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8월 일본공사 미우라 일당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이 을미사변이다. 일본 낭인들을 궁으로 불러들여 명성황후를 살해했다. '여우사냥이 성공했다. 이제 조선은 우리것이 됐다'는 유명한 말이 남았다. 이 살인집단에는 조선인들도 끼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이두황이다. 이 자의 묘를 후암미래연구소 대표 차길진이 찾아냈다. 전주 기린봉에 터를 잡은 이두황의 무덤은 비석높이만 2m가 넘는 호화판이다. 후손이나 친일 관련자들의 이름은 묘비에서 모두 삭제된 상태다. 그들로서는 당연한 조치다.
광복 직후 이완용을 위시한 친일파는 대부분은 부관참시 당했다. 이두황도 그리 될뻔했다. 앞서 1951년 차길진의 부친인 빨치산 토벌대 18대대장 차일혁은 독립투사 김지강과 함께 이두황의 묘를 추적해냈다. 이어 부관참시를 시도했다. 이미 서울 원남동에서 일본 고등계 형사 사이가와 미와를 처단한 전력도 있는 강골들이다. 하지만 이두황 부관참시는 불가능했다. 당대로서는 드물게 화장을 해 묻은 탓이다.
아버지에 이어 이두황 뫼의 존재를 확인한 차길진은 "이두황의 시문 족자 2점을 얼마전 일본 궁내청을 통해 입수했다. 한학과 서예솜씨가 제법이다. 글에는 일본에서 고향땅을 그리워하는 심정이 녹아들어있다"고 혀를 차면서도 "동시에 잊고 지낸 친일매국노 이두황의 존재가 상기됐고, 모종의 도움(영능력)으로 그의 분묘로 향하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이두황(1858~1916)은 서울의 가난한 상인(常人) 출신이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후 무과에 급제, 친군 좌영 초관(哨官) 벼슬살이를 시작한다. 그러다 1894년 동학운동 진압에 투입된다. 이후부터는 승승장구다. 특히 1894년 11월 8~14일 동학농민군과 친일관군의 최대 격전지인 우금치에서 대학살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정도로 맹활약한다.
능력을 인정받은 이두황에게 떨어진 새 미션이 명성황후 시살이다. 이두황은 훈련대 간부 제1대대장 자격으로 제2대대장 우범선, 제3대대장 이진호, 전 군부협판(軍部協辦) 이주회와 명성황후 살육 프로젝트를 짰고, 성공했다.
다음 단계는 도피다. 아들과 함께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달아난다. 도쿄에서 활개를 치며 주색잡기에 빠진다. 1만엔짜리 지폐에 얼굴이 실린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 후키자와 유키치가 '국모를 살해하고도 은인자중하지 않는다'고 질책했을 지경이다.
그렇게 10여년을 유유자적한 이두황은 1907년 슬그머니 귀국한다. 혁혁한 공을 세운 이 베테랑에게 중추원 부찬의(副贊議) 명함이 주어진다. 곧 격렬한 의병투쟁지인 전북의 관찰사 겸 재판소 판사로 임명되며 옛 실력을 발휘한다. 영화와 천수를 누리고 숨이 끊어졌을 때 이두황은 고등관 1등, 종 4위, 훈 3등의 귀족이었다. 전라북도 장으로 장중히 엄수됐다.
명성황후 모살 직후 달아난 탁지부 대신 어윤중은 용인 인근 어사리에서 주민들에게 맞아 죽었다. 제 죽을 곳으로 찾아들었다(魚死里)고 천벌 운운하며 다들 자위했다. 친일파였지만 한일합방 소식에 자결한 민영환을 순국자로 용서하고, 안중근의 둘째아들 안준생이 선친의 의거 30년 후인 193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히로쿠니에게 사죄했다고 치를 떠는 것과 유사한 심리다.
대개 도사들은 '조상 덕은 못보지만, 후손에게 해도 입히지 않는' 수단이 화장이라고 주장한다. "영혼은 영원 불멸이다. 뇌사(雷射) 같은 빛이다. 화장됐더라도 이 빛은 자손과 연결된다"며 다른 소리를 하는 이도 있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