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바이트로 갚은 빚 3억원

면죄자 작성일 10.04.22 19: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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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로 3억빚 갚은 '알바의 달인'

인터뷰/ 이종룡씨 "내게 알바는 전쟁이자 삶"
 
아르바이트만으로 한달에 450만원을 번다.

대신 24시간 거의 쉬지 않는다. 잠깐잠깐의 토막잠이 가장 달콤한 천상의 휴식이다.

이종룡(49) 씨는 지난 10년 동안 소위 '정식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에겐 아르바이트가 직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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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버는 것 같지만 지난 10년 동안 그의 돈은 그의 돈이 아니었다. 거의 고스란히 빚을 갚는데 써야했다. 10년 전 IMF의 상흔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빚도 다 갚았다. 무려 3억5000만원이었다. 1억원이었던 빚이 이자로 불어나 배보다 배꼽이 더 커져버렸다.

지난해 10월29일 마지막 빚 100만원을 송금할 때를 잊지 못한다. 아직도 그때의 감격을 눈물로 회상하곤 한다.

최근 이씨는 전셋집도 새로 구했다. 친척들도 십시일반 도와줬다. 그가 처음으로 사글세를 벗어나는 순간이다.

이제는 버는 대부분을 저축도 하고 보험도 두개나 들었다. 길고긴 고통의 시절에 대한 보답이다. 그런데도 이종룡 씨는 앞으로도 아르바이트를 계속할 작정이다.

"남들은 잠든 새벽시간에 일거리가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이야."

하루 20시간 아르바이트, 쉴 틈이 없다

"정말 그렇게 살았어요?"

이종룡 씨의 하루를 보면 누구나 이렇게 묻는다. 심지어 친척들도 최근 그의 하루 생활을 알게 됐다. 그동안 연락이 끊어졌던 것을 이제서야 이해하면서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씨의 아침은 새벽 2시에 시작된다. 신문보급소에서 신문에 광고지를 삽입하는 일이 첫 일과다. 대여섯시까지는 그 신문을 배달한다. 처음엔 한 신문만 배달했지만 지금은 두가지의 신문을 나른다.

여섯시쯤 배달이 끝나면 집에 들러 간단히 씻고 옷도 갈아입는다. 다음 행선지는 떡공장이다. 떡공장에서는 사모님이 아침밥을 차려준다.

"떡공장에서 일하기 전에는 컵라면에 뜨거운 물만 받아 곧바로 배달을 다녔지. 배달을 마친 후 그 라면을 먹곤 했는데 이제는 아침밥을 든든히 먹을 수 있어서 참 좋아."

그가 아침 떡배달 아르바이트를 5년여 동안 꾸준히 해온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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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합차에 배달할 떡을 싣고 전주 시내에 있는 3곳의 대형 소매점을 방문한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새 떡 시루를 건네주고 빈 떡판을 받아온다. 떡배달을 마치면 아침 9시가 조금 넘는다.

얼마 전까지는 다시 떡을 싣고 군산에 있는 대우자동차 공장까지 배달을 했었다. 그런데 경기불황으로 대우자동차가 떡 구입을 중단했다.

대신 다른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몸이 불편한 분의 개인 운전기사일이다. 같이 장도 보고 운동도 시켜드리는 셈이다.

오후엔 학원차를 운전한다. 학원생들을 실어오고 다시 집까지 태워다주면 해가 저문다.

밤에는 공중목욕탕으로 간다. 목욕탕 청소도 하고 손님들 때도 밀어준다.

"목욕탕 청소를 말끔하게 끝내고 새로 받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어. 또 목욕탕 보일러실에서 1시간쯤 잠을 청하는데 온몸에 땀을 쫙 빼며 자고 나는 그 순간이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지."

그의 아르바이트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배달을 하며 다니는 사이에 폐지가 보이면 곧바로 챙긴다. 그렇게 한달에 모아 파는 폐지의 양도 상당하다. 한달 동안 배달에 소요되는 기름값은 거의 폐지를 고물상에 팔아 얻는 돈으로 충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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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수를 따지지 마라"

이종룡 씨는 젊은이들을 보면 안타까울 때가 많다.

"떡공장에서 일하는 젊은 직원들이 일이 힘들다거나 보수가 적다고 쉽게 그만 둘 때 타이르기도 했어. 또 신문배달도 6개월 이상 하는 경우도 거의 없어."

그가 젊은이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단 하나다.

"돈의 많고 적음만 따지지 말았으면 좋겠어. 지금 할 일이 있고 또 열심히 살 수 있는데 돈만 바라보고 일을 하면 그게 얼마나 불행한 거야."

그는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노하우가 따로 있다. 우선 아르바이트 구인정보는 생활정보지에서 얻는다. 그가 했던 거의 모든 아르바이트는 생활정보지 덕이었다.

또 아르바이트 장소는 집에서 최대한 가까운 곳으로 잡는다. 지금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떡공장이나 학원, 목욕탕 모두 그의 승합차로 5분 이내 거리에 있다. 이동시간을 최대한 줄이기 위함이다.

"처음 2년 동안은 수많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고생도 많이 했지. 이제는 어느 정도 틀이 잡혀서 하루가 꽉 짜여 돌아가."

겨울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나 정도 줄인다. 겨울 새벽 신문배달이 가장 고되다. 날씨는 춥고 길은 미끄러운 데다 서울에서 신문이 늦게 도착하기라도 하면 하루 일과가 줄줄이 밀려버리기 때문이다.

4월은 아르바이트를 재조정하는 시기다. 겨울을 나고 한두개 정도의 아르바이트를 바꾼다. 작지만 변화를 도모하기도 한다.

그는 막노동일은 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묶여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르바이트를 하면 하루에 수많은 일을 경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렇게 다양한 일을 하기 때문에 질리지 않고 하루 20여시간을 일할 수 있다.

"알바 10년 더 한다"

이종룡 씨는 이를 드러내고 웃지 않는다. 웃어도 입을 가린다.

10여년 전 시계사업을 하다가 부도가 나고 빚에 쫓겨 도망다니다가 재기하겠노라고 의지를 불태우며 송곳니를 뽑았기 때문이다. 스스로 고통을 택한 것은 나약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기도 해서였다.

아르바이트가 7개, 많게는 10개까지 늘어나기도 했다. 아르바이트와의 전쟁이었고 빚과의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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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것이 마흔을 갓 넘겼을 때다. 그리고 빚을 모두 갚자 어느새 쉰이 됐다.

꼬박 10년을 빚만 갚으며 보냈다. 빚으로 시작한 사업이 이렇게 큰 시련을 가져다 줄 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빚 갚는 동안에 집에는 1000원짜리 한장 가져다주지 못했다. 돈 한푼 받지 못하고 아내 혼자 살림을 꾸리는데 얼마나 힘들었을까.

"울기도 많이 울었지. 겨울에 젖은 운동화를 신고 발이 시린데 어찌나 서럽던지. 한번은 새벽에 집에 잠깐 들어갔는데 전기가 안 들어와서 아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억장이 무너지기도 했어."

지금은 빚 때문에 도망다니다가 말소된 주민등록도 되살아났고 의료보험도 10년 만에 다시 가입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도 이씨는 힘든 아르바이트 생활이 오히려 고맙다.

"빚을 갚지 않았다면 도박에 빠져 있거나 술에 빠져 있었겠지. 빚을 갚으며 규칙적인 생활로 건강을 얻었고 가족의 소중함도 깨달았어. 일하는 재미와 휴식의 달콤함도 느끼게 됐어."

그는 아르바이트를 앞으로 10년은 더 할 작정이다.

"이렇게 고마운 아르바이트를 그만둘 이유가 없지. 다시 10년이야. 지금 살았던 모습 흐트러짐 없이 다시 10년을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 계획이야."






‘알바’로 3억5000만원 빚 갚은 기적의 아버지

“재기의 발판 마련해준 내 가족이 희망”

이종룡(49·전북 전주)씨는 ‘알바의 달인’ ‘기적의 사나이’로 불린다. 이씨는 하루에 신문 배달, 떡 배달, 학원차 운전, 목욕탕 청소 등 7개의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잠을 2시간밖에 못 잔다. ‘뼈 빠지게’ 일해서 월 450만원을 벌지만 지난 10년 동안 집에는 1000원 한장 가져다 주지 못했다. 3억 5000만원이나 되는 빚을 갚아야 했기 때문이다.  

●알바 7개 뛰며 10년만에 재기

이씨는 월 매출액이 3000만원인 시계 도매점을 운영하다 1998년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고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1년을 술로 방황하던 그를 붙잡은 건 다섯 살 연상의 아내 양모(54)씨와 하나뿐인 아들(30)이었다. 아내 양씨는 ‘이씨와 이혼하면 먹고 살게는 해 주겠다.’던 처갓집의 설득에도 꿈쩍하지 않고 지난 10년간 한결같이 이씨의 곁을 지켰다. 이씨는 “얌전한 부잣집 셋째딸을 낚아채 고생만 시켰는데도 끝까지 나를 믿어준 아내”라며 고마워했다.

1998년 당시 고3이던 아들은 공부를 잘해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꿈꿨지만 빚쟁이들이 들이닥쳐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모습을 보고 충격으로 집을 나갔다. 지금은 전남 광주에서 자리를 잡고 부모에게 다달이 용돈 20만원을 보태주면서 성실하게 살고 있다.

●“아내·아들만을 위해 살겁니다”

아들을 대학에 보내지 못한 게 가장 미안하다는 이씨에게 아들은 “대학 나와도 놀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냐.”며 오히려 아버지를 위로하곤 한다. 이씨는 최근 사글세방을 벗어나 어엿한 전셋집을 마련했다. 이씨는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준 가족이 희망”이라면서 “평생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죽을 때까지 아내와 아들만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다.

글ㆍ사진 박성국기자 ps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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