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독재시절 학생, 재야인사 등 민주화운동가들을 고문, '고문기술자'로 유명한 전 경기경찰청 공안분실장.
이근안은 공군헌병 출신으로 지난 70년 순경으로 경찰에 입문했다. 고문 혐의로 잠적할 때까지 거의 대부분 대공분야에만 몸담은 공안통이었다. 경찰 재직기간 매번 특진으로만 고속 승진했고 재직기간 중 모두 16차례의 표창을 받았다.
이 중에는「간첩 검거 유공」이 4회나 포함돼 있고 지난 81년에는 서울대생들의 무림사건 해결에 공을 세워 내무부장관 표창, 82년에는「국가안보 기여」로 9사단장 표창, 86년 경찰의 날에는 대통령으로부터 옥조근정훈장을 받기도 했다. 대공.공안 분야에서는 「이근안이 없으면 수사가 안된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반달곰」이란 별명을 갖고 있지만 80년에는 '박중령'으로도 통한 이 전 경감은 고문기술로 '관절뽑기'로부터 '볼펜심문'에 이르기까지 각종 고문에 통달해 있어 다른 기관에도 '고문출장'을 다닌 것으로 알려졌다.
이근안은 김근태 전 민청련 의장을 고문한 혐의로 지난 88년 12월24일부터 수배를 받아왔다. 또한 이근안은 79년 남민전사건, 81년 전노련 사건, 85년 12월 납북어부 김성학씨 간첩조작 사건, 86년 반제동맹사건 관련 피의자를 고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98년 10월 서울고법 형사2부가 납북어부 김성학씨 등이 낸 재정신청을 받아들임으로써 2013년까지 그의 공소시효가 연장되었으며, 12년째 검?경의 수배를 피해 도피해오다 1999년 10월 28일 검찰에 자수했다.
2000년 9월 징역 7년에 자격정지 7년의 대법원 판결을 받았다.
http://terms.naver.com/entry.nhn?cid=2971&docId=71172&mobile&categoryId=2971
1999년 10월 28일
수원지방검찰청 성남지원
이근안
자수
이근안은 경기도경찰청 공안분실장이던 1988년 12월 24일 국민회의 김근태 의원을 비롯한 숱한 사람들을 고문한 고문기술자라는 사실이 밝혀진 뒤 잠적하였다. 다음 해 1월 6일 경찰은 그를 전국에 지명수배하였고, 서울지방검찰청 강력부와 경기도경찰청 등 검찰과 경찰은 전담수사반을 편성하여 소재파악에 나섰다.
그러나 1999년 10월 28일 이근안이 스스로 수원지방검찰청 성남지청에 자수를 하기 전까지 10년 10개월 동안 '안 잡느냐 못 잡느냐’의 논란 속에 그의 생사조차 확인이 되지 않았으며, 검찰과 경찰 주변에서는 자살설·해외밀항설·성형수술설·비호은둔설 등 온갖 설(說)만이 난무하였다.
고문경찰관 이근안을 잡기 위한 고문 피해자들의 추적은 그 동안 계속되었다. 일반인들로부터의 제보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거의 대부분 관련제보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로 들어왔다. 민가협이 지난 1989년 2월 이근안에 대하여 현상금을 걸고 자체 공개수배를 하는 등 끊임없이 추적해 왔기 때문이다.
이근안이 자수한 후로 그의 도피를 지시하고 비호한 세력이 경찰 간부였음이 드러났고, 김근태고문사건 등 5·6공화국 시절 자행된 각종 인권유린의 실태가 밝혀졌다. 또, 이근안이 어떻게 그토록 장기간에 걸친 도피생활을 할 수 있었는지 풀어야 할 의문점들이 많다. 그가 관련된 사건들은 대부분 공소시효가 지났으나 비인도적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배제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애국은 무슨 정의는 얼어죽을 아무나 잡고 고문한뒤 허위자백 받고
껀수 챙긴뒤 고속승진 하려고 그냥 막잡고 고문이나 하던놈임
이근안은 그냥
소시오패스.사이코패스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