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 아니라 수금원... 내부고발 후회 없어"
2006년의 어느 여름, '길거리 수업'이란 이름의 동영상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다. 한 여교사가 길거리에 칠판을 놓고 문학 수업을 하고, 교복 입은 여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이를 경청하는 영상이었다. 후덥지근한 교실을 벗어나 피서 수업이라도 하고 있는 걸까?
그것은 더위를 피하는 야외수업이 아니었다. 학교에서 쫓겨난, 하지만 어떻게든 아이들을 만나고픈 한 여교사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그녀는 바로 지난 1일 곽노현 교육감에 의해 '공립 교사'로 특채되었다가 다음날 이주호 교과부장관에 의해 임용이 취소되면서 또다시 '해직 교사'가 된 조연희 교사다.
다음은 지난 9일 오전 10시, 서울 영등포 전교조 사무실에서 조연희 교사와 나눈 인터뷰 전문이다.
- 해직 7년 만에 특채를 통해 학교에 돌아갈 뻔 했는데 어땠는가?
"기뻤다. 가족이 모여 파티를 했는데 시아버지가 처음으로 꽃다발을 안겨주시기도 했다. 동서는 아이들에게 예쁘게 보여야 한다며 마사지를 해주었다. 함께 특채된 교사들과 첫 수업 얘기를 하며 설레고 있었다."
- 교과부 장관의 특채 임용 취소에 대한 생각은?
"너무도 부당하다. 나는 사학비리를 세상에 알리는 과정에서 억울하게 해임된 사람이다. 2011년 제정된 공익신고자보호법에 따르면 국가는 공익신고자의 신변을 보호할 뿐 아니라 그의 불이익을 적극적으로 구제해야 한다. 그래서 교육청은 공익신고자인 나를 특채 형식으로 구제하려 한 것이다. 또 나를 특채하는 것은 상징적 의미가 있어 필요했다. 사학비리를 제보해도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면 더 많은 학교 문제가 공개될 수 있고 사학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 공개 채용을 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있다.
"공개채용은 12조 1항 5호에 해당하는 '현직 사립학교 교사 특채'의 경우에만 필요하다. 나는 2호의 '임용예정직에 상응한 연구실적 또는 근무실적이 3년 이상인 자를 임용하는 경우'에 근거해 특채되는 것이고 이때엔 공채가 필요 없다. 나는 사립학교 교사로 약 20년을 근무했으니 이 조항 '근무실적 3년 이상'에 해당해 자격이 있다. 자격을 갖췄다면 특채 여부는 교육감 재량 사항이다. 사학비리고발, 민주화운동 등을 이유로 특채할 땐 지금까지 이 규정을 적용해 왔고 단 한 번도 공채한 일이 없다. 그럼에도 5호와 관련한 공채를 운운하는 언론들은 왜곡보도를 한 것이다."
결근 한 번 안 한 조연희 교사는 왜 해임됐나
- 억울하게 해임됐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뭔가.
"2003년, 오랜 기간 학교의 회계비리와 비민주적 운영의 증거들을 모아 교육청에 제출했다. 감사를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40억 정도의 비리가 밝혀졌고 15억 6천만 원 정도 환수 조치가 내려졌다. 그러나 교육청에서 임시이사를 파견하지 않고 교육청에서 재단으로 진정서에 적힌 교사 명단을 내려보내 보복을 당한 것이다."
- 비리를 고발했다고 어떻게 해직까지 당할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혹시 불성실, 직무유기 등 결함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공식적인 면직 사유를 알고 싶다.
"(재단이 내부고발로 보복하려 했으나) 나는 결근 한 번 안 한 교사여서 학교생활과 관련해 문제 삼을 수 없었다. 처음엔 업무방해, 명예훼손 등을 사유로 검찰에 고소한 뒤 기소를 근거로 2005년 2월, 직위해제를 했다. 감사가 나오지 않아 동료들과 학교 내에 천막을 치고 집회를 했었던 걸 꼬투리 잡은 거다." (기자 주 : 사립학교법 58조 2항에는 기소된 경우 "직위를 부여하지 아니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 형사재판 결과는 어땠나? 결국 업무방해와 명예훼손으로 면직된 것인가?
"최종적으로 집시법 위반으로 백만 원 정도 벌금형을 받긴 했다. 하지만 벌금형으로 해임, 파면 등은 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자 재단은 내 뒷조사를 해 2005년 2월, 기소됐었다는 점과 함께 정당가입, 대추리 시위 등의 정치활동을 사유로 나를 파면했다."
- 이에 소송 등 문제제기는 안 했나.
"당연히 했다. 먼저 교원소청심사위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런데 교원소청심사위는 정당가입, 대추리 시위 등이 아직 수사 중임에도 '포괄적 정치 활동을 했다'고 판단했다. 또 앞서 말한 100만 원 벌금의 집시법 위반도 문제 삼았다. 즉 포괄적 정치 활동과 집시법 위반으로 교사로서 자질이 부족하다며 해임 결정을 내렸다. 그나마 집시법 위반이 공익을 위한 것이어서 파면에서 해임으로 완화된 것이라고 했다.
그 뒤 행정소송을 했는데 그때는 정당 가입과 관련해서는 무혐의 결정, 대추리 시위에 대해선 사실상 무죄 판결을 받은 뒤였다. 그러나 행정법원은 무혐의, 무죄 판단 이전에 내려진 소청심사위 해임 결정을 그대로 인용했다. 그렇게 해서 최종적으로 해임이 되었다."
(기자주 : 사실상 무죄 판결 - 1심에서 벌금형, 2심에서 무죄를 판결 받았지만, 3심 판사는 '2심 과정에서 재판 날짜를 하루 어겼으니 2심 결과는 무효이며 1심 결과를 따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조연희 교사측 변호사는 '2심 결과가 판사에 의한 것이었으니 '무죄 판결'의 실질적 효력을 인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 그럼 결국 정치활동과 관련해 형사재판에서는 무죄 판결이 났는데도 행정재판에서 '포괄적 정치 활동'을 했다며 해임 결정했단 얘기인가?
"그렇다. 나는 이 과정에서 국가기관들로부터 상처받았다. 경찰은 무혐의인 나를 연행했고, 검사는 '개인이 학교를 세워 운영하다보면 비리를 저지를 수도 있지 그렇다고 농성하고 그러면 되나, 법이 그런 걸 어쩌나. 불만이면 국회 앞에 가서 시위를 해야지 왜 학교에서 했나'라고 비난했다. 또 형사상 무혐의고 무죄인데 행정재판 판사들은 소청위의 해임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나도 석궁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우리학교는 급식을 위해 존재하는 학교 같았다"
- 다시 처음으로 가보자. 사립학교에서는 실질적으로 재단이 인사권, 징계권을 모두 쥐고 어 비리를 봐도 문제제기 하기 쉽지 않다. 나서게 된 동기는 뭔가.
"모교라서 그랬다. 나는 동일여고 졸업생으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그 학교 교사가 됐다. 그런데 학생일 때와 교사일 때가 참으로 달랐다. 후배이자 제자인, 동생 같은 아이들이 아파하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 예를 들면?
"지역의 특성상 우리 학교에는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많았는데 교사들에게 수업료 독촉을 지시하고 강제로 보충수업을 신청하도록 해 교사도 아이들도 모두 상처받곤 했다. 건물 증축 비리, 교사 채용 비리 등도 많았다. 가장 심각한 것 중 하나가 급식 관련 문제였다. 정부로부터 급식 보조를 받는 아이들이 상당히 많았는데 학교에선 보조를 받으니 그만큼 일을 해야 한다며 식당에서 일하게 했다. 점심시간 전후로 수업시간까지 빠지며 아이들이 앞치마를 두르고 밥을 퍼주고 잔반을 치우도록 한 거다. 그래서 그 불쌍한 아이들이 돈이 없는데도 엄마를 졸라 급식비를 내고 밥을 먹으려 하는 모습에 가슴이 미어졌다.
급식 관련해 빼먹은 돈이 우리가 밝혀낸 것만 십 억이었다. 그런 식으로 인건비 줄이고 급식과 관련해선 감각삼각비를 못 남기게 돼있는데 그 명목으로 빼돌리는 등 직영으로 하며 돈을 빼먹었다. 문제를 제기하니 위탁으로 바꿨는데 위탁운영을 할 때엔 제일제당으로부터 5억을 받으며 계속 이렇게 돈을 빼먹었다.
우리학교는 급식을 위해 존재하는 학교 같았다. 재단에선 돈을 아끼려고 시간강사를 많이 고용했는데 심지어 이들로부터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겠다는 각서를 받기도 했다. 임신한 여교사가 임신중독증 때문에 도시락을 싸갖고 다니는 것까지 비난할 정도였다.
협동조합(매점)에서 남겨먹은 돈은 천문학적 액수다. 밖에서 1만 원인 실내화를 협동조합에서 1만 5000원에 팔며 강매하는 등 문제가 상당했다. 그런데 교육청이 감사나왔을 때 수사권이 없다며 제대로 감사하지 않았다. 빼돌린 장부가 어느 창고, 어느 회계장부에 있다고 말을 했지만 듣지 않았다. 학교는 아이들을 상대로 교육이 아니라 장사를 했고, 선생님은 교육자가 아니라 수금원이 돼야 했다. 밝힌 것만 40억이니 정말 얼마나 많은 돈을 빼갔겠나."
- 아이들이 안됐다 해도 용기를 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처음엔 상처받는 아이들 보는 게 힘들어 사직서를 품고 다녔다. 하지만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 가난한 동네에서 이 불쌍한 애들을 대상으로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며 상처주고 있는데 나 하나가 학교를 계속 다니고 안 다니고는 중요한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을 모으고 자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1년 전교조 분회를 만들고 2003년 학교 비리를 고발하며 싸움을 시작했다."
- 최근 특채가 취소되었고 학교 비리를 알린 뒤 지금까지 고생만 하고 있는데 후회는 안 되나.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당시 우리가 학교의 문제를 드러낸 이후로 학교가 많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나는 생지옥에 있었고 혼자 살 것만 생각한다면 사표 내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랬다면 너무 후회했을 것이다. 당시 함께했던 선생님들 대부분이 학교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등 지금은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바꾸려고 나섰고 내가 어찌됐든 학교가 바뀌었으니 나는 후회없다.
또 어떤 면에서는 학교에 감사하기도 한다. 당시 미행도 당하고 "밤길 조심해라", "애는 잘 있냐" 등 협박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과정, 싸우는 과정에서 단련되고 성장할 수 있었다. 감사원이 지적을 해도 교육청이 임시이사를 파견하지 않는 등 사립학교의 벽을 만났기 때문에 사립학교법 개정이 필요함을 알게 됐고 교육감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또 이후엔 교육감이 바뀌어도 정권이 안 바뀌면 안된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러면서 더 큰 운동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한다.
또 당시 지역사회에서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 그래서 교육희망네트워크라는 풀뿌리교육운동을 하며 지역 중심 교육 운동을 하게 된 것에도 감사하다. 그런데 내가 왜 후회를 하겠나."
"7년 전 단식투쟁 할 때 고2 아들 함께 밥 안 먹기도..."
- 개인적 질문인데, 당시 가족들은 학교 비리에 맞서 싸우는 것에 어떤 반응을 보였나?
"남편은 적극적으로 응원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만하라고 하지도 않았다. 말없이 집안일을 챙기는 등 조용한 지지를 보내주었다. 하지만 모르긴 몰라도 마음고생을 많이 했을 거다. 내가 7년 전 단식투쟁을 할 때 당시 고2였던 아들은 함께 밥을 안 먹기도 했다. 그 아들이 이제는 대학 4학년인데 지난번에(특채 취소 당시) 제일 먼저 아들에게 전화해 소식을 알리니, '에이, 엄마 괜찮아요. 밖에서 운동하는 거 좋아하시잖아요. 천천히 가면 돼요!'하며 위로해 주었다."
시종일관 밝은 표정으로 인터뷰에 응하던 조 교사는 가족 얘기를 할땐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 앞으로의 계획은?
"함께 특채가 취소된 박정훈, 이형빈 등 두 교사들과 함께 걷기 대회와 집회 등으로 항의의 뜻을 표시할 것이다. 또 법 개정이 필요하다면 그것을 위한 노력도 함께할 생각이다."
- 양천고에서 해임된 김형태 의원의 경우와 상당히 유사하다. 김 의원처럼 교육의원 선거에 출마할 계획은?
"아직은 없다. 지금은 풀뿌리교육운동에 관심이 많다. 나는 지역 중심의 정치를 꿈꾼다. 지역 내에서의 유치원교육부터 평생교육까지 관심이 있다. 지금까지 전체 네트워크 중심으로 활동을 했는데 이번에 발령을 받으면 그 지역 중심으로 활동해보고 싶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이가 교육의원이든 시의원이든 출마한다면 지지하고 돕고 싶다.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지지를 받고 꼭 필요하다고 한다면 해볼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다."
- 마지막으로 현재 사립학교 교사들 중 학교 문제 때문에 고민하는 이들이 있다면 하고 싶은 말은?
"용기를 내라. 조연희법도 만들어졌고 공익신고자보호법도 만들어져 이제 사학비리를 고발한 것을 이유로 처벌할 수 없으며, 그럼에도 처벌되고 해임된다면 구제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그리고 앞으로 사학비리고발로 불이익을 받은 교사를 공립학교로 특채하는 내용의 교육공무원법 개정안을 내려고 한다. 그러니 두려워 말고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을 모으고 차근차근 기록을 하며 사학의 투명화, 민주화를 위해 나서주기 바란다."
인터뷰를 마치고 기자는 중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전교조 합법화 투쟁이 한창인 그 해, 내가 다니던 학교에선 너무 많은 교사들이 해직돼 중간고사를 못 볼 정도였다. 매일 아침 등굣길이면 우리는 그분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분들은 교문 앞에 선 교장 선생님들이나 임원 학부모들 뒤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서계셨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뭐가 뭔지는 잘 몰라도 그 모습이 어린 우리에겐 너무 아팠다. 그래서였다. 새로운 교사가 수업에 들어왔을 때 뭐라도 돕겠다는 마음에 우리가 엎드린 채 일어나지 않은 것은.
조연희 교사의 길거리 수업에 동참한 학생들도 아마 그와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렇게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 위에 모여 앉아 조 교사의 수업을 경청한 게 아니었을까? 또 많은 시민이 동영상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며 마음의 응원을 보낸 것도 다 그런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당시 내가 아파했던 그분들은 모두 2년여 뒤에 학교로 돌아오셨다. 하지만 조 교사는 아직도 교문 밖에 서 있다. 우리는 이제 조연희 교사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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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교육감의 특채는 부당하게 해고된 사람들 다시 돌아오게하는 옳은 결정이었네요.
저도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는 측근을 낙하산으로 특채하는건 아닌가 했는데 오해했네요....
오히려 이러한 결정을 반대한 교과부는 뭐하는 곳이죠?
학생들을 위한 일을 하는 부처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