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년 다랑쉬굴에서 발굴된 유해 가운데 아버지와 숙부가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언론보도를 통해 듣고 제주에 내려왔다"며 "당시 유해수습 과정에서 대부분 유족들은 봉분을 만들자고 했으나 일부 유족들이 봉분을 만들면 4·3을 왜곡하는 사람들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설득해 화장을 하게 됐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어 "유골을 화장해 바다에 뿌리기 전에 성냥갑을 호주머니에 넣고 배에 올랐으나 막상 유골이 뿌려지기 시작하자 유족들이 오열하는 상황이어서 유골을 조금만이라도 성냥갑에 넣겠다는 말을 차마 입에 올리지 못했다"고 울먹였다.
4·3 당시 조부모와 부모, 숙부를 모두 잃은 그는 '4·3고아'로 전전하다가 1954년 육지로 나갔다. "어릴 때는 나를 '폭도새끼'라고 했는데, '자식새끼'나 '폭도새끼'가 같은 말로 알고,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이 고마웠다"는 그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게 욕이라는 걸 알고 더는 마을에 살 수 없어 육지로 나가 살았다"고 말했다.
"아직도 하늘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다. 하늘을 쳐다보는 게 두려웠다"는 그의 독백 같은 말에 청중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또다른 증언자로 나선 고종환(65·울산 동구)씨는 태어나던 해 다랑쉬굴에서 아버지(당시 21)를 잃었다. 고씨는 "너무 어릴 때여서 얼굴조차 모른다"며 "50년대 중반 무렵 할머니가 수소문한 끝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을 알고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고 기억했다. 그는 "집안의 대를 끊을 수 없다는 할머니의 성화에 누군가가 잡으러 올까봐 낮에는 돼지우리에 들어가 숨고 밤이 되면 집안으로 들어오는 생활을 반복했다"고 회고했다.
한겨레... 허호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