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대통령 발언 또 '마사지'했다.
청와대가 이명박 대통령의 11일 국무회의 발언 일부를 누락한 채 언론에 공개한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지난 2월 이 대통령의 영국 BBC 인터뷰 발언을 임의로 바꾼 사건에 이어 청와대 홍보라인의 무리한 '마사지'가 또다시 논란이 될 전망이다.
<오마이뉴스> 기자는 이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13일 청와대 행정관으로부터 입에 담지 못할 막말을 듣기도 했다. (관련 기사 : 청 행정관 폭언 "자식 형편없이... 오마이뉴스에 무슨 국민이 있어!")
그러나 <오마이뉴스>가 16일 복수의 청와대 관계자들을 취재한 바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당시 국무회의에서 2008년 촛불시위를 언급하며 "정부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보고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 뒤 "정부도 반성할 건 반성해야 된다. 그런 내용도 (보고서에) 들어가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이 같은 사실은 박형준 정무수석이 13일 <평화방송> 라디오 인터뷰에서 "대통령 발언 중에 '이걸 기록할 때, 정부도 그 과정에서 반성해야 될 것은 반성해야 된다'는 표현이 있다"고 한 말과도 일치한다.
김은혜 대변인, 대통령이 "촛불 참여인사 반성 없다"고 말한 부분만 브리핑
그러나 11일 오전 김은혜 대변인의 서면 브리핑에서는 이러한 발언이 누락되고 "많은 억측들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됐음에도 당시 참여했던 지식인과 의학계 인사 어느 누구도 반성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만 부각됐다. 이 대통령의 발언이 일부 언론을 통해 알려진 후 "국가원수가 정부 책임은 나 몰라라 하고 시위 참여인사들 탓만 한다"는 논란이 일게 된 것도 김 대변인의 브리핑이 원인을 제공한 측면이 있다.
당시 국무회의에 배석한 청와대의 고위관계자는 "대통령의 발언은 정부와 시민사회 모두 2년 전에 있었던 일을 깊이 성찰해보자는 뜻으로 읽혔다. 그런데 언론에는 대통령이 촛불시위 참여인사들만 일방적으로 비난한 것으로 나와서 황당했다"며 "대변인이 왜 그런 식으로 브리핑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김 대변인은 당일 오후 브리핑에서 "(대통령의 발언은) 지식인의 책임도 중요하고 정부도 책임 있는 자세를 견지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였다. 백서를 만들라는 게 한쪽을 일방적으로 탓하는 언급은 아니었다"고 부연 설명했지만, 대통령이 회의석상에서 정부의 반성을 언급했음을 명확히 알리지는 않았다. 대변인의 설명이 모호한 탓에 상당수 언론도 추가 브리핑을 '파문 수습용'으로 해석했다. 출입기자들 사이에서는 "대통령의 말실수를 주워 담느라 대변인이 고생한다"는 말까지 오갔다.
당시의 진실을 따져보면, '실수'를 한 쪽은 이 대통령이 아니라 청와대 참모들이다. 대통령의 '정부 반성' 발언을 처음 공개한 박형준 수석은 16일 기자와 한 통화에서 "청와대 홍보수석실로서는 그 나름대로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 있었을 것"이라며 홍보수석실을 변호했다.
이동관 수석, BBC 파문 당시 "재발 않도록 하겠다" 약속했건만...
그러나 청와대 홍보라인은 불과 4개월 전에도 똑같은 잘못을 저지른 적이 있다.
김은혜 대변인은 1월 29일 "이 대통령이 영국 BBC와의 회견에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연내라도 안 만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는 보도자료를 기자들에게 배포했는데, 실제로는 대통령이 "김 위원장과 연내에 만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사소한 토씨 문제로 보일 수도 있지만, 언론사들은 "남북정상회담이 임박했음을 시사하는 대통령의 발언을 대변인이 멋대로 고쳤다"고 항의했다.
대통령의 실제 발언이 KBS 뉴스를 통해 방송되자 김 대변인은 논란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뜻으로 사의를 표명했다.
이틀 뒤 이동관 홍보수석은 "(이 대통령의) 말씀은 뭔가 진행돼서 될 것 같다는 오해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마사지'를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언론의 이해를 구했다. 이번에는 이 수석의 '마사지' 발언이 비판의 도마에 올랐지만, 대다수 언론의 '묵인' 속에 사건은 유야무야됐다. 이 수석의 지원사격을 업은 김 대변인도 2월 1일 "죄송하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며 업무에 복귀했다.
그런데 대통령의 민감한 발언이 임의로 누락되는 일이 또 벌어진 것이다. 청와대 내에서도 "정부도 반성해야 한다는 대통령의 말을 굳이 뺄 이유가 있었을까"라는 반응이 나왔다.
청와대, 정치적 유불리 계산해서 대통령 발언 '마사지'했나?
청와대 홍보라인이 정치적인 유불리를 계산해서 대통령의 발언을 '마사지'한 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공교롭게도 국무회의가 있던 날 오전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9일 청와대 내부 조사 결과, 천안함 사건 초기 40%대 초반까지 떨어졌던 대통령의 지지율이 51.7%까지 상승했다"는 얘기를 출입기자들에게 흘렸다. 일부 언론이 대통령의 '촛불 반성' 발언을 "지지율이 오른 대통령이 자신감이 생겨 한 발언"이라고 해석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이 대통령이 촛불시위 참여인사뿐만 아니라 정부에 대해서도 반성을 요구한 사실이 드러나면 대통령의 말은 "너도 틀렸고 나도 틀렸다"는 원론으로 의미가 축소된다. 야당과 시민단체 등 촛불시위 주도 세력과 대립각을 세워 보수 대 진보의 대결 구도로 지방선거를 치르려는 여권의 선거전략과도 어긋난다.
대통령의 공식행사에 자주 배석하는 정부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이 '정부를 비판하는 주장에도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정부가 반성할 일이 많다'며 관료들을 질책하는 걸 지켜본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언론에 공개된 것 이상으로 많이 혼나기 때문에 관료들도 많이 긴장한다. 그런데 지난번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이 '정부 반성'을 언급한 걸 언론에 왜 공개 안 했는지 의문이다. 청와대의 홍보수석실이 아직도 미숙한 것 같다."
이번 사건에서 이동관 홍보수석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동아일보> 정치부장을 지낸 이 수석은 청와대의 '편집국장' 역할을 하고 있다. 청와대 대변인이 대통령의 비공개 발언을 브리핑하기 전 "이 정도면 내보내도 좋다"고 최종 감수를 하는 사람이다. BBC 파문 당시 그가 "일하다가 빚어진 실수이니 넓게 양해해주기 바란다"고 김은혜 대변인을 감싼 이유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대변인실 "대통령 발언 바로잡을 기회 놓쳐서 아쉽다"
당시 이 수석은 "송구스럽다.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제도적 개선책을 포함해 여러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똑같은 잘못을 반복한 것에 대한 비판이 다시 제기돼도 이 수석은 건재할 것이라는 전망이 유력하다. '이명박 청와대'에서 그는 대통령의 신임이 가장 두터운 사람이다.
이동관 수석과 김은혜 대변인은 <오마이뉴스>의 반론 요청에 응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청와대 대변인실 관계자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국무회의가 대략 오전 10시~10시 30분경 끝나는데, 대통령의 방대한 말에 비해 정리할 시간은 상대적으로 적다. 석간신문 마감시간에도 맞춰야 하니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다. 그날 일도 여유가 없어서 생긴 실수로 이해해달라. 물론 오전에 배포한 대통령 말씀을 오후 브리핑에서 바로잡을 기회가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출처 : '정부반성' 쏙 빼고 '촛불반성'만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