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치하 민족해방구, 미군정의 무지 - 도올

불가능성정리 작성일 13.03.01 14: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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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치하 민족해방구 - 도올

 

 

자! 한번 생각해보자! 20세기 아시아 대륙에서 러시아 차르왕조가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으로바뀌고, 만청왕조가 무너지고 공산당 세력이 득세해가고, 일본은 탈아론적 세계열강으로서 아시아를 탐식하는 제국주의 세력이 되어있었다.

그 일본의 제국주의에 가장 첨예하게 목숨걸고 저항해야만 하는 한국의 지사들이 기댈 수 있는 사상이란 과연 무엇이었으며, 그들의 활동 공간은 어디에 있었을까?

러시아와 중국은 일본 제국주의와 맞싸워야하는 대국이었으며 신흥국가였다.

그리고 모두 공산주의 그들의 국가이념으로 수용했다.

그러니까 공산주의는 유럽에서 태동된 사상이지만 그것이 개화하고 역사적인 실현을 성취한 곳은 아시아였다.

이 아시아에서 두 공산주의 신흥대국이 일본제국주의와 버티고 있었다면 당시 한국의 양심적 지성이 가야할 곳은 너무도 빤했다.

연해주 ,북간도, 서간도, 그리고 장정이후로 팔로군의 활동지역인 화북지역, 그리고 강남(양자강 이남)의 조계지역과 국민당 지배지역은 모두 우리민족의 해방구와도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 지역에 사는 대다수의 독립투쟁세력들은 직간접으로 공산주의 사상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바로 오늘까지도 청산되지 못한 우리민족의 비극이 내재해 있었다.

 

당신의 공산주의라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반공교육속에서 이해하는 빨갱이 사상이 아니라, 서구의 근대사상으로서 동양에 유입된 많은 사조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그런데 일제강점으로 생겨난 우리민족의 특수한 절박한 상황에 가장 어필될 수 있는 많은 이론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선 공산주의는 전근대적 왕조 사상이 아닌 매우 근대적인 사상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모습까지를 구상하는 매우 미래지향적인 유토피아 사상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사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거나 긍정하는 사상이 아니라, 부정하고 변혁하는 사상이다.

인간세의 모순을 파헤쳐서 그 모순의 갈등요소를 활용하여 미래로 나아가게 만든다.

그리고 억압받고 못사는 사람들에 대한 매우 희망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따라서 일제에 아부하고 그 체제로 인하여 덕을 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공산주의 이론이 구미에 맞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적대감과 혐오감을 일으켰으며 싹을 잘라버려야만 하는 매우 위험한 사상이었다.

기존의 모든 체제를 전복하려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뜻있는 사람에겐 일제통치란 어차피 전복되어야만 하는 대상이었기 때문에 공산주의의 혁명적 요소는 조금도 나쁜 생각이 아니었다.

 

문제는 사실 계급투쟁과 민족해방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공산주의에 헌신한 사람들에게는 계급투쟁이 곧 민족해방의 길이라고 믿었다.

이 논리의 정당성은 엄밀하게는 보장되기 어렵다.

칼 막스의 이론 속에 민족해방에 대한 이론이 계급투쟁과 체계적으로 맞물려 있지도 않다.

그리고 계급 투쟁에 헌신한 사람들의 민족해방에 대한 열망을 공산주의 국가들이 보장해 준 것도 아니다.

러시아는 조선민족의 독립투쟁을 도와주기도 했지만 이해관계에 따라서는 좌절시키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민족의 지사들은 막연하고도 순결하게 계급투쟁과 민족해방을 일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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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의 무지 - 도올

 

미군정은 뒤늦게 이 땅에 왔다.

미국 중부 일리노이 시골사람이었던 하지가 5척의 구축함을 포함 21척의 배를 몰고 인천의 위험하 파도를 가른 것은 1945년 9월8일이었다.

미군과 행정요원을 포함한 2만5천 명의 미국인들은 아침의 태양이 선명하게 빛나는 이 한국이라는 미지의 나라에 대해 거의 완벽하게 무지했다.

 

 

언어도 역사도 풍속도 그 정치사적 내막도 전혀 몰랐다.

무엇보다도 관심 밖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상륙은 단지 하나의 사실을 조선역사에 기록하고 있었다.

서기 668년 삼국통일이래 최초로 매우 비극적인 민족체험의 시대, 즉 민족분단의 시대로 돌입했다는 사실을.

 

이렇게 무지한 미군정이 남한을 통치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고안해 낸 것은, 바로 일본의 식민지 통치기구를 그대로 존속시키고 조선인 행정관리들과 과거 일본치하에서 항일 투사나 속칭 빨갱이들을 때려잡는 데 매우 유능했던 경찰들을 그대로 인계받아 사회질서를 유지시키는 것이었다.

그들은 당시 자생적으로 조직된 인민위원회야말로 한국을 새롭게 건설하는데 가장 효율적이고 가장 도덕적이고 또 가장 미국의 자유주의 이상에 순응할 수 있는 민족주의 세력이라는 창조적인 생각을 꿈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인민위원회를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해산시켰으며, 무력저항을 가혹하게 진압했다.

그리고 건준을 인정치 않았다.

친일, 친미 성향의 보수적 엘리트들은 건준과 인민위원회를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조종되고, 북한에 있는 소련과 연계된 조직으로서 미군정의 모든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는데 모든 열정을 쏟았다.

당시 영어나 조금하고 기독교 등 서양적 가치관에 익숙하며 초코렛을 던져주는 양키 아저씨들에게 아부할 줄 아는 재능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든지 쉽게 출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들이 예외없이 내걸어야 하는 가장 명백한 소신은 반공이었다.

그들에게 반대하는 모든 민족주의세력을 공산주의로 휘모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미군정의 무지스러운 정책은 일제식민지 잔재의 청산을 요구했던 민중과 독립운동세력들에게는 좌절을 안겨주는 반면, 친일세력에게는 유리한 입지를 마련해주는 반역사적 결과를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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