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어업협정의 진실2(내용깁니다)

아랑공자 작성일 12.06.27 14:4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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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극우들의 독도영유권 주장 및 도발과 망언이 이어지는 가운데, 1998년 한국이 일본과 맺은 신한일어업협정이 문제가 되고 있군요.

여기저기 김대중을 성토하는 글과 보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김대중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잘못된 사실을 바로잡을 필요는 있을 것 같군요.

현재의 일본 극우들의 독도영유권 주장 망언 문제는 김대중 정부 때인 1998년 9월 맺어진 신한일어업협정이 아니라 박정희, 전두환 정권 때의 매국적 한일협정이 문제입니다.

일부 언론은 1998년 맺은 신한일어업협정이 독도를 공동관리구역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일본이 독도망언을 할 빌미를 준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우선 한일어업협정부터 알아봅시다.

한일어업협정은 대한민국과 일본 사이에 맺어진 어업에 대한 조약입니다.

1965년 박정희 정권 당ㅅ시 한일기본조약의 부속조약 중 하나로 체결되었으며 한국이 경제몰락과 IMF로 위기상황이 닥치자 일본은 1998년 1월 23일 일방적으로 파기선언을 하고 1998년 9월 25일 신규협정을 체결합니다.

공식명칭은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어업에 관한 협정입니다. 1965년 협정을 1차 협정, 1998년 협정을 2차 협정 혹은 신한일어업협정이라고 합니다.

1945년 해방이후에도 일본 어선은 한국영해를 침범 특히 독도부근에서 불법어로작업을 합니다. 이에 따라 1952년 이승만은 인접 해양에 대한 주권 선언을 통해 평화선으로 불린 대한민국의 어로 구획을 발표하였으며 이를 위반하는 일본 어선을 나포합니다. 이 사건으로 한국과 일본의 갈등이 심화되자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는 밀수출 단속과 선박통제를 이유로 한국방위수역을 설정. 선박통행구역을 정합니다. 이것이 바로 클라크 라인입니다.

하지만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1965년 굴욕적인 한일기본조약을 맺고 일본과 외교관계를 회복하면서 어업협정도 함께 체결합니다.

박정희 정부는 1965년 7월까지만 해도 ‘12마일 전관수역 방안으로는 영세어민의 생활이 어렵기 때문에 40마일 전관수역을 확보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대선을 앞두고 돈이 필요했던 박정희 정부는 이후 일본측의 12마일 전관수역 주장을 적극 수용하게 되고 이를 비공개로 처리합니다. 왜냐, 일본과 굴욕적인 외교협정을 맺은게 알려지면 여론의 공분을 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1965년 8월과 9월 최고회의, 중정, 외무부 당국자들이 참석한 7차, 9차 한일문제 대책회의 문서에 나타나 있습니다.


“ (12마일로 한다는 것이) 어느 정도까지 비밀이 지켜지느냐가 문제다. 야당측의 공격 자료가 돼선 안 된다. ”  ? 중정 국장

“ 대통령 선거 전에는 이 안은 내놓지 말아야 한다. ”  ? 최고회의 위원,


이렇게 해서 독도인근이 대한민국과 일본이 공동관리하는 공해가 된 것입니다. 특히 일본은 차관 및 청구권 등 돈문제로 박정희 정권을 압박. 돈이 필요한 박정희 정권을 일본의 입장을 수용하게 된 셈입니다.

 


1998년 신한일어업협정의 경우 그 배경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994년 11월, 배타적 경제수역(EEZ)을 정한 유엔 해양법 협약의 발효로 바다 관할권이 12해리에서 200해리까지 확대되었으나 한·일간의 거리가 400해리가 채 되지 않아 바다 경계선을 별도로 정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한국 경제가 몰락하기 시작한 1997년에는 한국경제가 악화된 상황을 틈타 일본이 어업문제에 대해 강경하게 나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직선기선을 넘어왔다며 한국어선을 무차별 나포하지요.

1997년 10월 22일, 일본측은 독도 주변수역을 제외하고 신어업협정을 타결하자는 의견을 한국측에 보냈다.[29] 한국측은 별다른 응답이 없었고 1997년 11월 7일에는 한국정부가 독도에 접안시설을 건립하여 독도에 대한 입지를 확고히 하자 하시모토 류타로일본총리까지 나서서 이를 비난합니다. 결국 김영삼 정권이 끝나는 1997년 12월말까지 결론을 내지 못하게 되고 일본은 1997년 12월 29일 기존의 어업협정을 파기, 재교섭할 것을 선언합니다.

결국 1998년 1월 23일, 일본은 한국의 정권교체와 IMF사태의 틈을 타 기존의 한일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17차례에 걸친 실무자회의와 고위급 회담을 거쳐 1998년 9월 25일 신한일어업협정을 타결합니다.

상대국 EEZ(배타적 경제수역)의 입어조건에 대해서도 1999년 2월 5일 양국 수산당국자간 합의로 완전타결됐으나 1999년 2월 5일 합의된 실무협상에서 발생한 쌍끌이 어업 누락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99년 3월 8일부터 10일간 일본 도쿄에서 추가협상을 진행, 1999년 3월 17일 쌍끌이어업, 복어채낚기, 갈치채낚기 등의 입어척수(총 137척)를 추가로 확보하게 되지요.

현재의 한일어업협정은 1998년 9월 25일에 체결된 뒤 99년 2월, 정식 발효돼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협정 체결 당시 일각에서는 “DJ의 방일을 앞두고 한국 정부가 양국 정상회담의 걸림돌을 없애기 위해 서둘러 어업협정을 체결했다”는 비난여론도 있었지만 가장 주요하게는 김영삼 정권의 실정으로 인한 IMF와 이를 기회로 일본이 자기들 유리한대로 신한일어업협정을 유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신한일어업협정 당시 일본이 한국에 막대한 차관을 지원해줬고 그로 인해 한국이 불리한 신한일어업협정을 맺었다는 이야기도 나오게 되는것이지요.

2005년 문화일보의 이병선 기자는 칼럼을 통해 1965년 한일어업협정에서도 군사정부에서 중간수역 지위에 해당하는 공동규제수역으로 설정했고 신 한·일 어업협정은 김대중 정권에서 최종 타결됐지만 문제의 조항을 수용한 것은 김영삼 정권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후 독도문제가 계속 불거지자 2006년 노무현 정권은 독도를 강제관할권 배제선언을 하였고 EEZ 기점으로 선포하였고, 2001년과 2009년 두차례에 걸쳐서 헌법재판소는 한일어업협정에 대하여 영토조항 위반을 이유로 제기된 헌법소원에 대하여 어업협정은 영토나 독도 영유권 문제와 관련이 없다는 이유로 기각 판결이 내려집니다.

 


오히려 큰 문제는 한일기본조약으로 불리는 한일협정입니다.

한일협정은 대한민국과 일본이 서로간에 일반적 국교관계를 규정하기 위해 1965년 6월 22일에 조인한 조약으로 4개 협정과 25개 문서로 구성 되어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사용하는 정식 명칭은 대한민국과일본국간의기본관계에관한조약(大韓民國과日本國間의基本關係에관한條約, 조약 제163호)이며, 일본에서 사용하는 명칭은 일본국과 대한민국과의 사이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입니다.

해방이후 미국은 소련, 중국에 대항하기 위해서 일본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지역 경제 블록 형성을 기획하지만 이승만 정부의 반일감정 때문에 일본과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승만이 하야 한 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고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자 당시 일본총리였던 이케다 하야토는 한국의 박정희 정부를 지지한다는 의사를 표명합니다.

1961년 11월 22일 박정희는 일본을 방문하여 이케다를 만나 "맨주먹으로 황폐한 조국을 이끌어 보겠다는 의욕만은 왕성하다"며 협조 요청. 1962년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은 외무장관 오히라 마사요시를 만나 협상의 내용을 합의하며 이 협상 내용을 "김-오히라 메모"라고 합니다.

후일 김종필은 "내가 이완용이 소리를 들어도 그 길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조금 적은 액수이더라도 빨리 공장을 세우고 기술을 배웠기 때문에 우리 경제성장이 빠르지 않았느냐.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김종필-오하라 메모는 다음과 같습니다.


김종필의 메모
1. 청구권은 3억 달러(무상 공여 포함)로 하되 6년 분할 지불한다.
2. 장기 저리 차관도 3억 달러로 한다.
3. 한국의 대일 무역 청산 계정 4천6백만 달러는 청구권 3억 달러에 포함하지 않는다.
오히라의 메모
1. 청구권은 3억 달러까지 양보하되 지불기한은 12년으로 한다.
2. 무역 계정 4천6백만 달러는 청구권 3억 달러에 포함한다.
3. 차관은 청구권과 별도로 추진한다.
합의 사항
1. 무상공여로 3억 달러를 10년에 나누어 제공하되 그 기한을 단축할 수 있다. 내용은 용역과 물품 한일 청산계정에서 대일 부채로 남은 4천5백73만 달러는 3억 달러 중에서 상쇄한다.
2. 대외 협력 기금 차관으로 2억 달러를 10년에 나누어 제공하되, 그 기간은 단축할 수 있다. 7년 거치 20년 분할 상환, 연리 3푼 5리(정부 차관)
3. 수출입은행 조건 차관으로 1억 달러 이상을 제공한다. 조건은 케이스에 따라 달리한다. 이것은 국교정상화 이전이라도 실시할 수 있다.(민간 차관)

 

한일기본조약의 주요 내용은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 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는 제2조와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확인한다."는 제3조, 그리고 양국의 수교를 인정하는 제4조 등입니다만 현재 조약의 내용을 두고 한국정부와 일본 정부가 해석이 달라 논쟁의 여지가 있기도 합니다. 일본은 대한민국이 해방되면서 병합조약이 무효가 되었다는 입장이며 한국은 일제의 의한 강제합방이고 그것은 불법이니 일제의 강제합방 자체가 무효라는 입장입니다.

한일기본조약은 '한일어업협정',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 및 대우 협정', '경제 협력 협정', '문화재 협정' 등의 부속 조항이 존재하며 공개되지 않은 '독도밀약'이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한일협정에서 돈이 많은 일본은 박정희 정권에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식민지 시절의 피해보상에 대해 사과 및 보상을 거부하고 이를 박정희 정권이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현재까지도 일본에 일제강점기 하의 제대로 된 사과과 보상을 받지 못하는 매국적 협정이라는 점입니다.

2010년 말 대한민국 여성 정신대 피해에 대한 보상액이 1인당 99엔이었던 반면 중국 정신대 300여명에 대한 보상액은 2억5000만엔에 달한 것이 바로 그 방증입니다. 식민지 시절의 피해에 대해 국가가 보상요구에 얼마나 적극적인가에 따라 피해보상규모가 달라지는데, 한국은 박정희의 매국적 한일협정에 발목이 잡혀 사과는 커녕 제대로 된 피해보상마저 받지 못하는 실정이지요.

그런데도 박정희가 매국적 한일협정을 맺은 댓가로 받은 5억달러에 대해 '그정도면 많이 받은거' 라 헛소리를 늘어놓는 종자가 있다니..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민족문화연구소가 공개한 미국 중앙 정보국 특별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박정희 정권은 군사쿠데타를 한 1961년부터 한일협정을 체결한 1965년 사이 5년간에 걸쳐 6개의 일본기업들로부터 집권여당인 민주공화당 총예산의 2/3에 해당하는 6600만 달러를 제공받았으며, 이 밖에도 일본에 쌀을 수출하는 과정에서 김종필이 재일 한국기업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지요.

 

하지만 한일협정에 있어서 가장 문제가 되는 건 '독도밀약'입니다.

'독도밀약에 대해서는 월간중앙이 2007년 3월 19일 보도하기도 했지요.

한·일 협정의 최대 걸림돌이었던 독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도밀약은 협정 체결 5개월 전인 1965년 1월 11일 서울 성북동 박건석 범양상선 회장 자택에서 정일권 국무총리와 우노 소스케 자민당 의원이 합의합니다.

한국과 일본의 생존자 증언과 자료를 근거로 추적한 독도밀약은 '앞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으로써 일단 해결한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한·일 기본조약에서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원칙 아래 4개 부속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독도밀약'이 체결되는데는 김종필 전 총리의 친형이며 당시 한일은행 전무인 김종락이 큰 역할을 하게 되지요.

김종락은 월간중앙과 인터뷰에서 대한민국과 일본이 독도 문제를 앞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으로 한다. 일단 해결로 간주한다는 아이디어는 내가 냈다고 말하며 박정희 군사정부는 독도밀약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인정과 함께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했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이건 뭐 일본극우로부터 돈받아서 박정희 정권을 유지했다는 이야기라고 생각해도 되겠네요.)

 

'독도밀약'의 4개 부속조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 독도는 앞으로 대한민국과 일본 모두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론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 장래에 어업구역을 설정할 경우 양국이 독도를 자국 영토로 하는 선을 획정하고, 두 선이 중복되는 부분은 공동 수역으로 한다.

- 현재 대한민국이 '점거'한 현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경비원을 증강하거나 새로운 시설의 건축이나 증축은 하지 않는다.

- 양국은 이 합의를 계속 지켜 나간다.

 


월간중앙에 따르면 "한·일 두 나라는 김영삼 정부 때 독도에 새 접안시설을 건설함으로써 약속을 깬 것 외에는 거의 밀약을 준수해 왔다"고 밝혔지만 현재 일본 정부는 독도밀약을 부인하며 비밀리에 영유권 관련 밀약을 맺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불가능 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김영삼 정권인 문민 정부 때 일본이 배타적 경제수역의 기점을 독도로 하겠다는 선언을 했을때 김영삼은 배타적 경제수역의 기점을 울릉도로 하는 발표를 하고 독도를 잠정적 조치수역(중간수역)으로 삼기도합니다.

 


결국 독도 관련 분쟁의 빌미는 박정희 정권 때부터 시작된 것이고 이후 군부독재가 이어지고 한나라당정권이 경제를 망치면서 일본 극우들이 독도 망언을 할 여지를 마련해준 셈입니다.

문제는 한국의 자칭 보수들의 '독도' 관련 행태들입니다.

 1962년 9월 3일 제6차 한일회담 제2차 정치회담 예비절충 4차회의에서 이세키 이나지로 국장이 "독도는 무가치한 섬"이라며 "크기는 히비야 공원 정도인데 폭발이라도 해서 없애버리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였고, 이후 1962년 11월에는 김종필 부장이 기자들에게 "독도에서 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갈매기 똥도 없으니 폭파해버리자고 말한 일이 있다" 라는 발언을 하기도 합니다.
 
1965년 1월 이미 독도밀약을 맺고, 같은 해 6월 22일 독도를 공동규제수역으로 규정하는 한일어업협정을 발표하면서 일본어선의 우리 영해에서의 어업을 허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전두환 군사정권의 독도에 대한 행태ㅏ지요.

군사정권은 '독도 밀약' 이후 독도수호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잡아 고문하고 괴롭혀 독도관련 운동을 금지시켰으며 이를 바탕으로 전두환은 일본에 직접 방문해서 40억불 차관 제공을 약속받습니다.

그리고 1982년 11월 16일 독도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독도의용수비대장 홍순칠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갑니다.

중앙정보부는 독도의용수비대장 홍순칠을 고문하면서 독도가 한국땅이라고 떠들고 다니지 말라고 협박, 오른손마저 불구로 만듭니다. 홍순칠은 1986년 고문후유증으로 사망합니다.

 


결국 현재 독도문제의 발단은 박정희 정권의 매국적 한일협정이 시작이고, 망국적 '독도밀약'이 시발점이 됩니다.

그런점에서 현재 한일어업협정을 들먹이며 김대중, 노무현 탓을 할게 아니다 망국적이며 매국적인 한일협정부터 다시 개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한일관계에서의 굴욕과 모멸은 계속될테지요.

그런데 무식함을 자랑하며 한일어업협정을 들먹이는 바보들은 도대체 뭔 잡것들인가요?

제발 정신차려야 할 인간들이 도저에 깔려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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