설적으로 희망을 잃어버린 패배자들(losers)이 모이는 곳이다. 폐암으로 삶의 희망이 없기에 노인은 목을 매 자살한다. 요즘 우리 사회 “노인 자살”의 자화상이다.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의 생쑈같은 처절한 삶을 위한 희극적인 투쟁은 우리를 웃게 하지만 그래서 슬프다.
주인공 ‘영수’(황정민 역)는 우리 사회 도시 속 “fast life“의 희생자다. 건강을 해치는 라면으로 상징된 fast foods에 찌들어 있고 술, 담배에 탐닉하는 우리의 슬픈 젊음이다. 희망이 넘치는(?) ’희망의 집‘에서 룸메이트 노인이 담배 배운 것을 한탄하며 자살로 생을 마감해도 그 지독한 담배의 폐해를 외면한다. 아직 내 문제가 아니라고. 자기 파괴의 단면이다. 애인 수연(공효진)과의 사랑은 공허하다. 무관심한 거짓 사랑에 진저리 치고 떠나지만 instant love의 *는 악마의 유혹처럼 달콤하다.
중증 폐농양 환자 ‘은희’(임수정)의 사랑은 “slow life”이다. 빨리 오지도 않지만 그리움이 쌓이게 하는 그런 은근한 사랑이다. ‘영수’를 낫게 하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면서 까지 배려하고 ‘영수’가 서울로 마실 나간다 해도 인내하고 기다려 준다. ‘영수’의 배신에도 친절히 ‘짐’을 싸 주는 그런 순수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사랑을 붙잡기 위해 빌기도 하고(겸손) 매몰차게 ‘영수’를 보내면서 한 없이 운다. (그 울음은 사랑의 절망가이다.)
우리 모두는 사랑을 떠나보낸 종착역이 죽음인 것을 안다. 아들 ‘영수’와의 대화 단절은 어머니에게 죽음이고 애인 ‘수연’과의 대화 단절은 사랑의 죽음이다. ‘은회’는 사랑을 결코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 사랑이 떠나갈 때 절망한다. 그것이 죽음임을 알기 때문이다. 너무 큰 사랑을 받아 본 사람은 그 사랑이 얼마나 좋고 절실한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 큰 사랑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그걸 깨닫기에 많은 시간이 필요할 때도 있다. 나도 그랬으니까.
나이가 들고 성숙해진다는 것은 가수 ‘한대수’의 노래 ‘행복의 나라로’를 들으며 젊은 시절의 치기와 실수를 회상하며 나의 사랑을 지키려는 무한한 노력이 아닐까? “fast life"에 젖어있는 우리 젊은 세대가 이 영화를 보며 그런 고민을 해 본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대 성공이다. ‘행복’은 그냥 그저 그렇고 그런 단순한 사랑 영화가 아니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