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는 두 영화 다 재미있었습니다. 놀라운 지경이었죠.
일반적인 부분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말입니다.
두 영화 다 뻔했던 이야기 구조를 어느 정도 탈출하려는 몸부림이 보입니다. 그것은 그 두 영화가 가지고 있는 스트레이트한 부분들, 즉 장르적 전형의 구조와 거기서 늘 기대하게 되는 1차원적인 적대관계를 다른 측면으로 다가가고자 시도했다는 부분이 특히 눈에 띄더군요.
이것은 지금 읽고 있는 스토리텔링의 진화라는 책에서 나온 내용들을 뒷받침해주는 면이 있네요. 모티브는 같은 걸 쓰더라도 스토리의 여러 다른 방향을 모색하게 된다는.
사실 고질라든 트랜센던스든 예고편만 보고도 오는 필링이 딱 있지 않습니까.
고질라는 고질라 무찌르면 끝이고
트랜센던스는 컴퓨터에 들어간 인간정신이 나쁘게 변해서 사람들 적대하다 된통 당하고 끝.
당황하지 않고~~~
그런데 관객들을 당황하게 만들어버린 거죠. ㅋㅋ
그럼 이제 디테일로 들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쩌다 무의식적으로 스포가 나와도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길 바라며 ㅠㅠ
1. 고질라는 왜 재미없었는가.
먼저, 고질라를 보자면 고질라는 예전의 괴수영화들이 만들어놨던 괴수들은 다 나쁜놈. 인간들 좋은 놈 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와 그에 따른 적대관계들을 부숴놓은 자리에 다른 느낌을 끼워넣었습니다. 그건 바로 재난에 흽쓸린 인간과 재난 자체, 즉 괴수의 전투라는 이중적 진행의 구조죠.
그리고 사실 이게 원전, 즉 일본판 고지라 영화들이 가지고 있던 정서의 핵심이었습니다. 인간들은 괴수의 전투에 어떤 통제력을 발휘해보려 하지만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대신 어쩔 수 없이 닥쳐온 재난에 대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선의 행동만 그려내고, 스펙타클은 괴수들이 책임지는 식이죠.
이걸 에머리히가 가져와서는 양키식으로 스트레이트한 적대방식으로 바꿨고, 그 극의가 클로버 필드를 거쳐 퍼시픽림까지 다다른 겁니다만, 알고 보면 원류는 이번 고지라가 더 가깝다고 해야겠죠. 오히려 헐리우드에 있었던 비슷한 영화라면, 트위스터나 타워링 같은 영화가 더 가까울 겁니다.
아주 간단하게 얘기하자면,
재난영화에 퍼시픽림 식의 액션을 바란 결과 따라온 배신감이랄까요.
이제 분석된 그 배신감을 떠나서, 고질라에 아쉬운 점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고질라가 우리편이다 하는 그 부분을 설명하고 봉합하는 부분에서의 연결이 우격다짐스럽다는 점, 그리고 원전의 정서 자체를 살리는 데 있어서 동양과 서양간의 미묘한 정서적 차이라는 한계를 넘기 힘들어 보이는 점이 두번째.
사실 일반적인 흥행을 위해서는 에머리히의 방법론이 옳았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로서는 퍼시픽림의 액션 못지 않게 괴수물에서 그런 정서를 구현해보려던 것 자체가 많이 신선했습니다. 에머리히의 방법론을 좀 더 새롭게 해보고자 jj는 클로버 필드에서의 다양한 방법론을 차용한 것일테구요.
2. 트랜센던스는 왜 재미없었는가.
이것 역시 고질라와 비슷한 이유입니다. 장르의 전형을 파괴합니다. 그런데 사실 가치는 이 영화가 더 높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영화는 함의들을 여기저기 던져놓고 여러 가지들을 떠올려 생각해주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트랜센던스에서 느끼는 배신감은 장르적으로 죽어야 될 놈이 되려 선한 놈이고 악해서 죽어야 될놈들을 견제하고자 했던 놈들이 되려 결과적으로 인간세계를 망친 악한놈들이 되어버린 부분에서 나옵니다. 1차적원적인 적대관계로 스트레이트하게 나가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서 뒤통수를 치니 지금 가고 있는 방향이 당연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관객들로서는 얼마나 당황스럽겠습니까.
그런데 이 영화의 가치는 그런 장르 파괴의 부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개인적으로 더 즐겁게 느껴지는 부분이었습니다.
정말 '개인적으로' 즐거웠던 부분은, 이 영화의 내용이 공교롭게도 제가 좋은글터에 남긴 책추천 리뷰의 책 내용, 정치와 진리라는 책의 내용을 우화적으로 표현해주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일 겁니다.
그 책에서 읽은 부분이 플라톤의 동굴의 인간 개념과 피타고라스의 수학적 세계관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영화의 얼개가 바로 그 얘기들과 딱 맞아 떨어지고 있었죠. 거기에 아울러 형이상학을 까대고 있던 근현대의 철학까지 맥락을 같이 하고 있는 점들도 있었구요.
그래서 이 영화의 큰 맥락, 즉 주제는 어떤 사랑이나 주인공을 막고자 하는 자들의 정치적 의도가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좀 더 넓게 보자면, 이렇게 압축되겠죠.
ㅡㅡ네트워크에 연결되는 것은 과거의 디스토피아적 개념처럼 단순히 인간의 개성을 말살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넓고 큰 눈과 관념으로 더 큰 것을 바라보고 해결하는 공동체로 다가갈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ㅡㅡ
뭐 이런저런 의미의 유희들로 즐거운 영화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족으로......트랜센던스 좀 더......
플라톤의 동굴인간개념에 비춰본 영화의 의미:
동굴이 있고 한 쪽은 빛이 비치며 인간들은 그림자만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다 그림자일뿐 늘 실체는 보지 못한단 얘기죠. 하지만 누군가는 동굴 밖의 세상을 봅니다. 그리고는 그걸 동굴로 돌아와 사람들에게 알리려 합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 실체를 믿지 않고 그 사람을 디립다 깐다는 거죠. 그래도 그 사람은 동굴로 돌아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책임감을 행동으로 옮깁니다. 이게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정치가라고 플라톤은 얘기하는데, 이러한 개념은 요즘에는 잘 맞지 않지요. 플라톤이 이런 논리를 편 저변에는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정치적 문제로 사형된 배경과 무관하지 않은 듯 싶습니다만, 어쨌든 영화로 와 봅시다. 주인공은 일체의 감각을 버리고 정신만 업로드되어 인간이란 동굴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획득한 것들로 다시 인간세계를 돌보려 하지요. 이를 타자들은 믿지 못합니다.
피타고라스의 수학적 세계관과 영화의 의미 :
피타고라스는 이 세계가 수학적 진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수학적인 것만이 참된 진리라고 보았고 따라서 그 수학적 진리들 너머에 진실된 영혼이 있다고 보아 거의 수학에 대한 종교적 의미까지 바라보려 했습니다. 인간의 정신이 진수적 데이터로 치환된다는 부분 자체에서는 공각기동대나 매트릭스와 별 다를 것 없지만, 여기서는 진리라는 개념이 중요합니다. 그리스 시절의 철학들은 하나같이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곳에 완성된 진리가 있다고 상정합니다만 근대에 와서 니체를 기점으로 이 완전한 저너머의 진리라는 개념은 깨어지게 됩니다. 영화에서는 그런 저너머의 진리가 현실로 다가왔고 그래서 주인공은 자신의 개성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서 크게 신경쓰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악역처럼 비춰지게 되는 것이구요. 반면 근현대에 와서 니체를 기점으로 하이데거 하버마스와 들뢰즈 푸코 등등에 이르러 그 형이상학적 진리라는 개념의 해체가 이루어져 갑니다. 트루쓰 이즈 아웃데어를 믿지 않고 인간들의 다양성과 개성을 크게 보는 시기인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