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대의 엽기녀와 꽃남이 만나면??? [예수는 후.레자식님 정리]
오늘은 광복 64돌!
1921년 일제에 의해 좌측통행이 시행된 보도 통행제도의 최근에야 비로소 우측통행으로 바로잡기,
전국 명산 요소요소에 일제가 박아놓은 쇠말뚝 뽑기.. 친일인명사전 작성 등,
이땅에서 식민지 잔재인줄도 모르고 지냈던 식민시대 잔재들이 많이 청산되고는 있지만,
일제에 의한 또 다른 분탕질의 잔재가 아직까지도 우리들 한가운데 당당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 있읍니다..
"삼국통일"..
이것도 청산되지 못한 일제시대 식민지 유산입니다..
삼국전쟁을 "삼국통일" 이라는 단어로 바꾼 것은 일제치하때 부터입니다..
1926년 일제 치하에서 일제가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고 조선을 "황국신민화"하기 위해
일제의 조종에 의한 "조선사 편수회"라는 어용단체의 조선역사 날조가 바로 "삼국통일"이라는 개념입니다..
즉, 일제가 외세에 의한 침략을 합리화하고 울민족의 자주독립 정신을 무력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작품인 셈이죠..
신라가 신라군보다 두 세 배나 많은 당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광활한 만주벌판의 고구려 땅은 용병의 댓가로 고스란히 당나라에 지불한 삼국전쟁은 사실,
두명의 기회주의자가 만들어낸 "역사적 오물" 정도에 불과한 사건임다...
황후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황후를 밀어내기 위해 젓먹이 지 딸을 지손으로 목졸라 죽이고,
그것으로는 성이 안찾던지 남은 아들 마저 죽이고 중국역사에 유일무이하게 여왕이 된 희대의 엽기녀 측천무후..
그녀는 70세가 넘어서도 스무살도 안된 미소년들과 동침을 하고 그녀의 남자는 스님을 비롯 3천명이 넘었다고 중국 역사서 "사기"는 전한다.
(아래 초상화는 측천무후)
(참고: 측천무후의 남자들.)
http://blog.daum.net/yescheers/3740265?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yescheers%2F3740265
그런 엽기녀를 이용해먹은 또 다른 기회주의자, 신라 김춘추..
그가 당나라에 건너가 측천무후 앞에 조아리고 군사를 요청한 이유는 삼국을 통일해서 울민족의 기초를 닦아보겠다는 의도가 아니라, 사실은 백제와의 대야성 전투에서 그의 사위 김품석과 딸이 전사하자 그 원수를 갚기위한 보복극 이었던것..
당시 김춘추와 희대의 엽기녀 측천무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알수는 없지만 김춘추는 "일본서기"에도 기록될 정도로 꽃미남이었고 말빨이 좋았다는거,
http://blog.daum.net/ilovemofat/8772580?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ilovemofat%2F8772580
이렇듯, "삼국통일"이라는 단어는 개인적인 보복과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 희대의 악녀,
그리고 울민족의 주체성을 말살하여 한반도를 영구지배하려는 일제의 의도가 결합된 부끄러운 역사의 오물에 불과함에도,
마치 자랑스러운 울민족의 역사처럼 아직까지 자리매김하고 있는 어이없는 현실입니다.
언젠가 KBS T.V에서 본적이 있는데 북한의 역사교과서에는 "삼국통일"이라는 용어 자체가 아예 없다고 하더군요..
최소한 그 부분은 북쪽의 역사관이 맞다는 생각임다..
왜냐면 당시 신라는 삼국중 군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가장 열등한 국가였고,
삼국전쟁에 동원된 병력도 당나라 군대가 신라군대보다 2배 이상 많았으며 전쟁후, 광활한 고구려의 영토는 신라가 아닌 당나라의 지배로 들어갔기 때문에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이란 근거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늦었지만
이제라도 잘못된 삼국통일이라는 개념도 일제 잔제와 함께 청산되어야, 자주적인 역사관 성립이 가능하고, 전두환이 같은 후안무치한 작자가 튀어나오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고려태조가 후대 왕들을 위해 남겼다는 훈요10조의 내용 중 "차령 이남의 사람은 인제로 등용하지 말라"고 했다는 글..
지역감정을 조장하던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던 그 해괴한 구절은 차령이남 (대체로 전라도 지역) 사람들에 대한 "평가"가 아니고, 사실은 그쪽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을 표현한 내용이라는 것도..
즉, 삼국전쟁 당시 백제가 당나라에 망하면서 발달한 문물이 파괴되고 약탈당한 것은 물론이고, 수 만명의 백제 유민이 당나라에 전쟁포로로 끌려가 노예로 전락했는데,
신라의 지배계층은 대체로 고려의 지배계층으로 이어졌고 오랜 세월이 지나서도 그 후한을 두려한 고려 지배층들은 혹시 전라도 지역 출신이 고위관료로 성장할 경우 있을지도 모를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훈요십조에 전라도 지역을 경계하라는 넌센스까지 만들어졌고,
천년이 넘는 오랜 세월동안 지역차별과 갈등을 조장하는 근거로 악용되기도 했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