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보다 황제, 삼성 앞에서 무너진 법치
시사인 주진우 기자
이명박 대통령은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을 특별 사면했다. 이로써 삼성은 경영권 편법 승계와 관련한 법적 책임에서 면죄부를 받았다. 20년 넘게 끌어오던 삼성의 숙원을 풀어준 배경과 의도는 무엇일까.
삼성그룹(삼성)은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집단이다. 삼성그룹의 핵심 기업인 삼성전자는 D램 반도체 분야 세계 1위, 디지털TV 세계 1위, 휴대전화 단말기 세계 2위 등 성과가 눈부시다. 연매출이 100조원이고, 영업이익만도 10조원가량 된다. 삼성전자는 우리나라 총수출액과 국내총생산(GDP)의 6분의 1을 책임진다. 이병철 선대 회장과 이건희 전 회장의 기여를 부인할 수 없다.
삼성이 글로벌 초우량 기업으로 성장하면서 주가도 뛰었다. 당시 이건희 회장 일가는 돈방석에 앉았지만 경영권을 승계할 수 있을 만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건희 회장은 아들 재용씨에게 경영권을 넘기기 위해 집요하게 매달린다. 삼성의 어두운 그림자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이건희 회장을 보위하던 전략기획실(옛 구조조정본부) 가신들은 삼성의 한 쪽에 편법과 ‘비자금의 제국’을 만들기 시작한다. 경영권 승계를 위해 편법·불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를 위해 천문학적 로비 자금과 비자금을 뿌리는 등 삼성의 무리수는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한다. 언제부터인가 이건희 회장은 기업가라기보다 천재적인 능력을 지닌 사람으로 포장되고는 했다. 삼성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는 “이 회장의 어록과 지시 사항은 사내에서 헌법과도 같았다. 이 회장을 신격화하는 사이비 종교 같은 사내 분위기는 참기 힘들었다”라고 말했다.
ⓒ청와대2007년 12월28일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오른쪽)가 경제인과의 간담회장에서 이건희 회장과 활짝 웃고 있다.45억원으로 삼성을 인수한 ‘황제 재테크’
일본 게이오 대학 대학원에 다니던 이재용씨는 1995년 이건희 삼성 회장에게 61억원을 증여받았다. 증여에 대한 세금으로 16억원을 냈다. 이후 나머지 45억원으로 180조원 규모의 삼성그룹 경영권을 장악하는 마법 같은 재테크를 시작한다. 재용씨는 1995년 비상장사인 에스원 주식을 주당 1만9000원에 구입한 뒤 이듬해 주당 30만원에 매각해 370억원을 벌었다. 1996년 12월 삼성 계열사들이 일제히 삼성에버랜드 전화사채(CB) 인수를 포기하고, 재용씨와 동생들이 이를 헐값으로 인수한다. 재용씨는 삼성에버랜드 최대 주주가 되었고, 삼성에버랜드를 통해 삼성생명과 삼성전자를 소유하는 형태로 삼성 경영권을 손에 쥐는 데 성공한다. 김용철 변호사는 “당시 이 회장의 부인 홍라희씨가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냐’며 걱정하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2000년 6월 법학 교수 43명이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로 이 전 회장 등을 검찰에 고발하면서 삼성그룹 경영권 편법 승계 논란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곽노현 교수(방송대·법학과)는 “삼성은 국내 대기업의 맞형 격인데 편법으로 길을 개척하는 일을 많이 했다. 삼성의 승계 문제는 다른 재벌가로 번질 가능성이 커서 중요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수사를 맡은 검찰은 삼성 앞에서만은 작아졌다. 검찰은 주로 ‘바보가 되는 작전’을 구사했다. 공소시효 만료를 하루 앞둔 2003년 12월 검찰은 삼성에버랜드의 허태학·박노빈 전·현직 사장을 불구속 기소했다. 이건희 회장 조사는 미루기만 했고, 실제로 이득을 본 재용씨는 아예 부르지도 않았다. 검찰은 삼성SDS의 비상장 주식은 평가할 방법이 없다는 이유로 여섯 번이나 불기소 처분했다. 인터넷 검색만 해도 알 만한 내용이었다. 이 회장 기소를 주장하던 검사는 옷을 벗거나 인사상 불이익을 받기도 했다. 당시 검찰의 한 고위 관계자는 “이 회장의 관련성이 드러나지 않아 쉽게 부를 수가 없다. 해외 출장이 워낙 잦아 출장 조사도 여의치 않다. 삼성 수사가 버거운 건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검찰이 삼성만 만나면 자포자기하는 이유는 2005년 안기부 X파일 사건에서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안기부에서 도청한 테이프 안에는 이학수 삼성 부회장(현 삼성전자 고문)과 홍석현 당시 중앙일보 사장(현 중앙일보 회장)이 요직에 있는 검사들에게 떡값을 돌리는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삼성, 특검 위기를 기회로 만들다
무소불위 삼성에게도 고비가 있었다. 2007년 10월29일,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가 폭로에 나서면서 삼성은 최대 위기에 놓인다. 삼성가에서 고위직을 지낸 양심 고발자는 김 변호사가 처음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2008년 1월 삼성 특검이 출범했다. 이건희 회장의 집무실과 자택이 압수 수색당했다. 경기도 용인 삼성에버랜드 창고에서는 고가의 미술품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이건희·이재용·홍라희 씨는 물론이고, 이 회장의 개인 비서 박명경씨까지 특검에 끌려가는 수모를 당했다. 사석에서 홍라희씨는 “2년 동안 마음 고생이 심했다”라고 여러 차례 이야기했다. 당시 삼성 전략기획실 고위 관계자는 “이 회장의 구속이 걱정됐고 자칫 경영권 승계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컸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특검은 김용철 변호사를 투명인간으로 만드는 데 가장 많이 공을 들였다. 또 삼성이 조성한 비자금 4조5000억원은 이병철 전 회장이 물려준 돈이었다는 삼성의 주장이 맞다는 점을 지나치게 강조했다. 특검은 비자금 조성과 뇌물 등 핵심 의혹은 건드리지도 않은 채 검찰의 이전 조사를 재확인하는 수준에 그쳤다. 이 전 회장 등을 배임과 조세포탈 등의 혐의로 불구속 기소하는 선에서 특검 수사는 마무리됐다.
법원도 삼성 문제에 관해서만은 검찰과 한편이었다. 판사들은 기묘한 논리를 개발해 삼성의 퇴로를 열어주었다. “전환사채 등의 헐값 발행으로 인한 기존 주식의 가치 하락은 회사의 손해가 아니므로 배임죄를 물을 수 없다.” “검찰이 기소를 잘못했다.” “특검이 수사를 잘못했다.”
따라서 이명박 대통령이 내린 이번 특사는 권력의 삼성 봐주기 시리즈의 완결판인 셈이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10년 넘게 법과 경제 정의를 농락한 삼성을 바로잡기 위해 진행한 검찰 수사와 특검, 재판 과정이 사면으로 그 의미를 잃었다. 국익과 경제 논리가 사법부의 판단을 훼손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건희 전 회장이 사면됐지만 그가 삼성그룹 경영의 전면에 나설 가능성은 희박하다. 대신 동계올림픽 유치에 올인할 것으로 보인다. 삼성을 지휘하는 역할은 이제 마흔한 살 재용씨의 몫이다. 어찌보면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와 특검, 그리고 대통령 사면이 ‘이재용 시대’를 앞당기는 방아쇠 구실을 했다.
삼성은 사면이 있기 전인 지난해 12월 중순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이 인사를 통해 이재용 씨는 삼성전자 부사장으로 승진하면서 최고운영책임자(COO·Chief Operating Officer)에 임명됐다. 이인용 삼성전자 부사장은 “COO는 국내에 처음 도입되는 제도로 경영관리나 사업을 책임지는 구실을 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재용 부사장은 외형상 최지성 사장을 보좌하지만 사실상 경영 전면에 나서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