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전 올렸던 글입니다.

시시나리 작성일 20.01.11 16: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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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37살인 남자입니다.

 

짱공한지는 오래됬지만 이 게시판이 있는줄은 몇일전에 알았네요.

 

인생이란게 덧없다고는 하지만 각자 아픔이 있고 그 아픔을 극복하면서 살아가는걸 한 과정으로 보지만 지금껏 살아온

 

인생을 돌이껴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해서 용기내어 글한번 적어봅니다.

 

저희 집안은 아버지와 형님과 저 이렇게 구성되어있었죠. 형님과 저는 어머니는 성함만 알고 모습은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제가 1살 형이 3살일때 저희를 버리고 나가셨다 하더라고요. 중간에 잠깐 모습을 본적은 있지만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

 

할 정도입니다. 아버지의 성격은 형님과 제가 지금에 와서 볼때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판단될정도로 엄청난 결벽증

 

을 가지고 계시고 또한 다혈질이십니다. 그런 아버지가 공직생활을 했다는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죠.

 

여하튼 어머니 없이 저희를 키워주셨죠. 하지만 그 과정이 그렇게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어릴때 형님과 저는 끝도없이

 

이어지는 아버지의 폭력에 진저리치면 살아었죠. 아버지가 저희를 때리시는 이유는 저희를 보면 어머니가 생각난다는 것이

 

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결벽증과 어울러져  어릴적 기억은 맞았다는 것밖에 기억이 나지 않죠. 물론 구타이외에도

 

잠안재우거나 겨울에 옷벗겨서 저희 형제를 내보내시곤 하셨습니다. 중학교때인가는 학교 성적표가 우편으로 오는 시스템

 

이였는데 성적표가 다 도착하면 형님과 저를 불러 성적표를 개봉해서 성적이 낮은쪽을 때리는 그런 교육방식을 쓰셨죠

 

한번은 집안에 도둑이 들어서 얼마 안되는 현찰을 훔쳐간적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갑자기 절 부르더니 때리시기 시작하시

 

더군요. 정말 무지막지하게 때리시고는 '내가 맘이 편하기위해 니가 했다고 그래라' 하시더군요. 아마도 집안에 도둑이 들었

 

다는걸 인정하기 싫으셨나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저희들도 머리가 끄기 시작하자 아버지는 학교선생님들을 이용하셔서

 

저희 형제를 묶어두려 하셨습니다. 지각이나 조퇴 결석 혹은 학습태도.숙제관련해서 모든 부분이 선생님을 통해 아버지께

 

전달되곤 했었죠.

 

제 성적은 바닦을 기었습니다. 아버지 성격상 집안에서 공부하기가 그리 녹록치도 않았고 그 당시 심정으로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리도 한몫한듯 하네요. 어차피 제가 성적이 좋으면 또한 형님이 맞는거니까요. 그나마 형님은 중심을 잡으시면서

 

성장하신듯 하더군요. 아버지께서는 형님이 집안의 가장이라고 항상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잘못하면

 

어떤때는 본인이 때리지않고 형님에게 절 때리라곤 하셨죠.

 

그래도 형님과 제가 사이가 그리 나쁜편은 아니였습니다. 형님도 저를 이해해주시려 노력하셨고 저 또한 악몽같은 현실이지

 

만 형님이 주도한게 아니라는건 알고있었으니까요. 

 

중학교때 첫 가출하고 가출을 밥먹듯이 하곤 했습니다. 잡혀 들어가서 피떡이 되도록 맞고도 상처가 다 낳으면 다시 집을

 

나왔다가 또 잡혀들어가곤 했죠. 아버지는 제가 반항한다고 하셨고 중학교 2학년에서 3학년 내내 이과정은 되풀이 됬습니

 

다. 결국 제가 지게되더군요. 형님은 당시 고2셨지만 본인도 아버지의 명령을 어길수는 없는노릇이였습니다.

 

결국 전 고등학교를 야간 산업체로 진학하고 낮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학교를 졸업하게 됩니다.

 

당시 돈으로 월 47만월 정도를 월급으로 받아 아버지가 가져가시곤 8만원정도를 용돈으로 받았지요.

 

아버지는 저희에게 항상 공무원이 되라고 강조를 하셨는데 그를 어길수없으므로 형님과 저는 어쩔수없이 공무원쪽으로 진

 

로를 잡고 전 21살에 정규직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습니다.(참고로 전 기술직이었으며 그당시는 지금처럼 공무원시험이

 

치열하지도 않았습니다. 도리어 큰돈못번다고 공무원 안될려고 하던 시기였죠.)

 

저보다 먼저 지방직이지만 공무원이 되셨던 형님이 군대를 가시고 제가 시험에 합격되고 6개월이 지나자 IMF 가 터졌습

 

니다.  근데 여기서 문제가 터졌습니다. 아버지가 삼촌의 보증을 해주신게 터진거죠. 

 

지금도 말씀을 안하시지만 금액은 6억 가까이 되는 정도로 기억합니다. 아버지는 급한맘에 당시 공무원이던 형님과 제 명의

 

로 대출을 받아서 그 빛을 끄신거죠. 아직도 기억나는게 21살에 아버지따라서 은행돌면서 제 이름에 인감찍으라 하면 찍던

 

게 기억납니다. 형님도 휴가나오면 아버지 따라서 은행돌다가 복귀하시곤 하셨죠. 저희 한테는 걱정말라고 하셨지만

 

결국 우려가 현실이 됬습니다. 그당시 은행들은 지금처럼 통합운영체제가 같은게 없어서 조건만 되면 이은행 저은행 돌면서

 

따로따로 대출을 받으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그리고 그 대출 조건으로 자사 신용카드를 만들게 하곤 했죠.

 

21살에 제 명의로 신용카드만 7장이였고 형님하고 아버지 명의까지 합치면 14장 이상이였을겁니다. 근데

 

아버지께서 이 신용카드 14장을 카드깡을 하신겁니다. 근데 문제는 일시불로 하신거죠. 다음 결제일에 결제금이 1800만원이

 

넘게 나오면서 아버지는 두손두발 다 드셨고 갓 제대한 형님과 저는 아버지에게 보증선것과 저의 명의 대출금이 얼마인지도

 

모를정도였습니다. 당시 23살인 형님과 저는 그렇게 신용불량자가 됬고 매달 월급을 다 합쳐도 각자 이자도 못내는 형국에

 

빠진거죠. 당시에는 IMF 초기라 신용회복제도나 이런건 전무했습니다. 아예 시스템자체가 없던 시대였죠. 카드연체 이자와

 

대출금이자까지 나오는 금액은 월급이 다 빠져나가도 계속 연체되갔습니다. 결국 집안재산과 아버지 퇴직금까지 다 넘기고

 

형님과 저희에서 떨어진 채무액은 형님은 1억5천  저는 1억2천정도씩 남게 된거죠.

 

저역시 영장이 나오고 제 선택은 군대가면 진짜 끝이라는 생각에 방위산업체로 지원해서 복무중 회사가 9개월만에 파산합

 

니다. 당시 병무법상 방위산업체 근무3개월당 군복무1개월 대체로 기억나는군요. 결구 오기로 영장을 연기하면서 오만일은

 

다하게 되더군요. 노가다부터 웨이터 주유소알바 설비일에 당시에 돈된다기에 어부 생활까지 해봤습니다. 하지만 빛은 늘어

 

가기만 하더군요. 결국은 어쩔수없이 해군부사관에 지원해서 다행히 합격하게 됩니다.

 

 23살에 입대해서 24살 1월에 정식입대처리되서 하사계급장달았지만 1주일후에 은행에서 부대로 차압이 들어옵니다.

 

군사법원으로 출두하란 명령받고 당시 계급이 대령인 법무관에게 채무 사실을 알려주자 믿질않더군요. 23살이 빛이 1억4천

 

이 넘으니까요. 법무관 대놓고 그러더군요.  차압막아줄테니 단기만 하고 나가라고

 

아마도 그때만큼 서러웠던 적이 없었나봅니다. 복귀하면서 어찌나 울었는지... 후에 차압불가명령떨어지고 전 관심사병명단

 

에 이름을 올렸죠. 정식근무지 2함대로 오면서 당시 선임들 다 재치고 함장추천까지 딸정도로 열심히 일했지만 관심사병이

 

란 멍울은 그리 쉽게 벗겨지지 않았습니다. 하긴 해군특성상 자살할려고 맘만 먹으면 준비물이 필요없기도 하니까요.

 

다행이 공무원시절이 호봉이 합산되서 동기들보다 급여는 많이 받았지만 턱없는 이자 때문에 힘들기는 별다르지 않았습

 

니다. 그러던중 국가에서 신용회복제도를 만들었다는걸 알게되고 형님과  저도 신청했지만 개인채무에만 국한되므로 보증

 

대한 부분은 감면이 안된상태로 남아있었습니다.  당시 형님도 공무원에 복직되서 근무하시면서 원래는 공무원신분상 할수

 

없는 여러가지 알바로 간신히 생계만 유지하며 아버지를 모시고 계셨죠. 

 

결국 채무조정이 되고 저한테 떨어진 최종금액은 9천정도로 줄어들어서 간신히 생활하면서 채무를 갚을수있는 발판이 마련

 

됬습니다. 적어도 원금까지 상환할수있게 된거니까요.

 

나이 29에 제대하면서 남은 채무액은 4천조금 넘는 금액으로 줄어있었고 퇴직금까지 올인하면 3천정도로 만들수있더군요.

 

그렇지만 형님이 결혼한다는 소식에 퇴직금은 일단 형님 결혼자금으로 빌려주고 제대한날부터 밤에는 대리운전 낮에는 공

 

무원 시험준비를 했으나 제대한 세상은 이전 세상이 아니였습니다. 저로써는 꿈도 못꿀 대학들을 나온 초 엘리트 그룹과의

 

경쟁은 결국 공무원시험을 포기하게 만들더군요. 더욱이 군대가기전까지는 대학생들이 쳐다도 안볼 분야까지도 이제는

 

경쟁이 붙은 상황이 됬더군요. 결구 이런저런 알바로 생계유지하면서 남은 채무를 정리하다 결국 1400정도 남은 상황에

 

채무를 다 정리하신 형님의 도움으로 31살나이에 채무변제가 끝났습니다. 10년 걸렸군요;;  이자만 낸 3년 넘는 기간을

 

빼도 7년이 걸렸네요. 채무변제가 끝나면 정말 행복할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허무하더군요. 제 인생의 10년을

 

허비하고 벌은 돈도 없고 직장도 뚜렷하지 못한 자신이 너무 비굴하게 느껴져 참을수 없는 공허함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통장에서 빠지던돈이 이제는 고스란히 통장에 남아있다는게 신기하게 다가오더군요. 큰빛을 져본 사람은

 

다시 빛을 진다는걸 거기서 알았습니다. 그동안 철저히 지킨 금욕생활이 깨지면서 저도 모르게 지출이 증대하더군요.

 

결국 1년이 지나고 보니 다시 6백정도 빛이 생기더군요. 그리고 1금융권에서 3~4금융권으로 팔아넘긴 아버지의 보증들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신용회복기간이라 추심을 안하다가 회복기간이 끝나자 곳곳에서 연락이 왔고

 

결국 33살정도에 다시 빛이 1500정도로 늘어나더군요. 그사이에 직장을 구해서 나름 경력도 쌓고 급여도 대졸초봉정도는

 

받기에 전처럼 힘들진 않았지만 나이에 비해 너무나 초라하더군요.

 

사람이 낮은곳을 보며 살아야되는데 눈이 달렸기에 나보다 조금더 성공했던가 결혼해서 자식들이 있는 동창들을 보면

 

어찌나 저란늠이 한심하던지 물론 지금은 여자친구는 있습니다. 30이 넘긴 나이에 만나서 둘이 위로하면서 같이 살고 있지

 

요. 여친도 말하곤합니다. 너의 아버지가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으면 너의 인생은 어땠을까 하고요.

 

올해말쯤에 결혼을 생각하지만 아직도 조금 남은 빛과 지나간 시간들이 문뜩 떠올라 이렇게 글 올려봅니다.

 

과연 잘 살아온 인생일까요?? 37이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가슴속 한켠은 너무나 지쳐있네요.

 

이젠 좀 쉬고 싶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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