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임실교육청의 성적 조작을 욕하는가

가자서 작성일 09.02.22 16:3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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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임실교육청의 성적 조작을 욕하는가 [아고라 정해찬님 글]

 

 

기적이 사기로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일제고사 최고 성적으로 서울의 아성을 무너트리는가 싶던 '임실의 기적'이 결국 '임실의 사기'로 드러났다. 황박사의' 줄기 세포 기적'이 브릭스의 학도들에 의해 사기로 증명 되었을때 우리는 허탈감을 느낌과 동시에 분노했었다. 이게 사기를 대했을 때의 일반적 모습이다. 그러나 임실 교육청의 성적조작을 두고 과연 이와 마찬가지의 반응을 보여야 할까?

 

 컨닝과 정직

 

 고등학교 2학년때부터였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나는 아마 이때 처음 컨닝을 해본 걸로 기억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때부터 친구들에게 답을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 나는 비교적 모범적인 학생이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시험 시간에 내가 남의 답을 구하지도 않았지만 다른 친구에게 답을 알려주는 일도 없었다. 간혹 컨닝을 요구하는 친구들이 있어도 모두 거절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정직에 대한 소신을 철저하게 지켰다. 평소에 별로 친하지도 않는 녀석들이 시험날에만 친한 척하며 컨닝을 요구할 때의 그 노회한 얼굴과 심보가 역겨워 거부한 면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정직이라는 가치를 저버리는 행위애 대한 수치심의 문제가 훨씬 중요한 것이었다.

 

 결국 내가 고등학교 2학년, 컨닝질 늦깍이가 된 것은 '정직'보다 우선하는 다른 가치를 봤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생존'이었다. 대체로 시험 기간 나에게 컨닝을 요구하는 녀석들의 면면을 볼때 그들은 평소 학교에 자러오거나 떠들러오는 녀석들이었다. 이렇게 공부와는 담을 쌓는 학생들은 시험 기간이 되면 두부류로 나뉘었는데 그것은 '포기파'와 '컨닝파'었다. 아예 답을 한 번호로 찍고 속편한 잠을 청하는 '포기파'와 선생님의 감시를 피해 부지런히 부정을 시도하는 '컨닝파'. 평소 동일한 행동을 보이던 녀석들이 시험기간에 이렇게 극명하게 나뉘는 까닭은 결국 생존에 대한 태도의 문제였다. 전자는 생존을 포기한 경우라면 후자는 생존을 위해 부정을 저지르는 쪽이었다. 이 상황에서 생존을 포기하는 정직을 칭찬하고 생존을 구걸하는 부정을 욕해야하는 것일까의 문제가 그 당시 머리 속에서 맴돌았던걸로 기억된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이미 시험이 그냥 시험이 아닌 미래의 인생을 걸고 벌이는 생존 게임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시기였고 그래서 나는 정직의 가치를 지키기보다 비록 비루할지라도 시험 날 나에게 생존의 문제를 부탁하는 녀석들의 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생존의 문제를 두고보면 평소 친하지도 않던 나에게 억지로 좋은 낯빛을 하고 컨닝을 요구해야 했던 그 녀석들의 처지를 간과한 채 역겹다고 느끼는 나 역시도 문제가 있는 것이었으니까. 목적이 수단을 합리화 하지않는다고 지금도 굳게 믿고, 그때도 굳게 믿고 있었지만 그 목적이 생존과 같은 본능적인 것일 때 난처해지고 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수단이 부당하다고 해서 생존이라고 하는 양도 할 수 없는 목적을 포기하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지금도 그때의 컨닝질이 인간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컨닝을 생존의 문제로 이해하는게 논리적 비약이라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성적대로 인생이 상.중.하로 나뉘는 현실속에서, 이 중에서 '하'에 포함되는 자의 삶의 내용이 어떠할 것인지 이해하는 전제하에서, '생존'의 뜻을 이해하기 바란다. 인간에게 생존의 문제는 동물처럼 단순한 생명 연장의 의미가 아닌 '인간다운 삶의 영위'라는 점에서 글에서 말하는 '생존의 문제'는 곧 '인간다운 삶'을 말한다.) 

 

 임실의 장발장

 

 임실 교육청이 성적을 조작한 것은 분명 부당한 행위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을 한번 임실 교육 공무원의 입장으로 가져가 보자. 들통날 경우 처벌을 감수하면서까지 교육 공무원이 성적 조작을 감행해야하는 개인적 이유는 찾을래야 찾을 수 없다. 성적 조작에 가담한 공무원에게 무슨 대단한 개인적 영광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없다. 더구나 자신의 행위가 부정한 것이라는 것을 아는 상태에서, 잘못하면 자신이 피해입을 가능성을 견지하고 있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성적 조작에 가담한 것이라면 이는 한가지 이유뿐이다. 바로 그 지역 아이들의 '생존'을 위해서다. 이타적 마음이 도리어 부정한 행위를 저지르게 만드는 역설을 낳은 것이다. 굶는 아이들을 위해 빵을 훔친 장발장의 사례와 동일하다. '임실의 장발장들이 성적에 굶주리는 아이들을 위해 성적 조작이라는 범죄를 저질렀다' 임실 성적 조작 사건은 이런 문제다. 이건 처벌 할 수 있을지언정 욕 할 수 없는 문제다. 생존을 위한 발버둥을 누가 욕 한단 말인가?

 

 학벌 사회에서 일제 고사 성적의 공개는 기본적으로 '신아파르트헤이트'다. 낙후된 지역의 아이들을 3등 국민으로 격리하는 '신인종정책'인 것이다. 저번에 고려대가 사실상 고교등급제를 시행해버린 마당에 어느 학부모가 일제고사 꼴지로 판명된 학교에 아이들을 보내려 하겠는가? 지역 행정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일제고사는 노인만 남고 젊은이는 아이들 데리고 서울로 떠나라는 명령과 다름 없다. 물론 여기에는 '지역을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은 그냥 3등 국민으로 살라'는 가진자의 거드름도 깔려있다. 때문에 이번 임실 성적 조작은 비루하고 부정한 것이었을지언정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인간적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왜 인간적인 것이 부정한 것이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야한다.

 

 아이들을 굶기는 사회라는 시대적 차원의  큰 부정을 간과한 채 장발장의 도둑질이라는 작은 부정만을 탓 할 수 없는 것이다. 식민지의 억압이라는 문제를 간과한 채 윤봉길의 테러 행위를 욕 할 수 없는 문제와 같은 것이다. 식민지라는 시대적 불의 앞에서는 비폭력 노선이냐 무장투쟁 노선이냐하는 문제보다 중요한것은 '시대적 불의'에 대해 저항한다는 사실 자체다. '폭력없는 복종보다 폭력적인 저항이 낫다'라고 말한이도 비폭력의 대명사 간디였다. 마찬가지로 오늘 날 성적으로 사람을 줄세우는 비인간적인 '블의'에 '일제고사 거부'같은 '아름드운 저항'만이 가치로운 것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생각치 않는다. 비록 부정한 방법이고 결과론적인 것일지라도 '성적 조작' 역시도 일제고사라는 불의에 대한 저항의 일부분이다. 시대가 불의하면 아름답건 추하건 저항은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이다.

 

 불의한 시대에는 반드시 저항이 따른다. 그래서 사필귀정이다. 누가 임실교육청을 욕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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