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세상만들기 기고
국가권력의 또다른 양민학살-보도연맹
김주완/경남도민일보 시민사회부 차장
잊혀진 이름 ‘보도연맹’
“보도연맹을 아십니까?”
1949년 이승만 정권이 대국민 사상통제 목적으로 결성한 좌익전향자 단체인 국민보도연맹(國民輔導聯盟)은 전국의 모든 도·시·군·읍·면·동 단위까지 지부를 갖춘 대규모 조직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전쟁 이후 무려 반세기동안 이 단체의 존재를 잊고 살아왔다. 역사에서도 보도연맹의 이름은 아예 지워져 버렸다. 정보의 바다라는 인터넷 검색엔진에서 이 단체의 이름을 쳐보아도 무슨 무슨 노동조합‘연맹’이나 언론‘보도’와 관련된 사이트만 줄줄이 나열될 뿐 온전한 단어를 찾기란 쉽지 않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조직원이 33만명에 달했던 이 거대한 단체에 관한 자료를 찾기가 이토록 어려운 것일까?
그것은 한국전쟁 발발과 동시에 예비검속 및 예방학살이라는 명분으로 군·경이 이들 보도연맹원들을 살해한 후 철저히 은폐해 왔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서 운좋게 목숨을 부지한 연맹원들도 있고 유가족도 살아있었지만 아무도 이에 대해 말을 꺼내진 못했다. 그들의 죽음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곧 자신도 ‘빨갱이’로 몰려 감옥에 끌려가거나 국가권력에 의해 살해될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희생됐다. 대표적으로 일찍이 50년대에 피학살자 문제를 제기한 진보당 당수 조봉암이 끝내 사상범으로 몰려 처형됐다. 60년 4·19직후 양민학살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나선 전국 각지의 유족회 간부들도 이듬해 5·16군사쿠데타와 함께 모두 용공분자로 낙인찍혀 구속됐다. 이처럼 ‘말 많고 똑똑한 자는 빨갱이’란 말은 그냥 생긴 게 아니었다. 빨갱이 취급을 받지 않으려면 그저 입을 꾹꾹 다물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군사정권은 침묵하고 있는 유가족마저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가족은 물론 친지들까지 감시대상에 올려놓고 끊임없이 그들의 자유를 억압했다. 취직도 맘대로 할 수 없었다. 공무원이나 직업군인·경찰은 물론이고, 제법 번듯한 대기업이나 은행도 경찰의 ‘신원조회’를 필한 사람만이 취업의 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용케 말단 공무원에 합격을 해도 아예 발령을 받지 못하거나 승진·진급과정에서 영락없이 신원조회에 걸렸다. 외국에도 물론 나갈 수 없었다.
이처럼 유족들의 발목에 채워진 족쇄는 80년대 초반까지 풀리지 않았다. 연좌제 폐지로 제도적인 족쇄가 풀렸을 때 학살된 보도연맹원의 유족들은 이미 60대 노인이 돼 있었다. 모든 걸 체념할 나이가 된 후에야 비로소 정부는 그들을 놓아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억울함을 호소할 자유까지 준 것은 아니었다. 국가보안법은 그 후에도 여차하면 용공분자로 잡아넣겠다고 을러대며 유족들의 침묵을 강요했다. 또 연좌제가 폐지되기 전까지 각 읍·면 지서와 파출소에서 관리해온 연맹원들의 신원과 유가족의 동향에 대한 기록은 지금도 상부기관에서 일괄적으로 보관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50년이 흘렀다. 그동안 정부는 왜 이토록 엄청난 행정력을 투입하면서까지 보도연맹 사건을 비밀에 부치려 노력해왔을까. 그건 이 사건이 나치의 유태인학살이나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에 못지않은 엽기적인 국가범죄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 사건은 나중에라도 진상이 드러났지만 보도연맹사건은 지금까지도 철저히 은폐돼 오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다시 말해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은 50년전에 이미 끝난 사안이 아니라 지금도 유가족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주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학살의 실상
이 사건으로 학살된 보도연맹원의 숫자는 도대체 얼마나 될까.
정부에서 철저히 함구하고 있는 바람에 구체적인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전국적으로 최소 수만명에서 최대 수십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우선 그 근거로 6·26 직전 전국의 연맹원 수가 33만명에 달했고, 이 가운데 미처 학살할 틈도 없이 후퇴한 서울의 2만여명을 제외하더라도 약 30만명 이상이 학살대상에 포함됐다는 것을 들 수 있다.
필자가 직접 취재한 내용(한국전쟁 전후 경남지역 양민학살의 진상, 1999. 12, 경남정대연 토론회 자료집 및 경남도민일보 기획시리즈 지역사 다시읽기)과 부산매일팀의 89~90년 취재(<울부짖는 원혼>, 1991, 부산매일), 시사저널 정희상 기자의 취재(<이대로는 눈을 감을 수 없소>, 1990, 돌베개) 등을 종합하여 경남지역의 학살자 숫자를 계산해 보자.
우선 마산지역만 1,600여명이 바다에 수장됐고, 김해와 창원군 일부지역에서 750명, 김해 진영에서 335명, 거제에서 730명이 학살됐다. 또 진주시 명석면에서도 약 200여명이 총살됐고, 진양군 금산면에서 100명, 사천에서 100명, 함안군 여항면 여양리 둔덕마을(현 마산시 진전면)에서도 200여명이 학살된 것으로 주민들의 증언에 의해 확인됐다. 이밖에도 울산 869명, 창녕군 200명, 삼랑진 200명, 통영 800명 등이 희생됐으며, 밀양과 남해·하동·함양·산청·의령·함안 등에서도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어김없이 보도연맹원 학살이 있었다.
일부 지역과 겹칠 수 있는 자료이긴 하지만 50년 9월 3일자 <해방일보>는 진주시 명석면과 산청·하동 등지에서 모두 5,000여명이 학살됐다고 전하고 있다.
이처럼 계산이 가능한 숫자만 해도 당시 경남에선 적어도 1만명 이상이 보도연맹원 사건으로 희생됐다. 또 당시 경남에 소속돼 있던 부산지역에서도 형무소에 갇혀있던 보도연맹원과 정치범 5,000여명을 포함, 약 1만여명이 학살됐고, 마산형무소와 진주형무소의 정치범들도 대부분 학살당했다고 보면 희생자 수는 훨씬 늘어난다. 뿐만 아니라 최근 사회단체에 의해 유골이 발굴된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 뒷산의 500여명과 공비토벌과정에서 무고하게 학살된 거창·산청·함양학살사건 희생자 1,700여명, 산청군 시천·삼장학살사건 200여명 등 보도연맹 이외의 사건까지 모두 합치면 적어도 부산·경남에서만 대략 3만여명 정도로 추산할 수 있다. 이같은 학살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더 밝혀질 여지가 많다. 실제로 필자는 취재과정에서 도내 어느 지역을 가더라도 학살에 관한 증언을 쉽게 들을 수 있었고, 너무나 쉽게 피학살자의 집단 암매장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여러 가지 사정상 나머지 취재를 후일로 미뤄 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같은 사실로 보아 전국적으로는 한국전쟁 발발 후 1년여 기간동안 약 30만명이 학살됐다는 주장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 또 1945년 해방이후부터 53년까지 약 8년간 100만명의 민간인이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 치하에서 학살됐다는 주장도 전혀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
고의적이고 계획적인 살인
특히 보도연맹원 학살은 노근리 사건 등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이나 한국군의 베트남 양민학살과 달리 철저히 고의적이고 계획적인 집단살인행위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우선 이 사건은 개전 초기인 7~8월 북한군이 점령하지 않은 비전투지역에서 이뤄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적군과 교전 중 피아를 구분하기 어려웠다거나 적군과 내통한 혐의로 처형했다는 식의 변명은 아예 통할 여지가 없다.
또한 학살 주체가 당시 이승만의 친위대였던 특무대(CIC)와 헌병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경찰과 우익단체가 보조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일관된 명령체계에 의해 자행된 조직적인 학살이었다.
당시 목격자와 유가족의 증언에 따르면 서북청년단이나 대한청년단 등 우익단체와 경찰이 보도연맹원을 색출 또는 소집하여 형무소로 연행했고, 특무대가 일정한 선별작업을 거쳐 헌병이 학살을 집행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마산의 경우 7월 15일 평소와 같이 시민극장 등 2곳에서 시국강연회가 있다며 연맹원들을 소집한 후 모두 마산형무소로 연행했다. 또 인근 농촌지역의 경우 면소재지 지서나 파출소에서 평시처럼 교육 또는 훈련을 핑계로 연맹원들을 불러 모은 후 그대로 군용트럭에 실어 형무소로 끌고갔다.
이렇게 끌려간 연맹원들은 8월 들어 LST(상륙함)에 실려 나가 마산 앞바다에 모두 수장학살됐다. 마산시 구산면 심리·원전·옥계·남포·설진리 해안에는 연일 나일론 줄로 7~8명씩 묶인 시체가 떼밀려 왔다. 심지어 대마도에도 일본 어민들의 그물에 학살된 시체가 워낙 많이 걸려 들어 조업을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함안군 여항면 여양리 둔덕마을 골짜기의 학살은 헌병이 연맹원들을 총살한 후 그 뒤처리를 경찰에 맡긴 경우다. 이곳의 학살은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므로 좀 언급을 하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진주가 인민군에 함락되기 며칠전인 7월 하순 어느날 오전 8시쯤이었다. 진주시 반성면에서 마산방면 국도를 따라 10여대의 군용트럭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발산고개를 넘고 있었다. 트럭에는 흰 모시한복을 입은 민간인들이 가특 타고 있었고, 그들은 모두 손을 뒤로 한 채 묶여 있었다. 트럭은 마산시 진전면 양촌리 대정마을에 멈췄다. 트럭에서 지휘관인 듯한 헌병장교가 내렸다. 그는 지서를 찾았고, 곧이어 전투복 차림의 지서장과 순경들이 달려왔다.
그 장교가 지서장과 뭔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트럭에 실린 민간인들은 사방에서 총을 겨누고 있던 군인들의 명령에 따라 고개를 푹 숙인채 죽은 듯이 서 있었다.
“트럭은 적재함 난간을 올려세운 상태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서 있었지. 트럭 한 대에 30여명이 탔으니까 그들이 모두 앉으려면 자리가 비좁았던게지. 아마 거기서 헌병장교는 지서장을 통해 총살장소를 물색하고 있었던 것 같아.”
당시 이 모습을 목격한 옥방마을의 박모씨(69)는 이렇게 50년전의 기억을 더듬어냈다.
지서장과 얘기를 마친 장교는 다시 차에 올라탔고, 트럭은 대정마을을 지나 옥방을 거쳐 둔덕골짜기로 올라갔다. 이 골짜기는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경영하던 소화광산이 있던 곳이었다. 당시 이곳은 구리가 났었는데, 해방후에도 곳곳에 폐광이 남아있었다. 헌병들은 저수지 윗쪽 금굴이라는 폐광 앞으로 민간인들을 끌고 갔다. 곧이어 찢어발기는 듯한 총성이 둔덕 골짜기에 메아리쳤다.
“그때 우린 겁이 나서 집안에 처박혀 있었지. 총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지만 누가 나가볼 사람이 있겠어.”(김모씨·여·92·옥방마을)
총성에 놀랐는지, 갑자기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엄청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핏물이 개울물에 씼겨 내려오기 시작하더라구. 그때 비가 안왔더라면 피비린내가 더 진동했을거야.”
200명은 족히 넘는 민간인을 이렇게 학살한 헌병은 다시 지서장을 찾았다. 그에게 처형된 사람의 숫자를 말해주고 “혹시 목숨이 붙어있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니 철저히 확인사살하라”는 지시를 내린 후 마산쪽으로 빈 트럭행렬을 몰고 사라졌다.
명령을 받은 지서장은 그동안 집안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동원령을 내렸다. 시체를 치우러 나오라는 것이었다. 둔덕과 옥방마을의 20세 이상 남자는 모두 이 일에 동원됐다. 과연 헌병의 예상대로 온몸에 총을 맞고도 그때까지 살아있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때 시체를 묻어주고 온 시숙이 벌벌 떨면서 ‘목숨이 붙어있는 사람이 살려달라고 하는데 그냥 산채로 묻을 수밖에 없었다’면서 엉엉 울더라구. 경찰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니 살려줄 수가 있나. 어휴 지금도 소름이 끼치네.”(김모씨·여·78·둔덕마을)
목격한 주민들의 말을 종합하면 당시 진주가 인민군에 함락될 상황에 처하자 국군이 마산쪽으로 후퇴하면서 진주형무소에 있던 정치범이나 보도연맹원들을 이곳에서 학살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보도연맹원 학살은 이처럼 국군의 후퇴시기와 맞물리면서 전국적으로 일정한 시차와 기간을 두고 진행됐다. 이는 현지 군인들의 즉흥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니라 최상층부의 지령에 따라 일률적으로 집행됐다는 혐의를 짙게 하고 있다.
왜 죽였나
그렇다면 왜 이같은 가공할 학살이 벌어진 것일까. 우선 보도연맹이 비록 좌익에서 전향한 사람들로 구성됐다고 하지만, 막상 전시에는 이들이 인민군에 가담할 것을 우려해 예방차원에서 학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정부는 보도연맹원 중 상당수가 신변보호 차원의 위장전향자로 보고 있었고, 전쟁이 일어나자 미리 화근을 없앤다는 차원에서 예방학살을 지시했을 가능성이 높다. 대검찰청의 좌익사건실록에 따르면 위장전향한 가입자들은 지하좌익세력과의 연계를 통해 세력확대를 위한 음성적인 협력을 했고, 한국전쟁 중에는 남한을 점령한 북한의 당조직 재건사업에서 그 활동을 인정받아 조선노동당원으로 입당하기도 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또한 일설에 의하면 한국전쟁중 어느 헌병대장이 “서울은 지금 보도연맹원들이 폭동을 일으켜 군과 경찰이 큰 희생을 당했다”고 했다고 한다.(청주기독교방송, “운명의 그날, 설마 국군이”, <보도연맹을 기억하십니까> 2부, 한지희, 국민보도연맹의 조직과 학살, <역사비평>, 96년 겨울호에서 재인용)
물론 이처럼 위장전향자가 있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이들은 인민군 점령 후 노동당에 가입하거나 인민위원회 등에 가담, 보도연맹원 유족들과 함께 군·경 및 우익단체 회원을 살해하는 데 앞장선 사례도 발견된다. 그러나 이는 대부분 개전 초기 군·경의 보도연맹원 학살에 대한 보복차원에서 이뤄졌다.
또한 서울에서 보도연맹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것도 확인되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처음 전쟁이 발발했을 때 보도연맹원들은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오제도·선우종원과 함께 사상검사로서 보도연맹 창설과 서울지구 보도연맹 운영에 핵심멤버로 관여했던 정희택의 증언이다.
“6·25가 터지자 나는 서울의 보련 맹원들을 각 구별로 집합시켜 그들의 동태를 장악했어요. 이들을 시켜 서울로 쏟아져 들어오는 피난민 안내, 구호사업, 포스터 첨부 등의 일을 했어요. 일부 시민이 피난을 떠나고 행정도 마비돼 갔지만 1만6,800명의 보련은 일사불란하게 상부명령에 따라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요.”(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 하, 역사비평사, 1999, 604쪽)
정희택은 수복 후 군·검·경 합동수사본부 심사실장으로 부역자들을 다뤘는데, 보도연맹원이나 서대문형무소 안에 있던 대부분의 좌익범들 중에 부역자들이 적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공산측으로부터 배척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이로 보아 서울에서 보도연맹원들이 폭동이 일으킨 것을 보고 학살명령을 내렸다는 것은 낭설에 불과하다.
오히려 서중석 교수는 일제가 패배에 임박하여 사상범이나 요시찰 인물을 학살하려 계획했던 것과 비슷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승만이 전쟁 사흘만인 29일 대전으로 피란한 후 발표한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과의 연관성에 주목하고 있다.
종전에 임박하여 일제는 한반도에 전선이 형성될 것에 대비, 비상사태에 따른 조치를 마련하였는데, 그 골자는 연합군이 상륙하면 공산주의, 민족주의 요시찰인을 예비검속하고, 전선이 경찰서에 가까워지면 예비검속자를 후방으로 옮기고, 그럴 여유가 없으면 적당한 방법으로 처치하라고 한 것으로 전국의 경찰서장에게 암호문으로 전달됐다.(임대식, 친일·친미경찰의 형성과 분단활동, <분단 50년과 통일시대의 과제>, 1995, 서중석, 위의 책에서 재인용)
사실 보도연맹이라는 조직 자체가 일제 때 사상탄압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에서 따온 것이라는 점에서 볼 때 당시 권력 상층부에서는 전시의 이들에 대한 처리 문제에 대해서도 일제의 사례를 그대로 도입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이같은 학살계획은 전쟁 10년 후인 60년 3·15마산항쟁과 4·19시기에도 입안된 적이 있다. 경찰과 이승만 정권은 당초 3·15마산데모를 거물 공산주의자의 배후조종으로 몰아가려 했으나 실패하자, 다시 이를 입증하기 위해 마산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는 전직 사찰계 형사 30명을 마산에 투입, 시위군중 속에 들어가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치고 불온유인물을 배포한다는 가공할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들(시민으로 위장한 사찰계 형사-인용자)은 월북한 사람이나 6·25때 학살된 사람의 유족들과 해방직후 좌익단체에 이름을 건 일이 있는 시민들과 사귀면서 선동…일촉즉발의 심정에 사로잡힌 시민들이 데모를 일으키도록 유도하는 것이 첫 사명이었다. 그리고 데모가 발생한 후엔 군중 틈에 끼어서 ‘인민공화국 만세’라는 등 불온 선전물까지 살포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 결과 붙잡히게 되더라도 공작비밀계획은 절대로 누설않고 그 새 사귀어 온 사람들과 접선한 것처럼 자백한다는 것이다. 이들을 매수하기 위해서 경찰은 그들이 징역을 사는 십년동안 가족의 생활을 보장해 준다는 등 별의별 특전을 베풀기로 미리 약속하고 지키기로 했다. 또한 이들의 가장 큰 포섭대상엔 기자들이 끼어 있었다.(…중략…) 만약 4·19가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이 흉계는 실현되어 수많은 의거 시민과 기자들이 빨갱이로 몰려 투옥되고, 3·15 마산의거도 빨갱이의 장난으로 규정되고 말았을 것이다.”(지헌모, <마산의 혼>, 도서출판 엠씨와이, 1994)
“그리고 그 당시 전율할 음모가 그들의 계획대로 진행될 것을 전제로 하고, 시내 모처에서 시민대량학살계획이 모의되었다는 무서운 풍문이 유포되었다.”(김태룡, 3·15마산의거의 역사적 고찰, <마산시사자료집>1집, 1964)
이 비밀계획서는 부산지검이 4월혁명 이후 경남도경 사찰분실에서 입수했으나 아직도 그 전모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전시가 아닌 평시에 반정부 시위가 일어난 걸 갖고도 이런 가공할 음모를 세우는 정권이었으니, 전쟁 때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명령을 내리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학살, 그 이후
이같은 엄청난 학살에 대해 그동안 우리정부는 어떤 입장을 갖고 있을까.
5·16쿠데타 이후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족들을 용공으로 몰아 감옥에 잡아넣은 박정희 정권의 시각은 당시 재판부의 판결문에 잘 나타나 있다.
“6·25동란시에 대한민국 군·경찰에 의해 작전상 처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좌익분자가 아니라는 근거없는 망언과 재판절차없는 사형집행이 부당하다는, 당시의 전국(戰國)을 망각한 편견에 사로잡혀…군관민의 이간을 책동하면 결국 반공체제가 균열되어 간접침략을 획책하는 북한괴뢰집단의 이익이 된다는 정을 알면서도…국가의 안위 따위는 일절 불원하는 비국민적 사상의 불온분자이므로 피고인 김세룡, 동 송철순에게 각 징역 5년에 처한다.”(61년 11월 6일 동래유족회 사건에 대한 혁명재판소 판결문 요지, 정희상, <이대로는 눈을 감을 수 없소>에서 재인용)
이처럼 쿠데타세력은 판결문에서 ‘작전상 처형’‘재판절차없는 사형집행’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오히려 이에 대한 유족들의 진상규명 요구를 이적행위로 몰아 처벌한 것이다. 경상남북도 피학살자유족회 사건에 대한 판결문에도 “보련원 및 국가보안법 기·미결수의 피살은 불법에 의한 것이라 할 지라도 반공을 국시로 하는 대한민국의 충실한 국민이라고 할 수 없을 진대…”하는 구절이 나온다. 이처럼 독재정권은 ‘반공’을 위해선 국민을 얼마든지 학살할 수 있다는 정신파탄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
독재정권의 이같은 인명경시증은 결국 80년 광주학살로 이어진다. 이는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경우 앞으로도 유사시엔 얼마든지 이런 만행이 재발할 수도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면 현 정권은 이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문화일보는 지난 7월 24일 ‘조 국방 양민학살 축소지시’라는 기사에서 조성태 국방부 장관이 “군의 최대 양보선은 양비론이며, 군이 잘못한 점이 있다면 인정하되, 이때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로 인정할 것 등을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이를 통해 정부는 아직도 학살의 진상을 밝힐 의지가 없으며, 오히려 이를 적당히 축소하여 최근 거세게 일고 있는 진상규명 요구를 어떻게든 무마시켜 보려는 의도마저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남지역 민간인학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인터넷 http://report.jinju.or.kr/massacre/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