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판결--박정희 일본장교로 독립군 토벌 했다....
대법원3부(주심 안대희 대법관)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항일무장투쟁부대 토벌에 참여했었다”는 내용이 담긴 책을 출판한 혐의(사자의 명예훼손)로 기소된 출판사 아이필드 대표 유연식(49)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8일 밝혔다.
유씨는 2004년 “박정희는 간도 조선인 특설부대에 자원입대해 동북항일연군 토벌에 나섰으며 그 공으로 신경육군군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했다”는 내용이 담긴 조선족 작가 류연산씨의 책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를 출간했다.
박 전 대통령의 둘째 딸 박근령(55)씨는 만주에서 활동한 친일파들의 행적을 담은 이 책 때문에 아버지의 명예가 훼손됐다며 유씨를 고소했다.
1·2심 재판부는 “역사적·공적 인물의 경우 시간이 경과하면 망인과 유족의 명예보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표현의 자유가 보호돼야 하므로 사자 명예훼손죄가 성립하려면 허위 사실에 대한 고의성을 엄격히 따져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박 전 대통령의 특설부대 근무설은 여러 책에 언급됐고 저자 류씨는 역사학계에서도 인지도가 있어,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유죄가 인정되지 않는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이미 학계에서는
1. 다카키 마사오 (한국명 박정희) 가 일본인보다 빠른 승진을 누렸다는 점
2. 독립군을 토벌한 부대 중 하나가 다카키 마사오의 소속 부대였다는 점
3. 그가 토벌한 팔로군 중 상당수는 조선 의용군이 소속되었다는 점
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박정희가 "독립군을 110여회나 토벌했다"는 이야기의 시발점은 진보학자의 주장이 아닌 1960년대 박정희추종자가 쓴 박정희 전기다. 다만 이 책은 박정희의 친일전력을 덮기 위해 박정희의 일본군 복무경력을 반공투쟁으로 미화시켜 항일세력들을 공비들로 둔갑시켰다. 공비들로 매도된 그 분들이 일제와 맞서 싸운 항일운동가로 인정받게 됨에 따라 110여회의 토벌설은 오히려 박정희의 악행으로 부메랑이 돼 인터넷상에도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다시말해 110회 토벌설을 먼저 주장한 쪽은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 지지자들 인 것이다. 왜 박정희는 자신의 추종자가 쓴 이 내용에 대해 침묵했으며, 왜 추종자들은 이제와 자신들이 주장하고 인정했던 110여회의 토벌사실을 좌파들의 박정희 죽이기라며 부정하는 건가?
만주8단에 같이 근무했던 선배와 동기들의 증언을 통해 박정희가 일선 소대장으로 근무하면서 독립군 토벌작전에 수차례 참가한 사실은 이미 확인되었다. 박정희가 110여회나 독립군 토벌에 적극 나섰다는 주장은 개인적 생각으론 과장됐다고 생각하지만, 간도특설대나 만주보병8단 출신들의 증언도 자신들의 죄를 축소하기 위해 박정희의 전력을 축소시켰을 가능성이 많아, 박정희가 겨우 수차례 토벌작전에 참가했다는 이들의 이야기또한 그 신빙성이 희박하다.
당시 박정희와 함께 우수생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진학한 중국인 우쉬에원 씨의 증언에 의하면 "나와 다른 2명의 동급생은 육사 졸업 후 항일 전선에 가담하기 위해 도망쳤지만 박정희는 만주 군관학교로 다시 돌아가 견습군관을 거친 뒤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고 했다.
또한 일본인인 다카야나기 도시오 일본 법정대 교수조차도 "당시 공비로 불리던 독립군 토벌이 군관학교의 역할"이라며 "황국군인으로 길러진 청년 장교들이 만주국의 통치수단이었으며 동시에 소련과의 전쟁준비에 이용됐다"고 했다.
참고로 당시 만주에 독립군이 없다라고 말씀하시는데 당시 박정희가 싸웠던 팔로군에는 많은 조선의용군이 포함되 있었고 연안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활동을 하며 8로군과 협동작전도 펼치고 화북, 만주지역에서 항일전투를 전개했습니다. 또한 8로군에도 한인무장단체나 독립투사들이 꽤 많이 소속돼 있었지요. 이들 독립투사들은 독자적 군대를 결성하기 힘들어 민족 독립을 위해 무기를 얻고자 8로군에 들어간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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