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에 발목잡힌 대한민국

개중복이래 작성일 12.09.18 16:5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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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공화국 대통령 후보의 자격을 묻는다①] 5·16 쿠데타와 10월 유신 - 진중권 -

 

순항하는 듯했던 박근혜호(號). 출범하자마자 역주행을 하더니 결국 유신항(港)에 닻을 내렸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일부 선원이 '기항지가 잘못됐다'고 항의하나, 선장과 항법사 등 조타실 간부들은 요지부동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유신항에 정박한 배는 닻을 올리기를 거부하고 있다. 닻은 거기에 내려둔 채 미래로 나아가겠다는 이야기. 선원들이 '그게 불가능하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 소리가 조타실까지 들릴 리 만무하다. 선장은 '이게 다 어묵 사먹으며 포장마차 매상이나 올려주면 풀릴 문제'라고 믿는 모양이다.

 

나는야 유신의 딸


솔직히 박근혜 후보가 스스로 유신에 발을 묶을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과거를 돌이켜보면,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인터넷으로 기사검색을 해 보라. 박근혜 후보는 이미 2002년, 2007년에도 지금과 동일한 물음에, 지금과 동일하게 대답했다. 지금이 2012년이니, 정확히 5년마다, 즉 대선이 있는 해마다 과거사 문제에 봉착했던 것이다. 물론 그때마다 그녀의 입장은 확고했다. '유신체제는 정당했고, 아버지는 억울하다'는 것. 사실 그녀의 인식은 뿌리 깊은 것이다.


한마디로, 5·16은 단순한 군사쿠데타가 아니라, 헌법전문에 명기된 3·1운동이나 4·19에 맞먹는 '혁명'이며, 유신체제는 단순한 군사독재가 아니라 자주국방과 자립경제를 위한 '구국의 조치'였다는 이야기다. 이번 사태는 박근혜 후보가 23년 전의 이 생각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상식적으로 30여 년 전의 과거사에 발이 묶여 표를 잃는 것은 후보에게 결코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이 부조리를 고집하는 것일까. 이 사안이 적어도 그녀에게는 계산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5·16 쿠데타와 유신헌법은 박근혜의 정치철학의 요체, 말하자면 그녀가 정치를 하는 이유, 그녀가 삶을 사는 동기 그 자체다. 따라서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곧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리라. 박근혜가 쏟아지는 비난 속에서도 유신에 대한 신념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통합진보당 구당권파가 쏟아지는 비난 속에서도 북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과 흡사하다.


박정희 따님의 사당, 새누리당


5·16 쿠데타와 유신체제에 관한 박근혜 대표의 인식은 정확히 3공·4공 시절 정권에서 강제로 유포하던 정치 프로퍼갠더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청와대에서 자라나 그 안에서 '퍼스트레이디' 역할까지 하다 보니, 정권의 프로퍼갠더에 완전히 세뇌돼 버린 것이다. 이런 문제적(?)인 후보를 모신 당으로서는 당연히 근심이 깊을 수밖에. 그리하여 김종인·이준석·이상돈 교수는 물론이고, 남경필 의원을 비롯한 당내의 몇몇 인사들도 박근혜 대표에게 과거사에 관해 입장을 전환하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하지만 후보는 요지부동이다.

 

정상적인 경우, 후보의 사적 소신(?)과 정당의 공적 입장이 충돌하면, 조정이 이뤄진다. 이 당연한 일이 왜 안되는 것일까. 그것은 새누리당이 정상적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박근혜 후보는 한나라당이 오합지졸이 될 때마다 나타나 당을 위기에서 구하곤 했다. 하지만 선거 때마다 발휘되던 그 리더십의 요체가 무엇인가. 결국 '박정희 향수'로 핵심 지도층을 추슬러 그것을 구심으로 선거전을 이끄는 것이었다. 이렇게 위기의 극복이 아버지의 후광을 업은 개인의 인기에 의존하다 보니, 당 자체가 특정인의 사당이 돼 버린 것이다.

 

어느 당이나 선거를 앞두면 후보 중심으로 편제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새누리당은 그 수준을 넘었다. 박근혜가 '정당의 후보'가 아니라, 새누리당이 '후보의 정당'인 상황. 홍일표 대변인의 사임은 이를 잘 보여준다. '두 개의 인혁당 판결' 발언이 파문을 일으키자, 홍 대변인은 "박 후보의 표현에 일부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과한다"고 밝혔다. 그러자 박 후보 본인이 "전혀 그런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고 이를 부인하고 나섰다. 설사 그런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고 해도, 당의 혼란상을 드러내며 굳이 부인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파문이 더 커지자, 박 후보는 마지못해 "피해를 당한 분들의 아픔을 깊이 이해하고 진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는 입장을 내놓는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박근혜의 언급이 '쿠데타와 유신체제'에 대한 반성과 사과라고 봐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녀는 여전히 쿠데타를 혁명이라 여기고, 유신독재의 정당성을 확신한다. 다만 그 도도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희생자는 발생할 수 있고, 그런 희생에 대해 유감스럽다는 것이다. 물론 가해의 주체는 역사며, 판단의 주체 역시 역사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역사'가 죽일 놈이다.

 

유신 공주님의 환관들


어차피 박근혜가 청와대에서 쌓은 국정경험을 통해 얻은 리더십 자체가 결코 민주적인 성격의 것은 아니다. 며칠 전 영남의 어느 도시에 강연을 갔다가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다. 박근혜 후보가 시장을 방문했더니, 그곳에서 장사하던 어느 할머니가 "공주마마 오셨다"며, 넙죽 엎드려 큰 절을 올리더란다. 박근혜 후보가 5·16 쿠데타와 10월 유신에 대해 그토록 당당한 태도를 보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것이 자기만의 생각이 아니라, 자기 측근과 지지자들 사이에 널리 공유된 생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가령 친박 좌장이자 박근혜 경선캠프 공동선대위장인 홍사덕 전 의원은 "유신은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한 게 아니라 수출 100억 달러를 넘기기 위한 조치였다"고 말했다. 박근혜 후보는 곧바로 "그건 그 분 개인의 견해"라며 선을 그었다. 하지만 홍사덕 전 의원의 발언은 유신이 '자립경제'를 위한 조치였다는 후보의 소신과 일치한다. "인혁당? 모두 배가 부른가 보지?"라는 친박 이한구 의원의 발언도 마찬가지. 오죽 황당하면, 이를 보다 못한 정몽준 의원이 "국민을 배부른 돼지로 아느냐?"며 반박하고 나섰겠는가.

 

새누리당 김병호 공보단장은 아예 염장을 지른다. "사과라는 것은 누구한테 하는 사과냐, 피해자가 누구냐"라며 "사과를 피해자 당사자들이 아닌 그들의 가족이나 후손까지로 확대하기 시작하면, 전 국민 중에 사과를 안 받을 사람이 있겠느냐"라고 말했다(<한겨레> 김병호 박 후보 공보단장 '인혁당 사과는 당사자들에게만' 2012년 9월 16일 치). 결국 인혁당 사건은 희생자의 가족과 후손들에게까지 할 사안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박근혜 공주께서 승하하셔야겠다. 저승에 계신 '당사자들'에게 사과하는 길은 그 길밖에 없잖은가.

 

헌정을 수호할 대통령의 책무
 

박근혜 후보에게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것은 5·16 쿠데타와 10월 유신에 대한 공식적 입장이다. 왜냐하면 이 두 사건은 대한민국의 헌정을 유린한 범죄였기 때문이다. 박근혜 후보는 대통령이 되려 한다. 그런데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책무 중의 하나는 헌법을 수호하는 데에 있다. 이 두 사건에 대한 입장을 묻는 것은, 자신의 집권 시에 행여나

(1) 나라가 혼란하여 쿠데타가 일어날 경우 그것을 '혁명'이라 환영할 것인지,
(2) 자신에게 국민이 저항할 경우 유신과 같은 초헌법적 조치를 취할 것인지,

여부를 묻는 것이다. 이 두 물음의 어느 것에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하는 후보는 절대로 대통령이 돼서는 안된다. 쿠데타를 용인하고, 파쇼헌법을 옹호하는 것은 헌정을 수호할 책무를 진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으로서는 심각한 결격사유다.

일각에서는 이것이 '연좌제'라고 비난한다. 과연 그럴까? 그렇지 않다. 박근혜 후보가 내세우는 국정운영의 경험은 유신시절에 습득된 것이다. 게다가 우리 국민은 박근혜 후보를 유신의 어두운 기억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의향이 있다. 하지만 박근혜 후보를 그 어두운 시절과 연결시키는 끈은 박 후보 자신이 맨 것이다. 끈을 풀어버리라는 제 당의 조언도 거부하고, 국민의 요청도 거절하고, 제 스스로 옭아맨 것이다. 결자해지. 그 끈을 푸는 것은 박근혜 후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다.

 

'아버지에 대한 딸의 개인적 생각까지 바꾸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는 얘기도 들린다. 이것은 박정희-박근혜 부녀의 사적 관계의 문제가 아니다. 그 점은 박근혜 자신이 <나의 삶, 나의 아버지>라는 책에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승을 잘 만나는 것인데 그런 점에서 나의 부모님은 내 삶의 모델이다. 특히 정치인이 된 지금 아버지는 그냥 아버지가 아니라 선배이자 스승이며 나침반과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한 마디로 공적 검증의 대상인 정치철학을 아버지 박정희가 아니라 독재자 박정희에게서 고스란히 물려받았다는 이야기다.

 

"유신체제와 같은 독재가 되돌아 올 가능성은 없다"고 말하지 말라. 우리가 어디 일본의 식민지배가 되돌아올 것이 두려워 일본에게 과거사에 대한 사과와 반성을 요구했던가. 게다가 우리는 이명박 정권을 경험해 봤다. 아무리 민주화가 됐어도, 대통령 중심제 하에서 질 낮은 대통령 한 명이 민주주의를 순식간에 망가뜨리는 것을 지난 5년간 똑똑히 목도한 바 있다. 그런 국민이 헌정을 파괴한 독재자에게 정치를 배운 인물이 대통령이 되는 데에 두려움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설사 '상당히 느슨한 독재'가 된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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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중간 발췌함

기사전문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79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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