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닝’ 권하는 일제고사
지난 9월7일 충북 제천의 한 초등학교 교장은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일명 일제고사) 대비 모의고사 결과 성적이 좋지 못한 학생 10여 명을 교장실로 불렀다. 교장은 통학거리가 먼 학생 몇몇에게 '왜 전학을 가지 않고 우리 학교를 다니느냐'고 다그쳤다. 실직한 아버지를 거론하며 "일 해서 돈 벌어야지, 왜 노느냐" "너희 엄마·아빠 보고 돈 더 많이 벌어서 가정교사 붙여 달라고 해"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병.신' '등신' 등 비속어도 입에 올렸다.
↑ 10월12일 '일제고사 폐지 시민모임'이 학교 현장 파행 사례를 공개했다. 파행 사례는 늘어난 반면 시험을 거부한 학생 수는 지난해보다 줄었다.
↑ 대전교육청이 일선 학교에 내려보낸 중간고사 연기 공문.
↑ 10월13일 서울 한 초등학교 학생들이 일제고사를 치르고 있다.
교장에게 꾸지람을 들은 학생 중 한 명이 집에 돌아와 아버지에게 학교에서 겪은 일을 설명했다. 아버지는 학교에서 겪은 일을 글로 써두라고 말했고, 이 학생이 쓴 글은 며칠 뒤 전교조 충북지부에 전달됐다. 전교조가 이 글을 공개하자 여론이 들끓었다. 며칠 뒤 한 지역 언론이 난데없이 '대필 의혹'을 제기했다. 초등학생이 쓴 글치고는 '지나치게 잘 썼다'라는 이유였다. 하지만 이 학생이 수학·과학 실력은 부족한 반면 글짓기 대회에서 여러 차례 상을 타는 등 글쓰기 재능이 뛰어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론은 다시 뒤집혔다.
컵라면 먹으며 문제풀이 하는 아이들
현재 이 학교 학부모들은 교장의 전출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준비 중이다. 남성수 전교조 충북지부장은 "전교조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기 위해 악의적 기사를 작성한 기자에게 명예훼손 소송을 검토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여기까지가 최근 충북 지역을 뜨겁게 달군 '학습부진아 전학 요구' 사건의 전말이다.
씁쓸한 일이다. 시험성적이 낮다는 이유로 어린이와 부모 가슴에 생채기를 내는 교장, 그리고 기초학력이 떨어지는 학생이 글을 잘 쓴다는 사실을 납득하지 못하는 언론이 만들어낸 교육 현장의 어두운 단면이다. 이런 일들이 일제고사를 앞둔 학교 현장 곳곳에서 벌어졌다.
충북의 다른 한 초등학교의 경우 아예 학교에서 '알바'(계약직 교사)를 고용해 기초학력이 떨어지는 학생 1명에게 개인과외를 시키고 있다. 청주 한 초등학교에서는 예체능 시간에 문제집을 푸는 것도 모자라 일제고사 전까지 '놀토'에도 등교를 강요했다. 점심 식사는 컵라면이었다. 청주 또 한 초등학교는 지역 방송국 기자가 놀토에 문제풀이를 시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학교를 방문하자 학생들을 전부 강당으로 대피시키면서 체육수업 중이라고 얼버무렸다. 학교 측은 아이들에게 '누가 물으면 5학년이라고 대답하라'고 거짓말까지 시켰다. 옥천 한 초등학교에서는 성적이 떨어지는 학생 몇몇을 아예 특수학급(지체장애·학습장애아 학급)으로 보내버리는 일까지 있었다.
다른 지역도 상황은 비슷하다. 전남 여수 한 초등학교에서는 학예회를 취소하고 연습시간을 모두 문제풀이에 활용했고, 다른 한 초등학교에서는 점심시간을 40분에서 20분으로 줄이고 우열반 수업을 진행했다. 부산 지역 공립중학교들은 정규 수업인 6교시 이후에도 국어·수학·영어·사회·과학 등 일제고사 과목만 강제 보충수업을 실시했다. 지역 초등학교 한 곳은 일제고사와 관계없는 1~5학년생에게도 6교시까지 수업을 실시했다. 대전에서는 교육청이 발벗고 나서 중간고사를 일제고사 이후로 연기하라는 공문을 일선 학교에 내려보냈다(위 사진). 일제고사 준비 기간을 충분히 확보하기 어렵고, 중간고사가 끝난 뒤 학업 분위기가 해이해질 수 있다는 이유였다.
참교육학부모회·평등학부모회·전교조 등으로 구성된 '일제고사폐지 전국시민모임'은 10월12일 열린 '일제고사 파행 사례 공개' 기자회견에서 뜻밖의 영상물 하나를 공개했다. 영상물은 강원도 한 초등학교 6학년생들이 밤 9시까지 야간 자율학습을 하는 광경을 보여준다. 학생들은 "한 달 전부터 시험(일제고사)에 대비해 야간 자율학습을 하고 있다. 밤 10시까지 할 때도 많다"라고 증언했다. 이쯤 되면 일제고사가 일선 학교를 뒤흔들고 있다고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교사의 박탈감과 분노 부추겨
눈여겨볼 것은 일제고사가 일선 교사의 박탈감과 분노를 부채질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교조 각 지역지부에는 요즘 일제고사 파행 사례를 폭로하는 일선 교사의 제보가 잇따른다. 그중에는 전교조 소속이 아닌 교사도 있다. 몇몇 사례를 교사의 음성으로 들어보자.
"학교장 지시로 여름방학 전 모의고사 2회분, 방학 중에 5회분, 개학 후 0교시와 7교시를 강행해 3회분을 풀었다. 수당으로 모두 125만원을 받았지만, 교사와 아이들 사이를 학원 교사와 학원생 관계로 만들어버렸다. 6학년 담임인 내가 마치 고3 담임이 된 듯한 기분이다. 교사와 학생 사이를 피폐하게 만드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이렇게 제보를 하면서도 혹시나 나에게 불이익이 돌아오면 어쩌나 걱정된다. 지난번에 나와 동명인 선생님이 전교조 시국선언에 서명을 하는 바람에 곤란했던 적이 있어 두렵다. 그래도 이런 일제식 고사가 어서 사라졌으면 하는 바람이 두려움보다 더 크다."
"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요즘은 공부를 안 하는 아이를 보면 미운 생각이 든다. 얼마 전에는 교감 선생님이 교실 책상을 다섯 줄에서 여섯 줄로 늘리면 어떻겠느냐고 묻더라. 일제고사 때 커닝하기 쉽도록 하자는 이야기였다. 깜짝 놀라 되물었더니 농담이라고 하는데 어처구니가 없었다."
교사들의 반응은 두 가지다. '피하거나, 분노를 삭이거나.' 일부 교사는 "내년에는 절대 초등학교 6학년·중학교 3학년 담임은 맡지 않겠다"라며 손사래를 친다. 더 많은 교사는 "이래서는 안된다"라는 데 의견을 모은다. 김재훈 전교조 충주초등지회장은 "현장 교사 90% 이상이 일제고사가 학교 교육을 망가뜨린다는 데 공감한다. 이는 무척 이례적이다"라고 말했다. 과거 neis 반대 투쟁이나 성과급 반납투쟁 때와 달리 교사들 사이에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된 것은 '아이들'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들이 시험에 허덕이는 모습을 내버려두기 괴롭다는 것이다.
선행학습이 일반화한 데다 지난해 일제고사 거부 교사 7명이 파면·해임된 서울 지역도 물밑 분위기는 심상치 않다. 이헌 전교조 서울지부 초등위원장은 "일선 학교를 방문해보면 비전교조 교사들도 일제고사에 대한 문제의식이 깊다. 징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을 괴로워하는 교사가 늘었다. 거꾸로 말하면 분노의 수위를 조절하는 중이라고 봐도 된다"라고 말했다. 전교조 한 지역 간부는 "교사의 정치 활동에 회의적이던 교사들 사이에서도 다음 교육감 선거에 관심을 기울여야겠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이게 일제고사의 힘인지도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교육과학기술부 학교정책분석과 관계자는 "공무원인 교사가 기초학력을 키우는 정책에 반대하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 일부 교사들이 불만을 가졌다 해도 그게 다수의 의견이라고 보지 않는다. 다만 학교 현장이 파행으로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해 현장지도를 강화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교육당국과 현장 교사 사이에 커다란 시각 차가 존재하는 한 일제고사는 불안한 '시한폭탄'일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이오성 기자 /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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