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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코리아=김은석기자]중앙정보부 창립 멤버인 조웅(본명 조병규) 씨는 5·16군사정변 이후 장도영 중장을 비롯한 반혁명혐의로 기소된 이들의 명예회복에 앞장서고 있다. 그는 한쪽의 일방적인 증언으로 기록된 역사적 사건 이면에 권력투쟁에 밀려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 인물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밝혔다. 이승만 정권의 장기집권을 종식시킨 4·19혁명과 제2공화국을 폭력적으로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5·16군사정변의 중심에 섰던 그의 동지 대부분은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하거나 이미 고인이 되었다. 그 역시 80세를 바라보고 있다. 이는 1960~70년대 사회격변기 시절에 발생한 역사적 사건에 대해 증언할 수 있는 인물이 많지 않음을 방증한다. 이에 <시사코리아>는 조웅 목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역사적 뒤안길에 사라져 가는 사건들을 되짚어보았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정국은 혼란스러웠다. 당시 나에게 장면 정권은 권력에 취한 무능한 정권으로 보였다. 4·19혁명에 가담한 이들은 비서관으로 들어가며 권력에 흡수되었고 사상 유례없는 3·15부정선거를 저지른 이들에 대한 처벌도 이뤄지지 않았다. 4·19혁명 과업을 잇지 못한 것이다. 박순천 할머니께서도 ‘지금은 정국이 혼란스러운 상황이라 처리하지 못했다’는 말만 하셨다. 할머니께서는 오히려 나에게 미국 유학을 권하기도 하셨다. 이때부터 장면 정권을 믿을 수가 없었다.”
-군이 나서야 한다고 판단한 것인가.
“그렇다. 4·19혁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군이 나서야 된다고 보았다. 일제시기 광복군 제1지대장을 역임했으며 국군 창군의 일원으로 당시 군의 원로 중 한사람인 채원개 장군을 찾아갔다. 군의 거사를 말씀드리고 영관급 장교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장도영계’ 인물인 이해영 대령을 소개받았다. 그는 후에 ‘장도영 반혁명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인물이다. 육군본부 이해영 대령의 방에서 ‘하극상 사건’ 관련자들을 만나게 되었고 특히 중령 계급장을 단 김종필과 첫 대면하게 되었다. ‘하극상 사건’은 당시 군의 젊은 영관급 장교들이 주도한 정군운동을 말한다.”
-군의 쿠데타 주도 세력과의 첫 만남이었다. 조 목사를 본 그들의 반응은 어떠했나.
“그들은 ‘하극상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나누었다. 재판에 계류 중이던 ‘하극상 사건’을 책임질 무료 변호사를 선임해주겠다고 하니 그들은 처음에 반신반의했다. 내란죄로 구속됐을 때 무료 변호사 15명의 도움을 받았던 터라 그들을 소개해 주겠다고 말했다. 변호사를 선임 할 여건이 되지 않았던 이들은 호의를 표하기 시작했다. 결국, 무료 변호사들에게 요청을 했고 3~4개월 동안 재판이 미뤄졌던 ‘하극상 사건’은 김동복, 김종필, 석정선 등이 예편되고 나머지는 무죄판결을 받은 것으로 끝이 났다. 재판이 끝나면서 군사혁명은 구체화 되었고 거사계획을 세부적으로 세우기 위해 김종필을 수차례 만났다.”
-거사계획은 어떻게 진행되었나.
“1차 계획은 4·19 1주년을 맞이해 벌이려고 했으나 정보가 샜으며 5월 13일로 예정된 2차 계획 역시 정보가 새나갔다. 5월 15일은 야전군 창설기념일이라 전방 지휘관이 전부 강원도 원주에 모여 파티에 여념이 없는 동안에 허를 찌르자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이때도 8·15광복 이후 남한 주둔 미군의 전투부대인 24군단에 소속되어 첩보활동 등을 담당한 정보기관인 CIC에 첩보가 들어갔다. 5·16거사가 CIC에 누설이 되면서 쿠데타 세력은 구속직전 상태에 놓였다. 당시 나는 CIC 부부대장 백운상 장군에게 ‘5·16 쿠데타 백지화 계획’을 알림으로써 역정보를 흘렸다. 이로써 5·16은 계획대로 추진할 수 있었다.”
-5·16군사정변 이후 어떠한 변화가 있었나.
“5·16 백지화 역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군사정변의 성공에 일조했으나 쿠데타 이후 김종필의 독주체제가 시작되었다. 그가 다른 세력을 거세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적인 사건인 바로 ‘방첩대 사건’이다. 이는 김종필이 장도영계를 제거하기 위한 음모로 방첩대 부부대장 백운상 장군과 그 주변 인물이 연루된 사건이다. 이들이 박정희와 김종필 암살을 모의했으며 반혁명 음모를 꾸몄다며 마포형무소에 구속시킨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 김종필을 만나 따져 물었으나 그는 ‘내 편에 서라. 장도영 편에 서지 말고 분명히 하라’고 윽박질렀다.”
박정희·김종필 세력과 대립각 세워
-장도영과 김종필 사이에서 중간에 선 입장이 되었다. 양측으로부터 오해의 시선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어느 쪽이냐는 김종필의 질문에 ‘나는 장도영 중장파도 아니고 누구파도 아니다. 대한민국파다’라고 말했다. 김종필 독주체제를 비판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당시 남아나지 않았다. 장도영 중장을 제거하려는 생각을 품었던 김종필 계획을 알고 장도영 비서실장에게 이를 알려주었으나 장도영측은 ‘설마, 그럴 리가 없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결국 중앙정보부 차장 서정순 중령은 장도영 중장 등 장교 44명을 구속하여 수사한다고 발표하면서 결국 권력투쟁에 패배한 장도영은 반혁명분자로 규정되었다. 나 또한 장도영 중장의 참모들의 구명운동을 하면서 구속되고 말았다. 장도영 파로 몰려 중앙정보부 서울지부에 구속된 것이다. 나는 군법회의에 넘겨져 비밀재판을 받았으며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아 192년 12월에 풀려났다. 그러나 다시 중앙정보부에 붙들렸고 재구속, 수감이 이어졌다.”
-황태성의 존재는 언제 알게 된 것인가.
“서대문형무소에 있을 때 같은 방을 쓰던 한 간첩을 통해 황태성이 서대문형무소에 같이 수감되어 있다고 전해 들었다. 그는 황태성이 북한에서 ‘밀사’ 임무를 띠고 박정희를 만나러 왔다가 구속된 것이라고 전했다. 황태성이 반도호텔 735호 특실에서 박정희와 김종필을 만났고 민주공화당 창당에도 관여했는데 지금은 박정희 입장이 곤란해서 수감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일이 잘 풀려 곧 석방될 것이라고 했다. 이후 나는 어느 날 밤중에 석방 통지서를 받았다. 당시 최고회의 의장 경호실장 박종규가 김종필에게 말해 풀어났으니 한번만 협조하라고 했다. 군의 일부 장성들이 각하를 추방하려고 하니 그들 속에 들어가 공작을 해달라는 것이다. 나는 화를 냈고 그 제안에 응하지 않았다. 그 때 이후로 김종필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마음을 돌리게 되었다.”
-김종필 세력에 반기를 들기 위해 미국측에 황태성에 대한 제보를 한 것인가.
“공작을 해달라는 부탁이 들어온 후 유엔군 총사령부로 가 황태성이 박정희의 정치적 고문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보했다. 당시 나로서는 모든 권력과 군이 박정희 아래에 있는 상태였기에 미국의 힘을 빌리려는 생각뿐이었다. 사건의 전보를 제보하고, 한미합동 조사단 구성을 요구했다. 하루가 지나 케네디 대통령의 안보담당 보좌관, 3정보기관의 정보분석관 등이 속속 미8군사령부로 모여들었다. 미국은 제보가 있기 전 황태성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중앙정보부 부장이던 김형욱이 말하길 미국 측이 자꾸 황태성을 넘기라고 요구하자 박정희는 절대로 넘겨줄 수 없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김형욱은 황을 넘겨주고 한미간의 유대강화를 내세웠으나 박정희와 김종필은 황태성과 비밀회담을 통해 통일문제를 논의한 사실이 탄로나면 국민들의 반발을 살 것을 두려워 한 것으로 보인다.”
-황태성과 박정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황태성은 대구 폭동 때 사살당한 박정희의 친형인 박상희 친구이다. 박상희의 결혼 중매도 황태성이 했다. 그는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박정희가 가장 좋아하던 형이었고 대구폭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월북한 인물이다. 박정희가와 친분이 있는 황태성은 북한 밀사로 남한으로 와 박정희 또는 김종필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요청했고 이들은 비밀회담을 통해 통일문제를 논의했다. 김종필은 박상희의 사위였다. 황태성은 북으로부터 많은 액수의 자금도가지고 온 것으로 알려졌다. 제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윤보선은 황태성 문제를 중요 선거 이슈로 삼기도 했다. 결국, 미국으로부터 사상 의심을 받고 있으며 대통령 선거 승리를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박정희는 황태성을 남파 간첩으로 몰아 형식적인 재판을 거쳐 사형에 처했다.”
황태성 사건 제보로 15년형 확정
-4·19 이후 사회혼란속에 5·16군사정변을 추진했지만 조 목사의 뜻과는 다른 결과를 낳고 말았다. 최후 수단으로 미국과 접촉을 했지만 잘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미국측에 황태성 사건을 제보했을 때 이미 미국은 박정희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미국 측으로부터 김종필이 추방된다는 내용을 확인했으나 미8군에서 나오자마자 나는 중앙정보부에 의해 잡히고 말았다. 군사법정에서 최종 15년 형이 확정돼 징역살이를 해야 했으나 민정이양 특사로 풀려났다. 그때의 상처는 너무 컸으며 결국 목회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대학생 신분으로 유일하게 군사쿠데타에 가담한 이유는 4·19의 완성이라는 순수한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혁명’이라 믿고 참여한 이유는 군이 나서더라도 성공 후에는 반드시 ‘군 본연의 임무로 돌아간다’는 것을 전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 내부의 다른 세력들이 차례로 제거되는 것을 보면서 5·16 이상은 좌절되었다. 역사의 내막을 알리고 권력투쟁에 밀려 억울한 누명을 쓴 군 선배들의 명예회복이 필요하다. 사건의 중심에 섰던 인물들의 양심선언을 요하는 바이다. 지난해 4월 31일 강영훈 장군은 공식석상에서 처음으로 창군멤버인 강문봉 장군의 김창룡저격 사건 누명에 대해 재심 근거를 밝혔다. 미국 CIA 요원이었던 차국찬 목사, 방원철 장군도 백운상 CIC 방첩대 부부장 암살에 관한 증언을 했다. 반혁명조작사건에 연루된 장도영 중장, 김웅수 중장, 고 박림항 중장의 명예회복은 본인이 책임지고 이행할 것이다.”
김은석 기자 news@sisa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