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 사태...도를 넘은 광기어린 영어집착.

가자서 작성일 11.04.11 20:4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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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스트 사태...도를 넘은 광기어린 영어집착. [달뱀님 글]

 


근대 최고의 수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폴 에어디쉬의 영어발음은 너무나 지독해서 알아듣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폴 에어디쉬가 ‘오렌지’로 발음했는지, ‘어렌쥐’로 발음했는지 따위는 아무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직 그의 업적만이 찬란히 남아있을 뿐이다.

 

현대 물리학의 전무후무한 천재인 아인슈타인은 언어능력이 워낙 뒤떨어져 어린 시절엔 거의 지진아 취급을 받기도 했다. 미국 생활을 하면서도 그의 영어 문법 실력과 발음법은 놀림거리가 되곤 했는데, 아인슈타인이 ‘오렌지’로 발음했는지, ‘어렌쥐’로 발음했는지 따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역시 그의 찬란한 업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 교육정책을 주관하는 높은 분들은 너무도 똑똑해서, 지금 이 시대에 아인슈타인이나 폴 에어디쉬같은 사람들은 우리나라 대학에서 감히 강의실에 설 엄두도 못 낼 것이다.

 

미.친 영어타령이 정말 도가 넘었다.

일제시대 우리말 말살 정책조차 이정도로 음흉하고 집요하지는 않았다.

물론 영어는 중요하다.

어떤 통계에 의하면 전 세계의 최신정보의 80% 이상이 영어로 쓰여 진다고도 한다.

 

그러나 영어를 ‘할 줄’ 아는 것과 ‘완벽하게 할 줄’ 아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카이스트에서 수업을 영어로 하지 않는다고 해서, 네이쳐지에서 갓 발표된 따끈한 최신논문을 카이스트 학생들이 읽지 못하게 되는 사태가 발생하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 최고의 영재들이 모인 곳이 카이스트다. 기껏해야 같은 영어 논문을 몇 십분 빨리 읽느냐 정도의 차이가 있는 정도일 것이다.

 

그럼 학생들이 1시간 읽을 영어 논문을 30분만에 읽게 하자고 카이스트가 희생하는 것은 무엇일까? 고따위 것을 위해 그들이 희생시키는 것은 바로 학생의 창의력과 강의과정의 ‘피드백’이다.

 

18차 언어학자대회에서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로메인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은 모국어를 사용할 때 가장 창의적으로 사고할 수 있다.”

 

어떤 정보를 받아들일 때, 그리고 그 정보를 재조합할 때 그 정보의 형태가 모국어일 때 뇌는 가장 활성화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굳이 지적하지 않아도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미 알고 있는 언어라 할지라도 후천적으로 습득된 언어는 일단 좌뇌의 사고세탁을 거쳐 유입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순수 학문이건 공학이건 수학이건 물리학이건 이공계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창의력이고, 그 창의력은 오직 상상력과 감수성에 의해서만 발휘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모국어로 정보가 유입될 때 가장 활발해 진다.

수학을 그만두고 시인이 되려는 자신의 제자에 관해 수학자 힐베르트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그래. 그 친구는 수학자가 되기에 상상력이 빈약했지.”


시인이 되기 위해서 ‘외국에 자신의 시를 발표할 때를 대비하기 위해’ 모든 시를 영어로 배우고, 영어로 쓰라고 한다면 어떻겠는가? 훌륭한 시는 고사하고, 그 시인이 제대로 된 시 한편이나 쓸 수 있을까?

 

그냥 집에서 놀라고 해도, 로봇 부품 만지작거릴 애들 모아놓고 영어로 수업 안하면 돈 뜯어낸다는 협박질이나 하고 있으니, 도대체 그게 도대체 무슨 놈의 교육인가?

이런 식의 영어 수업이 주는 이점은 딱 하나가 있다. 바로 단기적인 개혁성과로 교수들이 여기저기서 생색내기에 참 좋다는 것이다.

‘보세요. 내가 총장되고 우리학교 애들이 이렇게 영어를 잘해요.’

‘보세요. 내가 총장되고 우리학교 애들은 하버드 애들처럼 영어를 잘해요.’

‘보세요. 내가 총장되고 우리학교 애들은 글로벌 스투던트가 됐어요.’

그 생색을 위해 학생들의 에너지와 지성과 감수성은  얼마나 낭비되고 있는 걸까?

 

그리고 한상근 교수의 말마따나 영어 수업은 강의에서 너무 중요한 ‘피드백’을 원천적으로 가로 막는다.


 

똑똑한 한국 학생들의 고질적인 단점이 바로 ‘질문’ 안하는 것, ‘참여’ 안하는 것이다.

안 그래도 폐쇄적인 주입식 교육에 찌든 한국 학생들에게 ‘영어’로 강의를 한다니!


미국 학생들 10번 질문할 때 1번 질문 할까 말까하는 게 한국의 학생들이다. 어쩔 수 없다. 엄청난 정보를 주입하기 위해, 그래서 대학에 가기 위해 그것에 익숙해져야만 했으니까.

그런데 그런 학생들에게 모국어로 수업해도 모자랄 판에 영어로 수업을 한다니!


교수와 학생간의 소통을 원천봉쇄하겠다는 확고한 신념이 없다면 불가능한 발상이다.


 

1955년 카우아이 섬에서 사회에 ‘실패하는 인간’과 ‘성공하는 인간’의 차이를 규명하기 위한 유례없는 대규모 실험이 진행된 적이 있었다. 그 실험 결과를 요약하면 인간은 환경적, 유전적 요인보다 ‘피드백’이 가능한 관계가 구축되느냐 마느냐에 그 인생의 성공여부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어떤 개인이 얼마나 iq가 높냐, 혹은 얼마나 풍족한 가정에서 자랐느냐는 그 개인이 시련에 얼마나 잘 대처하느냐와 거의 무관하다. 다만 일련의 인생의 좌절, 불행을 딛고 일어나는 사람들은 모두 지속적인 피드백이 가능한 인간관계가 적어도 하나는 있었다는 공통점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의 뇌가 가진 모든 능력은 오직 피드백을 통해 강화된다. 단순한 지적 능력 뿐 아니라, 불행이나 고난에 대처하는 모든 행동 전략이 타인과의 관계성이 얼마나 구축되어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교육에서만 성장한 학생이 설사 세상 모든 지식을 다 머릿속에 우겨 넣었다 할지라도 그걸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앞으로 생겨날 수많은 학문적 위기와 고뇌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조금 배운 정보량은 적더라도, 활달한 토론문화의 강의를 통해 지적능력을 훈련한 학생이 학문적 위기와 난관에 보다 더 현명하게 잘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인간의 뇌는 사회적이다. 유연한 사고, 위기와 난관에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뛰어난 뇌는 오직 다른 뇌들과의 활발한 소통을 통해서만 구축이 가능하다.


일방적인 영어수업, 주입식 강의, 폐쇄적 소통의 강의 과정에서 훈련된 학생들이 학문적, 진로적 위기에 봉착했을 때 보다 더 심각한 우울증에 빠지고, 심지어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결국 카이스트의 영어강의 정책은 교수와 학생들의 창의성, 사고의 유연함, 감수성, 상상력등을 희생하여 학교 운영진의 단기적, 가시적 성과를 과시할 수 있다는 것 외엔 하나의 이득도 없어 보인다.

그리고 그 해악은 지금 보는 것 이상으로 잠재되어 있을 것이다.

(이런 넋두리 글도 사실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만은 답답한 마음이나마 조금 풀어보자고 몇 자 적 다는 것이 좀 길어 졌군요...)

 



교육을 가장하여 학생들을 일찍부터 경쟁과 전문성의 영역 속으로 과도하게 밀어넣는 것은 정신을 말살시키고 문화적인 삶을 파괴한다. 심지어 그것은 미래 학문의 발전조차 가로막는 결과를 낳는다. 학점 체계로 학생들을 부담스럽게 하는 것은 탐구 정신을 방해하며, 필연적으로 문화의 부재현상을 낳는다. 교육은 그것을 받는 학생이 강요로서가 아니라 더없이 귀중한 선물로서 받아들이는 그런 것이 되어야 한다.

 


- 알버트 아인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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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분들이 글을 오해하고 계시는군요.

 

전 카이스트에서 영어가 필요하다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어는 하지말고 전공만 해야된다는 것도 아니고요. 

그러나 카이스트 학생 모두가 영어를 '완벽하게 잘 할'필요는 없다는 것이고, '그 쓸데없는 완벽함'을 위해 너무 많은 희생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어를 '보다 더 완벽하게 잘 하기' 위해 카이스트가 희생시키고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모든 학문을 라틴어로 가르치고, 모든 지식은 라틴어로 전파되던 시절의 중세 유럽은 어떠했습니까?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각 나라들이 중세의 라틴어를 버리고, 자국의 언어로 문화와 지성을 퍼뜨릴때 비로서 근대를 연 화려한 르네상스 시대가 열렸습니다.

 

모국어의 창의성은 단지 유아시절에 습득되는 정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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