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 아니라,새로운 사실에 어떤 반응일지 궁금해서
올려 봅니다.
저 또한 박대통령님의 경제발전과 리더쉽을 존경합니다.
하지만,양날의 칼이고 해야할까...?
이런 모습도 있구나해서 , 과연 정경사에서의 반응이 너무 궁금해서 올린겁니다.
리플 확인 바로바로 할게요...
박정희(다카키 마사오)새끼에 대해서 잘 알아보자~! 각종 이야기거리
http://blog.naver.com/jjooni4706/30089367390
다카키 마사오
1) 월남전 사상자 보상금 12억 불 의 행방은 알 길이 없고 스위스은행에 예치된 60억불 이 넘는다는 돈의 행방도 알 길이 없다. 죽은 다음에 청와대에서 나온 천문학적 고액권도 행방을 알 길이 없다.
(민족사랑 1999년 9월호)[박정희당시 중정부장 이후락이 스위스 은행 비밀자금 관리를 했고, 김성곤, 김형욱등이 불법정치자금 모금 -프레이저보고서]
2) 박정희는 1971년 4.27 대선자금으로600-700억원 (그해 국가예산의 5,242억원의 10%가 넘는 액수)을 뇌물로 조성했다 -미국 프레이저보고서 내용.
3) 박정희가 구테타를 일으키고 곧 새나라자동차사건, 워커힐사건, 빠찡꼬사건, 증권파동사건의 4대의혹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박정희자체의 초기부터 얼마나 부정, 부패한 인물인가를 증명해주는 사건들이다. [미대사관 하비브 정무참사관 작성한 보고서에 의하면 62년 주가파동시 40-60억환 챙김 (3-4천500만달라)]
4) 박정희 측근들의 부정축재
-박정희 당시 중정부장이었던 김형욱 미망명시 재산 약2600만불(미의회 보고서), 그러나 제3국에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재산이 있을 것으로 추산.
-70년 이후락(박정희비서실장.중앙정보부장), 김형욱(중앙정보부장), 김성곤은 각각 1억불 이상 축재했다. (청와대 한 고위관리가 미국 프레이저 위원회 조사에서 고백한 내용)
김성곤은 정치자금을 모아 박정희, 육영수, 정일권, 이후락, 박종규에게도 자금을 제공했다. (김형욱증언)
-박정희의 대미 로비스트 박동선은 미국 쌀을 수입하면서 920만불 커미션을 받았다. (이리하여 한국민은 비싼 돈을 주고 미국 쌀을 먹는 결과가 되었다)
-이후락이 나 박종규니 그 측근들이 박정희의 돈 관리를 하면서 조금씩 떨어진 잔푼돈, 소위 떡고물이 그때 돈으로 400억 이니 600억 이니 했다니... 박정희가 어느정도의 뇌물을 모았는지 알 수있다. 이후락은 그의 축재를 비판하자 "떡을 만지는데 떡고물은 자연히 떨어진다"는 명언(?)을 남겼다.
5) 박정희 시절 국무총리였던 정일권은 박정희로부터 품위유지비로 월 천만원 씩 받았다고 증언을 했다 <지금 돈으로 수십억에 해당>. 또한 박정희는 모든 고급공무원, 장군들, 단체장, 문화인, 심지어는 야당인사들에게도 뇌물을 뿌렸다. 충성심을 담보로 하기 위하여..
친일민족배반에다, 군사반란국가배반에다, 독재민주배반? 부정부패의 원흉인 박정희를 지금도 아버지 수령으로 숭배하는 것은 이북 백성들의 김일성숭배와 똑 같다. 아니 더 나쁘다.
김일성 은 독립운동이라도 한 공로가 있거든.... 박정희 가 한국의 경제를 살려서 숭배한다면 한 때 김일성은 이북을 이남보다 더 잘 살게 한적도 있다. 경제가 전부라면 극우 히틀러 나 또 하나의 살인범 스탈린 은 박정희보다 훨씬 앞선다. 허나 그들을 존경하는 사람이 없다.
경제가 전부라서 박정희가 숭배를 받아야 한다면 김대중 은 기가 막혀 웃어야 한다. 김대중은 6.25이래 최대 국난이라는 외환위기 를 그리고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 이 일으킨 외환위기(학자들의 말)를 극복하고 외환보유고 를 1000억 달라 이상으로 끌어올려 세계 5위의 외환보유고를 만들었고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가 마이너스 성장이나 멈춘 상태일 때도 플라스 성장을 이룩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① 일제에 대한 충성심이 태동 - 혈서(최우수 제국군인)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있던 다카기 마사오(박정희)는 자진해서 만주군관학교 생도생으로 스스로 들어갔다. 만주군관학교 2기생으로 자원입학(1940년 4월 4일).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나이 23세. 입교 동기생으로 240중 조선인 12명. 15등으로 입학하였다. 하지만 2기 졸업식에서는 240명중 당당히 1등으로 졸업하였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그 덕에 영광의 얼굴로 [만주일보]에 실린다. 뿐만 아니라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졸업식 날 다음과 같은 '선서'를 힘차게 낭독했다.
"대동아 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휼륭하게 죽겠습니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자원해서 들어가는 상황을 좀더 살펴보자.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나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기에는 나이가 많았다. 즉, 나이 때문에 자격 미달이었는데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호적을 고쳐서 나이를 낮췄다고 한다.
또한 나이를 낮췄다고 멀쩡한 조선인이 군관학교/사관학교에 입학하기란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신원검증과 사상검증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어떻게 하면 신원검증과 사상검증에서 인정을 받고 만주군관학교에 입학 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이에 동료교사 유증선이 아이디어를 내주었는데 "박선생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면 어떨까?"라고 하며 제안했다고 한다. 이에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그 자리에서 찬동했다.
나이도, 신원검증도, 사상검증의 장애물을 한번에 날려 버릴 수 있는 충성혈서는 만주군관학교 사람들을 감동 시켰다. 아니 일제를 감동 시켜 당시의 언론에(만주일보) 대서 특필 되었다.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
이 글귀가 바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손가락을 잘라서 쓴 '충성혈서'이다
이 글귀를 풀이하자면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일본) 보답하고, 나를(私) 죽여서 국가를(公) 받들겠습니다."라는 가미가제식 자폭성 혈서를 쓴 것이다. 이 충성혈서는 한 가지 기록을 갖게 된다.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혈서로 일본천황에 충성을 맹세한 조선사람은 단 한명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뿐이었다. 스스로 자진해서건 강제로건 혈서로 일제에 충성을 맹세한 사람은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교사의 신분으로 있던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자원 입대하는 것은 천하제일의 기회주의자로 출발하는 신호탄이었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온갖 방법을 다 써가며 자기를 지우려했던 어머니와의 출생전쟁에서 승리하여 '죽음의 집' 같았던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탈출하였고
다시 가난한 집과 고향으로부터 탈출하여 황국신민교육의 첨병 대구사범학교로 탈출하고...
다시 사무라이정신으로 무장한 일본군장교 양*관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로 탈출하여 '신민지 조선'을 탈출하게 된다.
그리고 천황주의자의 신봉자가 되어 '조센징 토벌'에 몸과 마음을 바쳐 젊음을 불태우게 된다.
② 몸과 마음을 철저하게 개조 -.sj표 일본인 준비
만주군관학교를 투철한 친일정신과 열성적 훈련으로 수석 졸업의 영광을 차지한다. 수석졸업의 영광으로 금시계를 선물로 받고 졸업생 대표로 천황찬양으로 가득한 답사를 읽었다.
당시 친일신문〈만주일보 1942. 3. 24〉기사 일부를 인용하면...
[… 빛나는 우등생 오카이(日系), 고야마(日系), 다카키(鮮系-박정희) 등 5명에게 각각 은사상증의 전달이 잇고 폐식 하였다....]
만주군관학교 출신의 조선인은 대략 제1기∼제7기까지 50여명 정도인데... 이 만주군 출신들은 훗날 대통령, 국회의장, 국무총리, 국방장관, 군참모 총장, 해병대사령관, 군사령관, 군단장, 연대장, 고급 참모등 정부와 군의 요직에서 나라를 이끌어 가는 중요 인물이 된다. 한 마디로 황군들이 나라 조지고 민족정기 좀 먹는 세력이 된 것이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를 지도했던 한 일본인 장교의 말을 들어보면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어느 정도 몸과 마음을 철투철미 하게 일본 제국주의에 충성하고자 하였나를 알 수 있다.
[ 매년 가을이 되면 군관학교에는 생도 전원이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행군연습을 실시했다. 박정희는 그때 내가 맡은 소대의 제1분대장이었는데, 다른 분대장과는 달리 기합이 들어 있었고, 의욕도 대단했다. 진지공격 연습 같은 때 대단히 어려운 임무가 부여되더라도 박정희는 그 임무를 달성하려는 의욕으로 꽉 차있었다. 박정희는 말수가 적고 속에 투지를 감춘 사나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 라고 진술하고 있다.
③ 완전한 일본인 -.sj표 일본인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관례대로 우등생에게 주어지는 일본육사 특전의 혜택을 누리게 된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일본 육사를 입학하려고 군관학교 시절 남들보다 철저한 황군정신으로 몸과 마음을 닦고 열심히 공부한 것이다. 일본 육사에서도 진지한 학습태도로 모범생이란 평을 받고 3등이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한다.
조선인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일본 육군 대신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이로써 박정희는 완전한 일본인(다카키 마사오)이 되었다. 아니 대일본제국의 군인이 되었다.
당시 일본육군사관학교 교장 '나구모 쥬이치(南雲忠一)의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에 대한 평가를 들어보자.
『....다카키 생도는 태생은 조선일지 몰라도 천황페하에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점에서 그는 보통의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다운 데가 있다...』라고 평가하였다.
또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10.26으로 김재규 총에 맞아 죽었을 때 주한 일본대사관에서 한 일본 외교관은 이러한 말을 했다.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 라고 하였다.
한마디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sj(japanese standard)표 [일제인]이라는 말인 것이다.
④ 항일세력의(독립군) 토벌 - 110여회 참가
소위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일본 본토의 마쓰야마 제 14연대에 처음 배속을 받았으나 진정한 일본군인을 참작하여 만주 제8연대의 소대장으로 임명되어 모란강 부근의 영안으로 전출되었다가 화북지방의 열하 보병 제8군단에 배속된다.
영안지방 →간도에서 활약한 한인 독립군부대가 북만주로 이동할 때와 노령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서쪽으로 진출할 때에 주둔하던 요충지였다. 열하지구 ⇒ 일본군에 대한 항일 투쟁이 끊이지 않았던 지역이다.
항일세력은 팔로군, 군부군, 광복군, 조선의용군, 소규모의 게릴라 (유격대) 등이었다. 다카기 마사오(박정희)는 이곳에 임관한지 1년만에 중위로 진급한다. 군의 편제상 소대장은 최전선에 배치된다. 여기에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열성적으로 항일부대를 토벌했던 공로로 승진이 빨랐던 것이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소속되어 있었던 부대는 독립군 토벌에 110여회를 출정하게 되는데 과연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양심의 가책이나 동포를 죽이는 행동 때문에 방아쇠를 당기는 행위에 고민을 하였을까?
미안하지만 어림없는 소리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조센징 토벌'이라면 환장을 한 놈이었다.
"조센징 토벌이다. 요오시(좋다)"를 연발하며 출정을 즐긴 놈이다. 이 상황을 좀더 자세히 보자
문명자씨의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워싱텅에서 벌어진 일들』에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만주군 시절 이야기가 나온다. 1972년 문명자 기자가 어렵게 찾아가서 듣고 기록한 생생한 증언이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와 함께 지냈던 어떤 만주군 장교 출신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음침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일 조센징 토벌 나간다."하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하고 벽력 같이 고함을 치곤 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생도들은 "저거 좀 돈 놈이 아닌가."하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본질을 알 수 있는 증언이다. 말없는 사나이가 갑자기 고함을 질러대는 것은 발작일까? 기적일까? 어느 쪽이든 '조센징 토벌'이란 명령을 받으면 자기도 가눌 수 없는 흥분 상태에 빠진 것만은 분명하다.
'요오시'란 말은 우리말 '좋다'와는 어감이 다르다고 한다. '요오시'는 반드시 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요오시(좋다)! 토벌이다."라고 고함을 지러대는 행동에는 "조센징을 반드시 내 손으로 때려잡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만방에 선포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것은 강렬한 의지와 충성심에 불타는 "조센징(독립군) 토벌"에 대한 결연한 의지와 신념을 보여주는 행동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⑤ 일본군의 특수부대(철석부대) 활약 - 간도특설대
일본은 만주 서남부와 중국북부에 투입할 용맹한 부대를 선발하여 특수부대(철석부대)를 만든다. 여기에 조선인 부대인 [간도특설대]도 선발되는 영광(?)을 얻는데 그 속에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이주일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중국북지(열하성 만리장성 남방 평곡-북경 동북방)로 투입되어 항일 세력과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여기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 소수민족들의 특수부대는 많았다. 조선인의 간도특설대, 러시아인의 찬야부대, 몽고인의 기야부대, 회교인의 회교부대, 오르치온족의 공작대 등이 있었는데....
간도특설대가 가장 강력했다고 한다. 한가지 예를 들면 「일본군, 만주군이 못해내는 작전을 간도특설대가 가서는 거뜬히 해치우곤 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조선인 공적평가에 인색한 일본인들도 간도특설대에 대해서는 "상승의 조선인부대" 라는 표현을 썼다고 한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소속한 특수부대(간도특설대) 요원들이 얼마만큼 항일군의 토벌에 커다란 공을 세웠는지를 대변해주는 이야기이다.
⑥ 변신의 달인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보통학교 교사에서 만주군 지원 입대... 만주군관학교의 수석졸업과 금시계의 영광... 3등으로 졸업한 일본육사 생활도... 만주에서 관동군으로 복무하며 항일세력을 토벌하던 생활도.... 일본의 무조건 항복에 날아가 버린다.
친일파 아니 일본인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1945년 8월 15일 이후에는 어떤 행동을 하였을까? 일본의 지배는 영원 할 것이라고 생각한 박정희에게는 일본의 항복은 대단한 쇼크였을 것이다. 패잔병의 낭패감과 극한의 절망에 빠졌으리라.
하지만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누구인가 변신의 천재가 아닌가? 절망도 잠시였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곧바로 변신을 시도한다. 그토록 노력하고 공들여 입은 황군의 군복을 벗어 던지고 민간복으로 같아 입고 만주군의 부대를 탈영하여 피난민으로 가장하고 피난민 대열에 끼어 들어 북경으로 들어가 광복군에 합류한다.
우리는 여기서 유리한 상황에만 빌붙는 기생충 같은 기회주의자의 전형을 볼 수 있다. 이것뿐만 아니다. 후일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좌익계열의 장교가 되지만 여순 사건으로 불리해지자 천명이 넘는 동료들을 밀고하여 죽음으로 몰아 넣고 자기만 살아 남는다.
박정희가 좌파가 되는 행동에 대하여 조갑제 등은 형(박상희)의 죽음과 연관 시킨다. 그 충격으로 좌파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근거도 없고 설득력도 없는 주장이다. 박정희는 다만 유리한 상황에 편승한것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당시 한반도 상황은 미국 정보의 데이터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한반도는 온통 붉은색(좌파)으로 뒤덮고 있었다. 박정희는 그러한 권력의 흐름이 어디에 있는지 간파하고 그것에 편승했을 뿐이다.
하여간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자기 혼자 살아 남자고 천명이 넘는 동지들을 저승길로 보내고 살아 남았다.
또한 이후에 다시 우익장교가 된다. 그리고 다시 반공주의자로 변신하여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다 보여준다. 어쩌면 한반도 남쪽을 반공으로 도배하는 길만이 자기의 과거를(황군/좌익 등) 은폐하고 숨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기회주의 속성을 가지고 태어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기회주의란 무엇인가를 완벽하게 보여 준 전형적인 인물이다.
속성이 이런데 일본 패망 후 곧 바로 광복군으로 위장하여 합류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독립운동가들을 적극적으로 토벌하던 일본의 진짜군인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쥐새끼 마냥 살아 남으려고 광복군 흉내를 낸 것이다.
정말 구토가 나는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행동이다.
⑦ 박정희의 창씨개명 - 조선인 흔적 지우기
일제강점기 시대에 조선인들은 강제로 창씨개명 되었다. 박정희도 예외가 아니어서 창씨개명을 하였는데 그 이름은 모두가 알다시피 『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이다.
하지만 창씨 개명한 조선인들의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창씨개명에는 조선인의 뿌리가 남아있다. 박정희의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란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다카키 마사오란 이름은 박정희란 조선이름을 응용한 것이다. 다카키(高木)란 성은 고령 박씨에서 따온 것이다. 또한 마사오(正雄)란 이름은 정희(正熙)를 변용 한 것이다. 그래서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란 호칭에는 약간이나마 조선민족의 뿌리가 남아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박정희의 창씨 개명은 여기에서 끝나는게 아니다.
박정희는 일본정신으로 머리 채우고 일본군복을 입고 일본사람보다 일본어를 더 잘해도 핏줄 만은 바꿀 수 없었다. 그는 누가 뭐래도 조선인의 핏줄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나 박정희는 조선민족이라는 핏줄 끊기를 강행한다.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란 이름에서는 조선인의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여 다시 작명을 한다. 일본군에 자원입대 했던 것처럼 스스로 작명 실력을 발휘하여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 사용한다.
그 이름은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이다.
참으로 경악할 박정희의 행동이다. 자작 이름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는 조선인의 흔적을 지우고자 하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조선인이라는 흔적을 철저하고... 말끔하게... 깨끗히 지우고 완전한 일본인으로 태어 나고자 했던 것이다.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는 진짜 일본이름이다. 이 이름 어디에서도 조선사람의 뿌리를 찾을 수 없다.
⑧ 일본군인 생활에 대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향수
만주군관학교⇒일본육사⇒관동군으로 이어진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복무기간은 5년 정도이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나이 23세에서 28세까지의 기간이다.
하지만 이 기간동안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몸과 마음을 환골 탈퇴하여 일본인 일본군인이 되어 정서체계와 사고방식 등 모두 일본놈 그 자체였다. 그 증거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나타난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뒤에도 틈만 나면 주일 대사관을 통하여 입수한 일본 사무라이 영화를 관람하고 일본 검도를 즐기는 것이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취미 생활이었다.
또한 당시 [조선일보] 주필 선우휘씨 등과 청와대에서 술을 마시며 일본천황의 교육칙어를 번갈아 외우는 내기나 시합을 하곤 했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지독한 향수를 엿 볼 수 있다. 그래도 이런 것은 얌전한 행위에 속했다.
다음 글을 읽어보자 압권이다.
[중앙일보. 1991. 12. 14]
[ ..... 계엄선포 한 달 전쯤인가(1971. 10. 17 계엄이 선포되었다) 박대통령이 나를 불러요.(여기서 '나'는 강창성 전보안사령관)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박대통령은 일본군 장교 복장을 하고 있더라고요. 가죽장화에 점퍼차림인데 말채찍을 들고 있었어요. 박대통령은 가끔 이런 복장을 즐기곤 했지요. 만주군 장교시절이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다카키 마사오 중위로 정일권 대위 등과 함께 일본군으로서 말달리던 시절로 돌아가는 거죠. 박대통령이 이런 모습을 할 때면 그분은 항상 기분이 좋은 것 같았어요....]
이런 * 인간이 18년간 우리의 대통령이었다. 그는 통치 기간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을 인재로 등용하여 나라를 좀먹고 민족정기를 회복할 수 없도록 망쳐 놓았다.
⑨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으로써의 친일
-. 5.16후 우방 각국에 친선사절을 보냈는데 제일 먼저 보낸 곳은?
답 : 일본
-.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먼저 방문한 나라는?
답 : 일본
-. 최초로 대외정책을 밝힌 기자회견의 주제는?
답 : 한·일 교섭의 재개.
-.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의 망언
일본 방문중 동경의 한 요정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여 동석했던 일본인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 나는 정치도, 경제도, 모르는 군인이지만 명치유신 당시 일본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지사들의, 나라를 위한 정열만큼은 잘 알고 있다. 그들 지사와 같은 기분으로 해볼 생각이다.....] 라고 말하였다. 그것도 유창한 일본어로 말이다.
1963년 12월 17일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일본의 자민당 부총재 오노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은 걸작의 말을 한다.
[....박정희 대통령과는 부자 사이 같은 관계로서 아들의 경축일을 보러 가는 것은 무엇보다도 즐겁다..」라고 하였다.
사실 자민당의 보수 세력은 박정희와 군대생활을 같이 했던 일본제국의 동료 및 상관들이었다.
⑩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으로써의 친일 2
일본군국주의 세력의 정신적 유대는 대일 굴욕회담을 (한일협정) 성사시킨다. 여기서 식민지 지배 피해에 대한 거의 모든 권리와 주장을 포기한다. 박정희는 이때 일본으로부터 식민지 지배 보상 명목으로(한일경제협력을 위한 지원금) 3억달러 정도를 받는 것으로 끝낸다.
장면 시절의 8억달러나 이승만 때의 80억 달러의 주장에 비하면 너무나 헐값이었다. 일본은 이때 받았던 3억달러로 식민지 지배에 대한 피해 보상은 모두 끝났다고 말한다. 생존한 위안부 할머니들이 몇 백일을 시위해도 일본은 10원 한푼 내놓지 않을 것이다. 모두 친일파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작품이다.
또한 1973년 서울 지하철 차량부정도입 사건을 저지른다. 일본에서 지하철차량 186량에 대한 매매계약을 체결하였는데 일본에서 3,204만엔하는 가격을 6,350만엔이란 두 배 정도나 비싼 가격으로 계약하였다. 이것은 만주군 출신 선배들의 로비와 정치자금의 리베이트가 작용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