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환영(幻影)이라도 보기 위해 통영에 내려가렵니다."
지난 6월 초 오길남(69)씨는 그의 가족 송환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북한 인권 운동가 김미영씨에게 보낸 이메일에 이렇게 썼다. 통영에서 열린 '북한정치범수용소 사진전-통영의 딸이 그곳에 있습니다'에 초대받은 직후였다.
"참 아름다운 곳이더군요. 아내가 오면 통영에서 면사포 씌워주고 결혼식을 올리고 싶은 마음이 들 만큼…. 그런데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그저 늙은이의 못 이룰 꿈이지요."
가난한 유학생과 간호사로 만나 실반지를 나눠 끼는 것으로 결혼식을 대신했던 그는 죽음의 수용소에 두고 온 아내에게 면사포를 씌워주지 못한 미안함이 여전한 듯했다.
―정부 차원의 송환 노력도 있지 않았나.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는 아예 기대도 하지 않았고 말도 안 꺼냈다. 간첩들이 대통령 초청을 받아 청와대를 들락거리던 시절인데…, 내 보기에는 북한과 다 한통속이었다."
―그런가. 그래도 당신은 뭔가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왜 안 했겠나. 독일 외무부 장관한테 편지도 썼지만 답이 없었다. 한국의 인권단체 문도 두드려봤지. 흥사단, 앰네스티 한국 지부, 천주교 인권위 모두 다…. 그런데 한결같이 내 간청을 묵살했다. 베를린의 북한 대사관에 가서 단독 시위라도 할까 했는데 실현을 못 했다."
―왜 못했나. 세상 관심을 끌려면 뭐든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여건이 안 돼 사실상 포기한 상태다. 이젠 김정일 정권이 스스로 몰락하기만 기다리고 있다."
오길남씨는 1985년 유학 15년 만에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독일에서 반정부 활동을 해 귀국을 고민했지만 함께 운동했던 동료들이 한국으로 돌아가 자리 잡고 "괜찮다. 들어오라"고 하는 말을 듣고 국내 대학에 취직 자리를 알아보며 귀국을 준비 중이었다.
"그 시점에 베를린에서 야채상을 하던 김종한과 송두율이 나를 유인했다. 송두율은 내게 '부산대 교수 하던 윤노빈도 북한 갔고, 법학자 고흥식, 이창균도 북으로 갔다. 당신이 기댈 데가 어디 있느냐. 집사람 건강도 좋지 않은데'라며 은근히 입북(入北)을 권했다."
윤이상은 그에게 서신을 보내 "박사 학위 취득을 축하한다. 이제 통일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하는데 북으로 가서 그동안 배운 지식을 동포를 위해 써달라"고 했다.
―당신도 북한에 환상을 가졌던 것 아닌가.
"북한 비판이 많았지만 인간 사회가 그렇게 엉망진창일 리가 있겠나 생각했다. 당시 북한이 남쪽에 수해 지원도 하지 않았나. 나는 북한이 중국처럼 개혁개방 단계에 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북한에서 경제 발전에 공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단한 착각이었지."
―부인의 반대가 심했다고 들었다.
"아내는 'tv에서 못 봤느냐. 거기가 어디라고 가려 하느냐'고 펄쩍 뛰었다. 내 황소고집으로 결국 아내 동의를 받아냈지만 아내는 '당신의 결정이 훗날 큰 불행으로 다가올 것'이라고 예언처럼 말했다."
―북한에 도착하자마자 후회했다던데.
"12월 13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는데 그 추운 날씨에 비쩍 마른 화동들이 색동저고리에 스타킹 차림으로 꽃을 건네더라. 그 순간 아내가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그 아이들에게서 우리 애들의 장래를 본 것이다. 가슴이 섬뜩했다."
3개월 뒤 그는 칠보산연락소 대남방송 요원으로 배치됐다. '민영훈 교수'라는 가명으로 매일 13분씩 방송을 했다. 기가 막혔지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중앙당의 호출을 받았다. 그에게 임무가 하달됐다. "유럽으로 가 남한 유학생 2명을 포섭, 입북시켜라." 경제학자에서 대남방송 요원으로, 다시 공작원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오길남 사건은… 獨 경제학 박사 "송두율·윤이상 권유로 월북"
오길남씨는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1970년 독일로 유학 가 브레멘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경제학자다.
1972년 통영 출신의 동갑내기 파독 간호사 신숙자씨와 결혼해 혜원(1976년생), 규원(1979년생) 두 딸을 뒀다. 1974년 독일에서 송두율 등과 함께 민주사회건설협의회(민건)를 만들어 반정부 활동을 시작했다. 송두율과는 부부끼리 절친한 사이였다. 1980년 신군부가 집권하자 독일로 정치망명했다.
1985년 윤이상 등으로부터 "북에 가서 경제발전에 힘을 쏟아달라"는 권유를 받고 그해 12월 가족과 함께 월북해 '구국의 소리' 대남방송 요원으로 일했다. 1986년 11월 유럽의 남한 유학생 2명을 유인해 데려오라는 지령을 받고 덴마크로 갔다가 코펜하겐 공항에서 극적으로 탈출했다.
그 후 독일에서 가족 송환 운동을 펼치다 실패하자 1992년 5월 자수해 귀국했다. 그를 통해 북한이 남한 내 지하방송이라고 우기던 '구국의 소리'와 '민중의 메아리'의 실체가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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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모자르고 못된새끼 자기로 인해 가족이 북한으로 갔는데 무슨 생각으로
다 버리고 혼자 탈북하려
했을까....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8/20/201108200017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